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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대 영화

동화가 된 소설, 소설이 될 수 없는 영화

‘동화’가 된 소설들이 있다. 아이들이 주인공이거나 그들의 성장을 담은 작품들, 아니면 소설이 모험이나 환상으로 가득 차 있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들을 간추려 정리하거나 전체가 아닌 부분만으로 재구성한 작품들. 소인국과 거인국보다 훨씬 풍자적이고, 인간혐오의 세상과 이상적인 존재로 상상한 다른 두 나라인 하늘 위에 떠 있는, 하늘을 떠다니는 성의 나라 ‘라퓨타’와 말(馬)들의 나라 ‘휴이넘’을 빼버린 『걸리버 여행기』가 그렇고, 주인공 장발장의 이름으로 제목을 바꾼 『레미제라블』도 그렇다.

아이들이 읽고 이해하기 쉽게 제멋대로 홀쭉하고
짤막해진 ‘동화’, 아이들까지 관객으로 끌어들이려는
동화적 발상의 영화가 잊을 만하면 다시 나오면서
원작의 깊고 넓은 세상은 증발되고 만다.

60여 쪽짜리 동화를 읽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고 눈요기만을 강조한
롭 레터맨 감독의 영화에서
조너선 스위프트가 감옥에 갇힐 각오를 하고
영국의 정치와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한
『걸리버 여행기』를 만날 수는 없다.
루이자 메이 알코트의 『작은 아씨들』도 소설보다 동화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1868년 이 소설이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미국 소설 최초의 아동 명작’으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남북전쟁(1861~1865)이 막 끝난 상처투성이의 시대에 누구보다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고 싶었기에 이 가족, 성장소설에 그런 이름표를 달아주었을 것이다. 물론 폭넓은 독자층을 겨냥한 출판사의 상업적 계산도 깔려있었을 것이다.
원작 대 영화 소설답지 않은, 그래서 더 공감하는-1

남북전쟁 속에서 가난하지만 행복한 가정에서 각자 소중한 꿈을 가지고 성장하는 네 자매의 이야기인 『작은 아씨들』에는 분명 동화적 요소들이 존재한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인 이 소설에 담긴 십대 소녀 네 명이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고 최선을 다하면서 자신들의 재능과 꿈을 하나씩 이뤄가는 과정은 아름답고도 따스하다. 소녀들의 이야기라고 해서 억지스럽게 페미니즘이 등장하지 않으며, 반대로 지나치게 순종적이거나 숙명적이지도 않다. 작가가 제3자의 시점으로 자신의 가족사를 에피소드별로 꼼꼼하게 기록한 연대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아씨들』은 동화에 머물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 글쓰기 재능을 타고난 둘째딸 조 마치(작가 자신)는 처음에는 가난한 가정에 경제적 도움을 주기 위해 신문에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추리, 스릴러물을 연재한다. 그러나 우연히 만난, 나중에 자신의 남편이 되는 독일인 이민자인 프리드리히 교수의 비평과 여동생 베스의 죽음이 가져온 충격으로 ‘아무도 읽지 않을지 모르는’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한다. 『작은 아씨들』의 1막은 그렇게 시작된다.

원작 대 영화 소설답지 않은, 그래서 더 공감하는-2

작가가 성장기를 보낸 작은 마을인 메사추세츠주 콩코드의 목가적 풍경 속에서 순례자(천로역정) 놀이로 시작되는 네 자매의 이야기에는 인생에서 무엇이 진정 소중한 것인지, 아름다운 삶의 여정이 어떤 것인지 담겨있다.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할 수 있는 인생의 놀이, 각자 자신의 짐을 지고 앞에 펼쳐있는 길을 선함과 행복을 향한 갈망을 길잡이 삼아, 수많은 고난과 실수를 극복하면서 평화에 다다르는 것’이다. 그들은 그 길을 사람들과의 만남과 웃음, 눈물의 경험 속에서 한걸음씩 나아간다. 그것이 ‘작은 아씨들’의 성장이다.

그 성장의 밑거름이자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어머니이다. 그녀는 ‘자식에게 가장 큰 스승은 부모이고, 가장 좋은 가르침은 부모의 실천’이란 말을 증명한다. 남북전쟁에 참전해 한동안 부재 상태인 목사 아버지를 대신해 가난하고 상처받은 이웃을 돌보고, 진정한 가족애와 사랑의 마음에 감사하며 가난하지만 품격을 잃지 않는다. 돈과 지위보다는 품성과 인격, 교양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실수를 너그럽게 용서한다. 그 바탕에는 종교적 가르침과 믿음이 깔려있다. 그래서 『작은 아씨들』은 다분히 신앙적이기도 하다.

『작은 아씨들』에는 또한 악인이 없다. 네 자매와 그들의 부모는 물론이고 가정부 해리, 부자 이웃인 로렌스 할아버지와 그의 손자 로리, 저택에 혼자 사는 아이들의 대고모, 심지어 잘난 척하는 부잣집 모펫 가족까지. 이는 어쩌면 돈을 벌기 위해 연재소설에 악인을 거침없이 등장시키고 피와 죽음을 만들어냈던 작가의 ‘의도적 후회’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이유야 무엇이든 그것으로 소설은 곳곳에서 감동을 자아낸다. 수줍고 용기가 없지만 더 없이 착한 베스와 겉으로는 무뚝뚝하지만 인정 넘치는 로렌스 할아버지가 실내화와 피아노로 빚어낸 사랑과 우정, 질투심 많고 화가가 꿈인 막내 에이미와 자유분방한 조의 원고 불태우기로 인한 갈등과 스케이트 타기에서의 위기를 통한 화해 등이 작가의 솔직담백하고 감수성 있는 문장으로 독자들의 가슴을 울린다.

원작 대 영화 소설답지 않은, 그래서 더 공감하는-3

『작은 아씨들』은 늘 부잣집으로 시집가기를 꿈꾸던 맏딸 메그가 이웃집 소년 로리의 가정교사인 가난한 존과 결혼하기로 결정하며 1부가 끝난다. 여기까지가 굳이 ‘동화’라고 한다면, 작가가 말했듯이 독자들의 반응에 호응해서 이어간 2부는 어른들을 위한 해피엔딩의 ‘소설’이다. 그렇다고 비극과 슬픔이 없는 것은 아니다. 베스의 죽음이 소설 전체를 침울하게 하지만 이 역시 가족애와 신앙적 수용으로 아름답게 승화시킨다.

1, 2부를 합쳐 무려 900쪽이 넘는 긴 소설은 친절하다. 네 자매의 외모와 옷차림까지 세밀하게 그려 넣었고, 1부에서 2부로 건너가는 3년을 빼면 시간을 건너뛰지도 되돌아가지도 않으면서 한 가족의 아름답고, 훈훈하고, 감동적인 역사를 기록했다. 출판사의 요구로 끝까지 독신으로 남으려는 조를 프리드리히 교수와의 극적 재회를 통해 결혼시키는 ‘픽션’으로 만들었지만 그것이 소설 전체의 색깔을 흐리게 하지는 않는다.

『작은 아씨들』은 조가 돈벌이를 위해 썼던 소설과 달리 비록 베스의 죽음과 조가 아닌 막내 에이미와 로리의 결혼이란 비극과 반전이 있기는 하지만 극적 사건이나 인물이 없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이 네 명이나 되어 이야기가 분산될 수밖에 없는 구조, 연대기를 따라 에피소드를 나열할 수밖에 없는 일기장 같은 작품이다. 무대가 뉴욕, 파리로 잠시 옮겨가지만 대부분 시간을 작은 마을에서 보내는 목가적 풍경들이다. 때문에 아무리 동화로 ‘명작’이고, 이야기의 울림이 크다고 해도 영화로서 그리 좋은 소재는 아니다.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자니 편안하고 행복하기는 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단조롭다는 느낌을 줄 수 있어 고민이고, 리듬과 생동감을 불어넣기 위해 변화를 주고 새로운 것들을 섞자니 원작의 색깔을 훼손할 것 같아 불안하다.

원작 대 영화 소설답지 않은, 그래서 더 공감하는-3

지금까지 4편이나 만들어진 영화의 선택에 그 고민과 불안이 엿보인다. 1933년 작품은 볼 수 없으니 빼고 1949년 머빈 르로이 감독, 1994년 질리안 암스트롱 감독, 지난해 제작돼 올해 국내 개봉한 그레타 거윅 감독 모두 영화가 ‘동화’보다는 ‘소설’이기를 원했다. 영화는 어차피 소설 전체를 담을 수 없고, 담을 필요도 없다. 그래서 각자 어느 부분을 가장 집중해야 하며, 그것을 어떤 수단과 방식으로 표현할지를 고민했다. 1994년의 <작은 아씨들>은 네 명을 모두 내세우기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조 마치를 주인공으로 선택해 그녀의 서술로 이야기를 시간 순으로 전개했다.

반면 2019년의 <작은 아씨들> 역시 조 마치를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시간을 교차시키면서 상징적 코드를 서로 연결해 네 자매의 삶을 담는 방식을 선택했다.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영화적으로는 시간교차가 새로움과 입체감을 주지만,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혼란을 주고 감정이입을 방해할 뿐이다. 인물의 겉모습은 그대로 두고 단지 화면만 빛바랜 누런색으로 바꾸었다고 관객들의 시간의 기억도 바로 과거로 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1994년의 <작은 아씨들>이 보여주었던 어머니의 존재와 역할이 줄어든 것도 메시지를 깊이 담지 못한 이유가 될 것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이런 소설을 영화로 만들 때, 공통적으로 중요시하는 것은 배우와 의상이다. 배우의 이미지는 캐릭터의 특징을 대신하고, 의상은 시대의 정서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설명하고, 행동으로 보여주어도 영화는 소설처럼 인물의 성격을 세세하게 드러낼 수 없다. 그래서 1994년에는 조 역에 위노나 라이더, 베스 역에 클레어 데인즈, 어린 에이미 역에 커스틴 던스트, 어머니 역에 수잔 서랜든, 로리 역에 풋풋한 크리스찬 베일 등 당대 개성이 넘치는 배우들로 대신했다. 1949년에는 17세의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에이미 역을 맡겼다.

2019년의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엠마 왓슨(메그 역), 시얼샤 로넌(조 역), 플로렌스 퓨( 에이미 역), 로라 던(염마 역), 메릴 스트립(대고모 역)이 소설의 인물서술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들이 입은 평상복과 외출복, 파티복은 오스카에서 의상상 후보에 오르거나(1995년), 수상을 했다(2020년). 영화 <작은 아씨들>은 거기까지이다. 가슴보다는 눈, 이야기보다는 모습.

이대현_영화평론가. 1959년생저서 『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열일곱, 영화로 세상을 보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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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 영화제작사 ㈜봄바람영화사
작성일
2020-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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