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위의 패스포트

체호프를 찾아서, 모스크바행 야간열차

노트 위의 패스포트 : 체호프를 찾아서, 모스크바행 야간열차
노트 위의 패스포트 : 체호프를 찾아서, 모스크바행 야간열차

모스크바행 열차는 밤 11시 38분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막 도착한 열차와 발차를 기다리는 열차 엔진이 플랫폼마다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엷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고, 여행자들은 장거리 야간열차에 탑승하기 위해 캐리어를 끌고 걸음을 재촉했다.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들, 이제 막 도착한 사람들의 표정과 발걸음에 익숙해질 때도 되었었는데, 아니었다. 강물을 거슬러 먼 곳에서 돌아오는 연어떼처럼 상기된 얼굴로 밀려오는 여행자들을 매번 떨리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이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고 가지 않았다면, 누군가 열차칸 입구에서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그렇게 서 있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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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역 플랫폼

출발 5분 전. 발차가 임박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플랫폼을 가득 메웠던 여행자들은 순식간에 뿔뿔이 빠져나가고, 나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나는 열차칸을 찾아 좌석을 확인하고, 가방을 선반에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왠지 모를, 슬픔 비슷한 감정이 솟았다. 여수(旅愁)인가? 낯선 도시를 오가는 여정이 무리 없이 마무리되었다는 안도감과 피로감.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시 모스크바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플랫폼 지붕들, 기둥들, 철로들. 그 끝에 역무원이 보였다. 정각(定刻). 역무원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그러자 미세하게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순간이 지나가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정인(情人)이 차창 밖에 서 있기라도 하듯, 다시 가방을 챙겨 내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무엇, 아니 누구를 생각했던가. 톨스토이의 안나(『안나 카레니나』)를 생각했던가. 체호프의 니나(<갈매기>)를 생각했던가. 도스토옙스키의 소냐(『죄와 벌』), 아니 그의 구원자이자 동반자였던 아내 안나를 생각했던가. 미련이 남았다. 좀더, 머물고 싶었다. 좀더, 돌아보고 싶었다. 특히, 묘지와 극장. 도스토옙스키가 묻혀 있는 넵스키 수도원 묘지와 체호프에게 끔찍한 실패의 참담함을 안겨준 알렉산드린스키 극장. 파리에서라면, 과감하게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나는 그러지 못했다. 혼자, 자유롭지 못했다. 아니, 용감하지 못했다. 좀처럼 어둠이 내리지 않는 도시를, 그 이름을, 푸시킨처럼, 불러볼 뿐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여, 백야(白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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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 네바강 백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모스크바 역에서 모스크바의 레닌그라드 역까지 달려오는 동안, 밤은 새벽을 지나 아침이 되었다. 나는 잠을 잤던가. 잠이 드는 순간도,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열차 바퀴가 쉬지 않고 질주하는 내내 한순간도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인가. 1년 전,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밤과 낮을 달리는 동안에도 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했던가. 소설을 읽었던가. 글을 썼던가. 생각을 했던가. 열차에서 내리고 나서 뒤돌아보니, 자작나무들 외,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차창 밖을 스치고 지나가던 해질녘의 자작나무, 자정 너머 까만 어둠 속에 희끗희끗 빛나던 자작나무, 어슴푸레한 여명 속에 어른거리던 자작나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에 이르는 길 위에서 하나 아닌 안나들, 그녀들의 운명에 사로잡혀서 밤을 하얗게 지샜다. 열차에서 내리고 보니, 안나들이 내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밤은 얼마나 짧고, 소설은 얼마나 긴가. 톨스토이의 안나, 도스토옙스키의 안나, 체호프의 안나(「사랑에 관하여」, 안나 알렉세예브나 또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안나 세르게예브나), 그녀들의 표정, 그녀들의 운명이 시작되는 언저리만을 되새겨보는 데도 하룻밤이 모자랐다.

모스크바의 레닌그라드역에 도착할 즈음, 한 가지 분명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2년 연속 여름만 되면 러시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중부 시베리아 크라스노야르스크로, 동부 이르쿠츠크로, 수도 모스크바와 남서쪽 블라디미르, 툴라, 야스나야폴랴나, 수즈달 등으로, 그리고 북서쪽 끝, 발트해 연안의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돌아보았다. 모든 것을 내가 기획하고, 예약하고, 실행한 여행들과는 달리, 러시아에서의 일정은 일행들과 함께 움직이고 호흡하느라 자유로운 동선을 생각할 수 없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부터 멀어질수록 차오르는 아쉬움과 함께 오직 하나의 열망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하면, 시간을 최대한 끌어 모아 나만의 행로를 감행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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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국립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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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 운하와 피의 사원

먼 곳까지 가서 제한된 시간에 누군가의 묘지를 찾아가는 행위는 흔한 것이 아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집을 방문하고 『죄와 벌』의 현장을 찾아갈 때에도 다른 매혹적인 것들을 포기해야만 했다. 모스크바에서의 마지막 날, 일정에 없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에 가겠다는 나만의 행로는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짧은 시간 안에 수행해야 하는 자유 미션과 같았다. 나의 은밀하고도 돌발적인 묘지행은 하랑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랑은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한국어와 문학을 공부하는 1학년 학생으로 심포지엄 발표장에서 만났다. 본명은 알리사 체칼리나. 심포지엄이 끝나자마자 나는 알리사와 그녀의 동급생 아르굴과 함께 교정을 벗어나 모스크바 시내를 걸었다. 알리사도 아르굴도 나도 외국문학도였다. 나는 프랑스어문학 전공생, 그들은 한국어문학 전공생. 오래전 프랑스어문학과 학생이었던 나에게 프랑스에서 온 선생은 프랑스 이름을 지어주었다. 나에게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어 회화 필수 교과목을 수강하는 학생들 모두에게 적용되었다. 본명과 비슷한 어감의 프랑스 이름을 짓거나, 평소 학생이 선호하는 이름으로 짓기도 했다. 알리사와 아르굴은 눈빛을 반짝이며 호기심을 보였다. 자신들의 이름을 한국명으로 짓는다면 무엇으로 할까. 어떻게 모스크바 다리 위까지 걸어왔는지 모를 정도로, 우리 셋은 이름짓기에 열중했다.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이름들까지 섭렵한 결과 알리사는 하랑, 아르굴은 아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며칠 다녀와서 재회했을 때, 그리고 귀국해서 서로 편지를 주고받을 때, ‘알리사에게’라고 쓰지 않고 ‘하랑에게’라고 썼다.

사람과 사람 사이 맺어지는 인연의 시작은 얼마나 돌발적이고 비의지적인가.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 나는 하랑과 아연이라는 이름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오래전부터 알아온 선생과 제자처럼, 아니 작가와 독자처럼 우리는 모스크바 거리를 활보하며, 눈물이 새어 나오도록 웃고 대화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는 모스크바강에 이르러 다리 한가운데에서 크렘린궁과 바실리카성당 그리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오래도록 바라보았고, 스탈린 양식의 첨탑이 치솟은 고층 건물들을 찾아 세어보기도 했고, 아흐마토프 거리의 악사들 앞에서 가볍게 박자를 맞추어보기도 했고, 도스토옙스키가 비둘기들의 친구가 되어 앉아 있는 국립도서관 앞에 이르러 작가의 동상에 등을 기대고 앉아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들과 함께 이 거리, 저 거리 걸어 다니며, 모스크바 사람들의 삶의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서 냉전기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뇌리에 각인되어 있던 공산주의 수도로서의 모스크바가 새로운 인상으로 다가왔다. 모스크바 강에서부터 도스토옙스키가 굽어보고 있는 국립도서관 앞 광장에 이르도록 깨달은 많은 것 중에 결정적인 것은 모스크바는 석양이 아름다운 도시이고, 사람들은 유독 작가를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모스크바에서 나를 사로잡은 순간들은 대부분은 석양과 동상(銅像)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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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강 석양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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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푸쉬킨과 그의 신부 동상

내가 생애 처음 먼 곳을 꿈꾸어 패스포트를 마련한 것은 폴 발레리의 시 한 편, 그 시의 공간, 「해변의 묘지」에 이끌려서였다. 남프랑스 서쪽, 지중해안의 작은 항구 세트(Sete)에 간 것은 꿈을 품은 지 8년 만이었다. 스무 살에서 스물여덟 살까지 나는 오직 그곳에 닿기 위해, 학교와 직장에 다녔고, 원고를 썼다. 그리고 삼십여 년이 흘렀다. 시인은 자신의 시의 무대에 영면해 있었다. 처음 나를 꿈꾸게 했던 그 순간, 그 마음처럼, 나는 지금도 학교와 직장에 다니고 있고, 원고를 쓰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삶이 되었다.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여정의 끝은 누군가의 영면처가 될 것이었다.

날이 밝으면, 체호프에게 갈 것이었다. 하랑이 이끄는 대로, 지하철을 타고,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로 갈 것이었다. 모스크바에서의 마지막 밤, 창밖은 늦도록 어두워지지 않았고, 전자책 서가에서 체호프의 소설을 펼쳤다. 마치 연애상담사처럼, ‘왜 그녀는 나 아닌 그를 만났는지’, ‘왜 나는 그보다 먼저 그녀를 만나지 못했는지’, 이미 벌어진 삶 뒤에 만난 사랑의 실수로 괴로워하는 체호프의 그녀와 그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가슴 아파하느라 잠을 못 이루었다. 날이 밝으면, 하랑이 올 것이고, 나는 체호프의 언어로 그의 문장들, 그와 그녀의 대사들을 청해 듣고 싶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 가는 길. 하늘은 파랗고, 태양은 번쩍였다. 체호프에게 닿기까지, 나는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꿈꾸기 시작한 스무살부터 유럽은 물론 아시아, 아메리카 등지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작가와 시인, 화가와 음악가들의 영면처를 찾아다녔다. 평생 써온 소설의 여정과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사랑, 이러한 집착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체호프의 그녀와 그들은 소설과 연극을 달리하며 되묻는다. 우리 인생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사랑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인지. 누군가에게는 너무 일찍, 또 누군가에게는 너무 늦게 도착한, 또 누군가에게는 영영 가망 없는 사랑, 어긋난 사랑의 시간과 길들. 체호프의 소설은 모두 예외 없이 질문을 품고 있다. 하여, 체호프의 소설을 읽는 일은, 그가 불러낸 그들과 함께 저마다의 사정(운명)에 대한 답(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답은 구하려고 할수록 찾아지지 않는다. 본질의 속성처럼. 다만, 끌어안고 함께 탄식하고, 아파하고, 다독일 뿐이다. 다독임 끝에 누군가는 체념처럼, 또 누군가는 다짐처럼 되뇌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아름답다. 삶이 계속되듯이.”

누군가의 마음 상태를 알려면 그 사람의 방에 가보라. 누군가의 생애, 그 사람의 기질을 알려면 그 사람의 묘지, 영면처에 가보라. 그동안 수차례 찾아간 프루스트, 베케트, 카뮈,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 뒤라스, 보들레르, 랭보 등의 묘지 앞에서 터득한 내 나름의 진실이다. 누군가의 묘지는 사랑으로 가득하고, 누군가의 묘지는 고독으로 충만하고, 누군가의 묘지는 정갈하고 아름답다. 이들 앞에 서기까지, 묘지 약도를 손에 쥐고도 몇 번 헤매기 일쑤인데, 그만큼 묘원의 규모가 방대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특히, 묘비명들이 해독 불가능한 러시아어로 씌어진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에서는, 하랑이 아니었으면, 그곳에 있으면서도, 체호프의 묘를 찾아갈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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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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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부부 묘

한 여름 공동묘지에는 태양빛이 내리쬐고 있었고, 울창한 나무들이 푸르른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노보데비치수도원 공동묘지는 파리의 몽파르나스, 페르라셰즈, 빈의 중앙묘지를 연상시킬 만큼 규모가 컸다. 하랑이 묘지 약도를 들고 열심히 체호프를 찾아갔고, 마침내 아름다운 유리로 장식된 작은 예배당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나도 따라 들어갔다. 스무 살 소녀답지 않게, 하랑이 미션을 완수했다는 흡족한 표정으로 내게 웃어보였다. 유리를 투과해 들어오는 태양 빛으로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뜨거웠다. 체호프가 여기 잠들어 있구나! 하랑에게 활짝 웃어 보이며 체호프의 이름과 생몰연도를 찾았다. 그러자 하랑이 깜짝 놀라며, 체호프 묘가 아닌 것 같다고 밖으로 나갔다. 하랑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하랑은 묘지 양쪽을 두리번거리며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를 반복했다.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랑의 발걸음이 복잡해졌고, 빨라졌다. 처음, 지중해안, 해변의 묘지에 들어서서, 몇 번을 헤맨 끝에 비로소 찾았던, 그 후로도 대상은 달라져도 매번 같은 행로가 되풀이되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바짝 뒤따라가면 하랑을 재촉하는 것이어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걸음을 늦추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 하랑이 눈앞에 보이지 않았다.

체호프의 묘지는 그의 문장처럼 단아했다. 그는 1904년 독일 바덴바일러에서 마지막 숨을 놓았다. 그의 나이 45세,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배우 올가 크니페르와 사랑에 빠진 지 6년, 그녀와 결혼한 지 3년째 되던 해 6월이었다. 체호프 옆에 올가의 묘가 하얀 대리석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뿐인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초연에서 참패했던 <갈매기>를 모스크바에서 대성공으로 이끌었던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의 묘도, 러시아 소설의 대부 고골도 그의 지척에 잠들어 있었다. 성하의 울울한 나무 그늘이 드리운 체호프 부부의 영면처는 정갈하고 아름다웠다. 뒤늦게 실수처럼 찾아온, 아니 깨달은 사랑. 도무지 찾을 수 없는 미로 속의 본질, 또는 실마리. 이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통찰력과 꿰뚫음 속에 흐르는 단아함과 서정성. 가슴이 벅차올랐다. 뭔가, 고백하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갈 시간이었다. 나는 고백 대신 짐짓 짓궂은 표정으로 체호프에게 인사를 하자고 하랑에게 제안했다. 하랑은 즉시 해맑게 웃었고, 나는 연극 동작처럼 손을 하랑 쪽으로 뻗었다. 체호프를 뒤로하고 수도원의 붉은 문을 빠져나오면서 하랑에게 체호프의 언어로 꼭 듣고 싶은 문장을 속삭였다. “외롭게 사는 사람들은 항상 그 영혼 속에 기꺼이 이야기하고 싶은 무언가를 품고 사는 법이다”(체호프, 「사랑에 관하여」).

*이 글을 위해 안톤 체호프, 『사랑에 관하여』(안지영 옮김, 웅진펭귄클래식코리아, 2010)를 참고했음을 밝힌다.

글, 사진 / 함정임

소설가,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1964년생

소설집 『이야기, 떨어지는 가면』 『당신의 물고기』 『아주 사소한 중독』 『버스, 지나가다』 『네 마음의 푸른 눈』 『저녁 식사가 끝난 뒤』『사랑을 사랑하는 것』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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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8-31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