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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다섯 시의 로르카 도서관

오후 다섯 시의 로르카 도서관
오후 다섯 시의 로르카 도서관
오후 다섯 시의 로르카 도서관

레지덴시아 데 에스투디안테스(The Residencia de Estudiantes) A동 326호, 짙은 녹색의 아치형 나무덧문을 연다. 컴컴하던 방안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남은 덧문을 끝까지 밀어젖힌다. 모양이 똑같은 두 개의 붉은 벽돌건물인 맞은편 창문엔 미세먼지 하나 없는 투명한 하늘이 담겨있다. 아치형 창과 동양의 서까래가 접목된 지붕이 이곳이 한때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두 건물 사이의 중정엔 커다란 협죽도 세 그루가 분홍꽃을 피우고 있다. 키가 크고 잎이 반짝이는 것이 혈기 넘치는 청년의 모습이다. 이곳에 살았던 젊은 그들의 모습처럼.

오후 다섯 시의 로르카 도서관

1910년, 마드리드 왕립대학 기숙사로 지어진 건물은 피카소, 네루다, 아인슈타인 등 유명 인사들이 머물던 곳으로 유럽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현재는 호텔로 리모델링되어 스페인뿐만 아니라 유럽의 예술가와 학자들의 레지던스로 이용되고 있다. 2018년 9월 중순,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은 그곳에 간 나는 11월 말까지 머물 예정이었다. 토지문화관과 스페인 국립문화활동협회의 작가교환 프로그램으로 떠나온 터인데, 마드리드 시내에 자리 잡은 레지던스가 생각보다 고풍스럽고 우아하여 조금 당황하였다.

아무 준비도 없이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여권과 비행기 티켓, 그리고 석 달 동안 필요한 최소한의 짐만 겨우 챙겨서 떠나온 길이었다. 늘 떠나기 급급했던 여행이 아쉬워 이번엔 스페인에 관한 책도 좀 읽고, 최소한 스페인어 발음이라도 공부하리라 마음먹었는데 떠나기 20여일 전, 갑자기 집을 이사해야만 했다. 운이 좋아 빈집을 바로 구했지만 10년 묵은 짐들을 겨우 옮긴 후 정리할 새도 없이 떠나온 길이었다. 역시 여행준비란 내겐 사치인 모양이었다.

오후 2시를 기다려 건물 1층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내려간다. 입구에 있는 메뉴를 보며 구글 번역기에 입력을 한다. 고기와 생선 중 고르게 돼 있는 메뉴, 나는 대구요리를 선택한다. 전날엔 소꼬리찜을 먹었는데 우리의 갈비찜과 비슷했고, 그 전날은 애호박전이 나오기도 했다. 젊은 학생들의 단체석 옆이 내 자리이다. 지정석은 아니지만 나는 학생들 중 한 명이 지난해 왔던 동료작가를 안다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그들 곁에 앉게 되었다. 전국에서 선발된 대학생과 대학원생, 연구원들인 젊은 친구들 덕에 레스토랑은 활기가 넘친다. 선발되면 1년간 숙식을 제공받고 1년을 다시 연장할 수 있다는 레지던스, 세르반테스를 공부하는 남학생과 멕시코에서 온 SF작가, 그리고 세비야가 고향이라는 생물학 전공의 연구원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때로 열띤 토론을 하거나 실없는 농담을 하며 식사 내내 유쾌했으나, 불금의 저녁엔 자리가 텅 비었다. 은퇴한 유럽의 교수나 한 울타리 안에 있는 과학연구소의 연구원들, 그리고 멕시코나 콜롬비아에서 온 교수들이 며칠씩 머물기도 하는 그곳에서 눈치 보지 않고 도시락까지 싸가며 당당하기 짝이 없는 그들을 보며 나는 취직 준비에 낭만도 사라진 우리 대학생들을 떠올리며 몹시도 부러웠다.

사실 처음 레스토랑에 왔을 때 나는 백인 금발의, 지식인층 손님들로 가득 찬 실내가 몹시도 낯설었다. 몇 년 전 다녀온, 스페인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포르투갈과 사뭇 다른 분위기 때문이었다. 검은 머리의 라틴계와 흑인들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었던 리스본에 비해 레지던스의 레스토랑엔 대부분이 금발의 백인이었다. 깔끔하고 세련된 유러피안 레스토랑에서 우아하게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그들, 차가운 토마토 스프 같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좀처럼 가까워질 것 같지 않은 거리감에 조금 외로웠다. 그곳에서 내가 만난 흑인은 웨이트리스 게마가 유일했다. 서아프리카 기니공화국 출신의 부모님이 이민을 온 덕에 스페인에서 태어난 게마는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배웠기에 그곳에서 웨이트리스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중에 알게 된 리카르도가 말했다. 리카르도는 말라가 출신으로 미국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쳤다. 쿠데타와 내전으로 정권을 잡은 프랑코가 집권하는 36년 동안 대부분 가톨릭에, 푸른 셔츠를 유니폼처럼 입게 하고, 유색인종은 자신이 일으킨 쿠데타의 용병으로 온 모로코인들까지 다 쫓아냈다며, 리카르도는 아직도 독재의 시절이 끔찍하다고 고개를 저었다.

오후 다섯 시의 로르카 도서관

오후 3시 30분, 노트북과 일기장을 들고 로르카 도서관으로 간다. 옆 건물에 있는 로르카 도서관 앞엔 예의 협죽도가 흰색 꽃을 피우고 있다. 이름과 방 호수를 적고 지하의 도서관으로 들어선다. 두 명의 사서에게 “올라”, 인사를 한 후 나는 햇빛이 잘 드는 창가 자리로 간다. 도서관 이름처럼 로르카의 시집들과 연구서인 듯한 책들이 꽂혀 있지만 해독불능의 스페인어 책들을 나는 그림이라도 보듯 지나친다. 유리 칸막이가 된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펼치니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에 오기 위해 스페인까지 날아온 듯한 기분이 된다. 로르카 도서관으로 하오의 햇살이 비껴든다. 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요 속에서 내 심장박동 소리가 지나치게 또렷하다.

스페인의 국민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이름을 딴 도서관이려니 했던 곳은 알고 보니 더 특별했다.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에 한때 로르카가 살았다고 했다. 아니 로르카뿐만 아니라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 등이 동시대에 그곳에 머물렀다고 했다. 왕립 마드리드대학 시절,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라나다 대학의 법학과에 다니던 로르카는 결국 마드리드대학 문학부로 편입을 하여 본격적으로 시 쓰기에 몰두하고 작가로서의 명성도 얻는다. 그는 신입생으로 입학한 미술학도 달리와 영화감독 부뉴엘을 만나 바로 친구가 된다. 마드리드에 와서야 보게 된 부뉴엘의 영화 <리틀 애쉬>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들이었다. 영화에는 기숙사 건물까지 나오는데, 전혀 그 사실을 몰랐던 나를 흥분케 했다. 어쩌면 내 방에 로르카가 살았을지도 몰라. 아니 달리가 머문 건 아닐까. 나는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방안의 벽에 몸을 기댔다. 건물 1층에 재현해 놓은 왕립대학 시절의 기숙사 방이 떠올랐다. 붉은 소파와 작은 책상 위에 놓인 고서들과 펜과 잉크, 그리고 테니스 라켓 따위를 볼 때마다 그들의 영혼이 아직 이곳에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오후엔 3시부터 5시까지, 감질나게 문을 여는 지하 도서관으로 가서 로르카를 만났다..

오후 다섯 시에

낮은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네

오후 다섯 시에

비소(砒素)의 종과 연기

오후 다섯 시에

길 모퉁이마다엔 침묵의 산더미

오후 다섯 시에

로르카가 쓴 투우사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 「오후 다섯 시에」를 읽으며 그를 생각한다. 살바도르 달리를 사랑했다는 그의 슬픔과, 스페인을 36년간이나 지배한 독재자 프랑코가 스페인 내전을 일으키자 고향 그라나다로 피신했으나 끝내 파시스트인 팔랑헤당원들에게 끌려가 새벽의 산속에서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후 아직까지도 사체를 찾지 못했다는 그의 생애도 스페인에 와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 문득 윤동주가 떠올랐다. 불행한 시대에는 시인들이 가장 먼저 불행해지는 모양이었다.

오후 다섯 시의 로르카 도서관 오후 다섯 시의 로르카 도서관

10월 중순의 그라나다엔 비가 내린다. 도착한 날, 알함브라 궁전 근처의 숙소에 짐을 놓고 로르카의 집을 향해 걷는다. 30분쯤 걸으니 그의 집이 있는 공원에 도착한다. 당시는 그라나다 교외였던 곳이 지금은 시내로 편입돼 공원이 된 곳. 사이프러스 나무가 좁고 우뚝하게 늘어선 공원을 걸어 그의 집으로 간다. 하지만 그의 집은 4시 30분에 이미 문을 닫아버렸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집은 적막하기만 하다. 나는 문이 잠긴 집 둘레를 몇 바퀴 돌아본다.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2층 집,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 앞엔 보라색 꽃을 피운 푸른 넝쿨식물이 창을 타고 3개의 방이 있는 2층 발코니까지 올라가 있다. 나는 진녹색 문에 가만히 손을 대며 상상한다. 그를 잡으러 온 극우민족주의자, 팔랑헤당원들이 무례하게 열어젖혔을 그의 집 현관문과 그 문을 나서던 청년의 요동치는 심장을.

다음 날 아침 일찍 알함브라 궁전을 구경한 후 다시 그의 집으로 간다. 수요일은 무료입장이라 어제의 헛걸음을 보상받는 기분으로 그의 집에 들어선다. 몇 명이 함께 들어가 해설사의 가이드를 들어야 한다. 그가 쓰던 피아노가 거실에 놓여 있고, 집기들도 그대로 전시돼 있다. 그의 생전 어느 날, 그와 여동생 등 가족모임에서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유난히 오빠를 좋아했다는 여동생의 남편 역시 스페인 내전 때 처형되었다고 했다. 2층의 그의 방으로 간다. 그의 책상 앞에 연극단체 ‘바라카’의 포스터가 붙어있다. 그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만든 극단으로 지방 곳곳으로 공연을 다녔다는, 움집이라는 뜻의 바라카. 나는 해설사의 눈을 피해 반짝반짝 윤이 나는 호두나무 책상에 가만히 손을 얹어본다. 로르카의 비극 3부작인, 희곡 「피의 결혼」과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그리고 「예르마」 등이 탄생한 책상이다. 마드리드 인근의 평원과는 달리 안달루시아 지방은 산이 높고 계곡이 깊으며 넓은 황무지엔 올리브나무 밭만 끝없이 이어졌다. 부농이었다는 아버지와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로르카는 피아니스트로 두각을 나타냈던 음악적 재능과 화가 못지않은 그림 실력과 시와 희곡을 넘나들던 문학까지, 타고난 예술가였다. 전세계 예술인들이 모여들던 도시 파리로 함께 가자는 달리의 제안을 거부하고 극단 바라카를 이끌고 지방으로 공연을 다녔다는 그의 시는 물론 희곡에도 안달루시아의 신비하고 격정적인 집시문화가 잘 드러난다. 방을 나오기 전, 그의 책상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 새벽에 들이닥친 무도한 사람들에게 끌려가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란 예감으로 집을 나서던 그의 발길이 비틀거렸을까. 저 책상에 다시 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석 달 남짓의 스페인 생활에서 나는 끊임없이 한 사내를 생각했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그의 삶이 유독 마음을 붙드는 것은 스페인의 비극적인 역사가 우리의 그것과 너무 닮아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죽거들랑

발코니를 열어두오

아이가 오렌지를 먹고 있네

(내 발코니에서 그게 보이네)

농부가 밀을 베고 있네

(내 발코니에서 그걸 느끼네)

내가 죽거들랑

발코니를 열어두오!

그의 집 마당에 서서 나는 문이 열린 발코니를 바라본다.
나를 보고 있을 그를 향해 상냥한 미소를 보낸다.

김이정

소설가, 1960년생

소설집 『도둑게』 『그 남자의 방』, 장편소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물속의 사막』 『유령의 시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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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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