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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인이 만든 미국영화

김치찌개를 소재로 아시아인이 만든 미국영화
김치찌개를 소재로 아시아인이 만든 미국영화

김치찌개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재로 다루어진 영화가 있다.
한국영화가 아니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미국영화다.
그리고 여기엔 많은 아시아의 재능이 녹아들어 있어 더욱 그 의미가 크다.
오늘은 그 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헐리우드 속의 아시아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넷플릭스가 바꾼 영화 제작 환경

코로나19로 전세계가 겪어보지 못한 어려움을 동시에 겪고 있는데 영화업계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가지 않고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에 따르자면 영화관에 가지 않게 된다. 그나마 한국은 아주 소수의 관객이 찾더라도 영화관이 영업이라도 하지만, 미국과 유럽 대부분의 나라는 아예 문을 닫아버린 상태다. 모두가 집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시간이 엄청 늘어난 현실 속에서, 오히려 호황을 누리는 업체가 있으니 음식배달, 온라인쇼핑 등이 좋은 예이다. 여기에 더하여 영상 스트리밍 업체가 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영업망을 가진 넷플릭스는 불어닥친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표정관리를 해야 할 정도로 재미를 보고 있다.

넷플릭스는 비디오 대여업으로 시작한 업체인데, 점포에 가서 빌리고 반납하고 하는 번거로움을 우편으로 대체하여 소비자의 호응을 얻었다. 마침 영화 소프트가 VHS에서 DVD로 넘어가던 시절이라 얇은 봉투에 넣을 수가 있다는 장점을 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나아가 온라인으로 영상 컨텐츠를 공급하는 스트리밍 서비스로 넘어가면서 업계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넷플릭스 같은 스트리밍 업체의 등장으로 비디오 대여업의 공룡 같았던 ‘블록버스터 비디오’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비디오 대여업은 진작에 그야말로 공룡처럼 순식간에 멸종하듯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넷플릭스는 그동안 몇 차례 혁신적인 시도를 하며 고속성장을 거듭하여 왔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기존 컨텐츠의 방영권을 사오는 라이센싱에 더하여 직접 투자로 오리지널 컨텐츠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는 거액의 투자에 대비해 성공 확률이 낮으므로 제작사들은 가능한 한 리스크가 적은 작품을 선호하게 된다. 이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공통된 현상인데 특히 헐리웃에서는 더욱 심하다. 대형 스튜디오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원작을 바탕으로 한 프랜차이즈,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는 스타를 주연으로 한 액션활극, 로맨틱 코미디를 선호하고 아니면 청소년층을 타겟으로 한 저예산 공포 호러물 등을 투자의 우선 순위에 두는데, 내용도 과거 흥행에 성공한 작품을 모델로 하다보니 상투적이고 도식적인 전개가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참신한 내용이지만 본 적이 없는 장르,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려는 시나리오나 감독은 일할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다.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거나 고발하는 내용도 기피당하기 쉽다. 모든 연령층의 고객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것 같은 내용의 작품도 그렇고, 같은 연장선에서 젊은층을 벗어난 연령대의 배우가 주연을 하는 작품도 투자받기 어렵다. 내용은 재미있지만 흥행에서 실패할 경우 책임을 지기 싫은 대형스튜디오의 간부들이 나서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가 예술이기도 하면서 산업이기도 한 양면적인 특성을 지닌 매체라는데서 오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이런 제작풍토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게 넷플릭스다. 구독자들로부터 매월 고정액으로 회비를 받고 모든 작품을 보여주는 넷플릭스는 작품 한 편 한 편의 흥행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을 살려서 기존의 제작스튜디오들이 꺼려하는 작품에 과감한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선보인 작품들이 이미 여러 제작사에서 퇴짜를 맞은 것이 많았다고 알려졌다. 오리지널 시리즈 초기에 선보인 <하우스 오브 카드>는 엄청난 선풍을 끌며 역대 미국드라마의 명작 반열에 들어갔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자신도 열렬한 팬이라고 공언하기도 할 정도였다. 실제로 이 작품은 넷플릭스 가입자 증가에도 커다란 공헌을 하여 넷플릭스 경영진에게 큰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자전적 영화 <로마>, 마틴 스코세지 감독의 <아이리시 맨> 등이 넷플릭스 투자, 배급 작품이다.

봉준호 감독이 <옥자>를 구상할 때에 헐리우드에서 그의 위상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500억 가까운 예산을 대주는 제작사를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넷플릭스가 참여하면서 제작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훗날 <기생충>으로 그의 재량을 믿어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한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는 자전적인 이야기다. 70년대 초 멕시코시티에 살고 있는 어느 중산층 가족의 이야기를 함께 사는 가정부에게 초점을 맞추어 끌어가는 이야기인데,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일상을 묘사하면서 시대적 상황은 배경처럼 흘러간다. 더구나 이걸 흑백으로 찍는다고 고집을 하였다. 쿠아론 감독 역시 넷플릭스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로마>는 아카데미 상을 여러 부문 수상하여 넷플릭스에 보은을 한다. 마틴 스코세지 감독의 <아이리시 맨>은 예산이 2천억원이 넘는 영화다. 마블 코믹스를 바탕으로 한 <어벤저스>나 <아이언맨> 같은 규모의 예산으로 흥행이 5억불 이상이 안되면 채산이 맞지 않는다. 50, 60년대 활약을 하다가 70년대 중반에 실종된 전미노조위원장 지미호퍼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이미 지미호퍼가 누군지도 모르는 지금의 미국 영화팬들에게 크게 어필하는 내용이 아니다. 게다가 알 파치노, 로버트 드니로가 아무리 명배우라고 하여도 70세가 넘은 노령이고, 감독 역시 팔순을 바라보는 만큼 2천억원은 어느 제작사도 감당하기 힘든 금액인게 현실이다. 여기에 넷플릭스가 투자자로 참여하여 완성이 되었다. 넷플릭스는 영화 뿐만이 아니라 TV 드라마, 다큐멘터리, 스탠드업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에 이처럼 자신의 비지니스 형태의 장점을 내세운 공격적인 투자로 지금까지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듭해 온 것이다.

헐리우드의 재능있는 아시안 영화인

그러면 오늘의 이야기, 2019년도 로맨틱 코미디 <우리 사이 어쩌면>을 소개해 보자. 이걸 다루기 위해 서설이 길어졌는데, 넷플릭스가 있어 가능한 영화였기에 설명하다 보니 조금 길어진 것 같다.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우리 사이 어쩌면>의 원제는 이다. 머라이어 캐리의 를 유머스럽게 꼬아서 나온 제목이다. 그러니까 ‘언제나 나의 자기가 되어줘’가 썸을 탔든가, 결정장애였든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든가 ‘언제나 내게 긴가민가한’ 관계라는 말이다. 이 영화는 제작, 감독, 주연, 각본 모두가 미국에서 활약하는 아시아계 영화인들이다. 이렇게 아시안들이 한 작품에 재능을 모으기도 쉽지 않은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영화가 극장 흥행에서 성공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만큼이나, 아니면 또 다른 의미에서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 역시 넷플릭스의 투자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리고 공개되고 나서 시청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넷플릭스 없이 이 영화는 나오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아시아계 영화인들을 크게 고무시키는 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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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TV쪽에서도 활약하는 나흐나치카 칸 감독이 연출하였는데 그는 이란출신의 부모를 둔 2세이다. 각본을 맡은 이는 랜달 박, 앨리 웡, 그리고 마이클 골람코인데 골람코는 필리핀과 중국계 부모를 둔 아시안이다. 잠깐 ‘아시아’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한국사람들은 한국, 중국, 일본을 떠올리고 타이, 베트남,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까지가 평소 생각하는 아시아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유럽이나 미국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다르다.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는 물론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터어키까지가 다 아시아인 것이다. 호주, 뉴질랜드 빼고 월드컵 축구 아시아 예선에 들어가는 40여개 국가 전부라고 생각하면 쉽다. 우리에게 익숙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말고도 남아시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등의 구역에 포함되는 나라들이 모두 우리와 같은 아시안이라는 사실을 평소 염두에 두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잠깐 언급해 보았다. 그리고 주연은 랜달 박과 앨리 웡이 맡았고, 조연으로도 많은 아시아계, 특히 한국계 배우들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대스타 키아누 리브스가 영화 속에서 본인으로 출연한다.

랜달 박과 앨리 웡은 주연에 각본 뿐만 아니라 프로듀서도 맡았다. 그러니까 재주있는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획을 하였고, 함께 각본 작업을 하여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기까지 제작자의 역할을 다한 뒤에 주연으로 열연까지 하였다는 이야기다. 앨리 웡은 베트남과 중국계의 2세 아시안으로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도 활약하는 재원이다. 랜달 박은 코미디언이자 배우인데 한국 영화팬에게도 낯익은 한국계 2세이다. 앨리 웡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계 아버지와 베트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은 LA에 있는 UCLA에서 공부하였다. UCLA에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모여 만든 LCC극단이 있는데,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연기에 대한 열정과 재능을 발견하고 또 훈련을 하였다. 1995년 창설된 이래 숱한 아시아계 재원들이 이 극단을 통하여 연예계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미국에서 여러가지 제약을 안고 활동해야 하는 아시안들을 위해 이 극단을 창설한 이가 바로 랜달 박이다. 랜달 박은 LA에서 태어나 UCLA에서 영문학과 글쓰기로 학사를, 아시안 어메리칸 스터디로 석사를 취득하였다. 굳이 학력을 이야기 한 것은 헐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아시아계 배우들을 보면 학력이 우수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기 때문이다. <서치>에서 주연을 맡았던 존 조도 그렇고 <행오버>로 스타가 된 켄 정도 그렇다. 이는 뒤집어 아시안들이 헐리우드에서 돋보이려면, 백인들과 경쟁하려면, 그만큼 더 우수하고 더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영화에 담겨 있는 김치찌개와 스팸 그리고 가위

아무튼 랜달 박과 앨리 웡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녹여내는 각본을 쓰느라고 영화 속의 주인공도 한국계, 베트남과 중국계 아시안 그대로 설정하여 이야기한다. 사샤 트란(앨리 웡, 초기에는 아역배우가 맡는다)과 마커스 킴(랜달 박, 초기에는 아역배우가 맡는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옆집에 사는 친구사이다. 사샤는 부모가 둘 다 가게를 돌보느라 바빠서 혼자 저녁을 차려먹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아시아계 가정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런 사샤를 마커스의 어머니는 자주 불러다 저녁도 챙겨주고 잘 돌보아준다. 이 역시 백인계보다 아시아계 가정에서 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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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샤는 어린 나이에 혼자서 맨밥에 스팸을 구워 간단히 끼니를 때워도 그냥 먹지를 않는다. 접시에 밥도 예쁘게 담고, 스팸도 가지런히 모양을 갖추어 얹은 뒤 장식용 미니 우산을 꼽아서 그럴듯한 디스플레이를 완성하고서야 마음에 들어한다. 이 장면은 두가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사샤가 일찌기 요리나 외식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시아계 사람들의 스팸 사랑이다. 스팸은 미국에서는 싸구려 가공식품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다. 2차대전 때 군용식량으로 맹위를 떨쳤는데 하도 많이 지겹도록 배급이 되어 물린 병사들이 많다고 했다. 그런 추억에서 연유하여 인터넷이 나온 뒤 쓸데없이 일방적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메일이 스팸메일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해마다 한국의 명절 시즌이 되면 해외 미디어가 심심치 않게 다루는게 한국의 ‘스팸 선물세트’ 이야기다. 잘사는 나라 한국에서 명절에 스팸을 선물로 주고받는게 그들 눈에는 신기하게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스팸 등 런천미트라고 불리는 가공육 제품의 매출 상당부분이 명절기간에 집중된다. 나는 스팸의 인기는 없이 살던 시절에 맛있게 먹던 추억을 넘어서, 그 짭짤한 맛이 빵보다는 밥하고 잘 어울리는 데에도 그 이유가 있다고 본다. 미국에서도 하와이는 특별하게 스팸 소비량이 많은 주이다. ‘스팸 무스비’라고 하여 스시처럼 주먹밥 위에 스팸을 얹은 음식을 아무 편의점에 가서도 살 수 있을 만큼 인기다.

영화는 스팸으로 이렇게 앞으로 나올 음식에 관한 암시를 하며 시작한다. 저녁을 다 먹은 참에 옆집의 마커스가 와서 “우리 엄마가 와서 국을 많이 만들었으니 가져가래”라고 전한다. 사샤는 옆집 마커스 엄마가 만드는 음식에 관심이 많다. 주방에서 만드는 걸 즐겁게 도우며 이런저런 레시피를 배운다. 특히 마커스의 엄마(미국이름 쥬디)가 만드는 김치찌개는 걸작이다.

“김치찌개는 정말 간단하단다. 좋은 재료를 쓰기만 하면 훌륭하게 완성이 되는 거야”

“정말 냄새가 너무 좋아요”

여기서도 한국사람이면 놓치기 아까운 깨알 같은 디테일이 나온다. 가위를 쓰는 장면이다. 쥬디는 김치찌개에 넣을 파를 칼 대신 가위로 싹둑싹둑 썰면서 말한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어디에든 가위가 빠지지 않지. 야채, 국수…”

그러면서 너도 해보겠냐고 사샤에게 가위를 건네고, 사샤는 익숙하게 가위를 다룬다. 그러자 하는 말이 걸작이다.

“얘 넌 정말 타고 났구나. 너 한국 혈통 아닌게 확실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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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들은 요새 ‘국뽕’이라는 속어도 등장했지만, 진짜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나도 외국에서 살면서 같은 아시아계 사람들한테 칭찬의 의미로 ‘한국사람 같다, 한국사람 닮았다’고 말하는 걸 여러번 보았다. 이 영화에서 이 장면은 한국인들의 가위사랑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대목이라고 나는 해석했다. 모든건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받아들이기까지는 생경한 습관들이 있는데, 가위가 그렇다. 고기집에서 갈비나 삼겹살을 가위로 자르는 것은 이제 익숙해져서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재봉하면서 천이나 자르던 가위가 식탁에 등장해서 종업원이 그걸로 눈앞에서 고기를 서걱서걱 자르는 모습은 처음에 등장했을 때 상당히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특히 냉면이 나오면 종업원이 와서 물어보고 가위로 순식간에 반으로 혹은 십자로 사등분 하는 모습은 그다지 우아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음식이 유행하고 한류가 퍼지면서, 가위가 사용되는 모습이 한국음식의 호방함과 다이나믹한 일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 나는 개인적으로 다행이라고 안도하고 있다. 솔직히 처음엔 저항을 많이 느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도 한국인의 가위사용은 한국인의 뛰어난 점처럼 묘사되고 있다.

아시안 이민 1세를 향한 이민 2세의 헌사

20여 년이 지나 둘이 성인이 되어 우연히 다시 만난 대목의 이야기로 건너가 보자. 그 사이에 마커스는 어머니를 사고로 잃게 되고, 둘은 틴에이지 시절 서로 사랑 비슷한 것도 해보고 싸움도 하고 그러는데 여기서는 생략한다. 둘이 재회했을 때 사샤는 유명한 셀럽 셰프가 되어 있었고 마커스는 홀로 된 아버지를 도와 냉난방 설치 및 보수를 하는 일을 한다. 여기서도 한국적인 대목이 나오는데 아버지는 자식이 잘 되기만 한다면 자기는 어찌 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자식은 홀로 된 아버지를 두고 독립을 해서 다른 데로 가는 건 아예 꿈도 꾸지 않는다. 마커스도 마찬가지여서 동네에서 여가시간에 이름없는 밴드에서 활동을 하며 일상을 보낸다. 영화에서 나중에 밝혀지지만 ‘아버지를 모셔야 하는’걸 자신의 당연한 운명이라 혼자 결정하고, 인생에서 다른 선택지를 제외했기 때문이다.

사샤는 샌프란시스코에도 자신의 레스토랑을 개업하는데, 이 준비를 위해 몇 달간 살 임시 거처를 마련한다. 이곳에 에어컨디셔너를 설치하러 온 게 마커스 부자였던 것이다. 마커스 부자와 사샤의 재회 장면에서도 한국인이 아니면 묘사할 수 없는 대목이 나온다. 이십 년만에 사샤를 만난 마커스의 아버지는 만나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널 다신 못볼 줄 알았지. 넌 이제 아시아의 오프라 윈프리 같은 유명인이 되었잖아. 가진 재산이 얼마나 되니?”

사샤가 웃자 마커스가 한마디 한다.

“아버진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묻는거야”

아버지의 뒤이은 말.

“결혼한다며? 잘 됐구나. 약혼자가 좀 늙어보이더만, 몇 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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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미국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질색하는게 애인있냐, 없으면 왜 없냐, 왜 결혼 안하냐, 했으면 왜 애를 안낳냐 등의 질문이다. 재산도 그렇다. 이십여 년 만에 만나서 첫 질문이 돈은 얼마나 모았냐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네 약혼자 늙었더라다. 이 장면은 아시아계 이민 1세가 미국의 매너에 반하는, 그러나 악의가 없는 문화적 차이로 오해를 많이 산다는 걸 2세들이 나서서 다른 미국사람들에게 설명해 주는 대목으로 보인다. 코미디의 강점이 이런데 있다. 사람들을 웃기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말이다. 사샤는 잘생기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사업가(한국계 미국인)와 약혼을 했는데 결국 파혼을 하게 된다. 마커스는 우울한 사샤를 데리고 틴에이저 시절 자주 가던 차이나타운의 딤섬 레스토랑을 가는데 사샤는 맛도 없는 이곳이 아직 영업을 하고 있는게 놀랍다고 말한다. 그러자 마커스가 너 미쳤냐, 난 여기 일주일에 두번씩이나 오는데…라고 말한다. 하까우(새우만두)를 먹어보더니 사샤가 말한다.

“와 맛있네! 이걸 왜 내가 맛이 없다고 생각했을까?”

“넌 너의 유년시절을 다 나쁘게만 기억하려고 해서 그런거야”

“그래, 네 말이 맞네. 여긴 그대로네. 맛은 좋아도 서비스는 무례하고, 광동어 못한다고 무시당하고”

그러자 마커스가 광동어로 주문을 한다. 그러자 몇마디 안했는데도 모든 종업원들이 친절하게 웃으며 응대하며 시우마이를 서비스로 가져다 준다. 마커스가 말한다.

“내가 좀 배웠지. 서비스도 좋아지고 공짜로 얻는 것도 있고”

이 장면은 아시안 커뮤니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또 존중해주면 그만큼 되갚는다는 점을 묘사한 대목으로, 웃으면서도 피부에 와닿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것 말고도 이 영화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구석구석 들어있다. 차이나타운에는 장애인 주차구역이 꽉 차있는데 멀쩡한 젊은이가 장애자 표식이 붙어있는 차에서 내려 걸어간다. 사샤가 ‘이거봐. 모든 차에 장애자 마크가 붙어있어. 중국사람들은 다 엉터리야’라고 말하는데 이걸 백인이 얘기하면 인종차별이 된다. 하지만 중국계이기도 한 사샤가 얘기하면 자조적인 코미디 대사가 되어 용납이 된다. 나중에 나오지만 마커스 부자가 한국식 사우나에 가서 때를 밀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이태리 타올로 쭉쭉 밀어서 아버지 얼굴에도 밀린 때가 잔뜩 붙어있다. 불결하게 느껴지지 않고 도리어 유쾌한 이 장면은 아시안이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이 영화에 키아누 리브스가 나오는 장면은 그야말로 포복절도할 대목으로 가득차 있다. 오늘 주제와는 상관이 없으니 생략하는데, 꼭 한번 보시길 권한다.

김치찌개를 소재로 아시아인이 만든 미국영화

마지막 장면으로 넘어간다. 이 영화는 내용을 알고 보아도 충분히 즐길 수가 있으니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지만 결말을 이야기하자면 둘은 우여곡절 끝에 재결합을 하게 된다. 업계에서 주는 유명한 상을 받게 된 사샤를 따라 뉴욕에 간 마커스는 시상식이 끝난 뒤에 얘기를 나눈다. 사샤가 묻는다.

“근데 배고프지 않아?”

“배고프다마다. 베트남 쌀국수로 무화과 말은게 메인이었는데”

퓨전, 네오, 트랜스 등의 단어가 들어간 파인 다이닝의 음식들이 푸짐하지 않고 모양만 낸다는 걸 꼬집은 대목이다. 사샤가 말한다.

“운이 좋은 줄 알아. 내가 정말 괜찮은 새로운 데를 알거든”

그리고는 한밤중에 마커스를 개업 일주일 전이라 어수선하다며 조그마한 식당으로 데려간다. 들어서자마자 마커스는 마음에 든다. 소박한 인테리어에 익숙한 냄새. 주방에 가보니 한 솥 커다랗게 끓고있는 김치찌개. 놀라는 마커스에게 메뉴판을 보여주는 사샤. 마커스 어머니의 이름을 딴 식당이다. ‘쥬디의 레시피(Judy’s Way)’ 메뉴는 빈대떡, 김치전, 만두 등 한국음식으로 가득차 있다. 사샤가 얘기한다.

“여기 모든 메뉴는 내가 네 어머니한테 배운 것들 그대로야. 나도 이런 식당을 하고 싶었어”

영화는 김치찌개가 간판메뉴인 이 조그마한 식당이 백인 손님들로 꽉 차고, 밖에는 기다리는 행렬이 길게 늘어선 장면으로 끝이 난다. 영화는 깔깔 웃으면서 시간이 휙하고 지나가는데, 따스한 시선을 바탕으로 한, 고생을 하며 자식을 키운 아시안 이민 1세에 대한 아시안 2세들의 헌사와도 같은 작품이다. 꼭 한번 감상하실 것을 추천한다.

영화제작자. SCS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 이주익

이주익

영화제작자

영화제작자. SCS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영화 <워리어스 웨이>, <만추>, <묵공> 을 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음식과 요리에 관심이 많아, 취미로 음식에 대한 연구를 했고 음식 전문 서적 수천 권을 보유중이다. 음식 관련 영화와 TV 드라마 제작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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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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