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소설답지 않다. ‘소설답지 않다’는 소설이 정해놓은 길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소설의 뜻을 배반하지도, 왜곡하지도 않았다. 스스로 용기를 내어 영화가 가야 할 길은 갔다. 소설에는 소설의 길이 있듯, 영화에는 영화의 길이 있으니까. 그 길이 같을 수는 없다. 베스트셀러라고, 그래서 영화도 같은 길을 반복하면 편안하게 성공이 보장된다는 착각에 방향을 헤매거나 엉뚱한 목적지에 도착하는 작품들을 우리는 숱하게 봐왔다.
영국의 문화학자인 존 피스크의 말처럼 문화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사회적 권력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그 권력의 분배나 재분배는 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 소설도 물론이다. 특히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이나 인물, 사회적 이슈,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소재로 할 때 더욱 그렇다. 이 땅의 여성 억압과 차별을 고발하는 <82년생 김지영> 역시 그 자체로 정치적이고,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는 소설이 의도한 전략일 수 있다. 그렇다고 그런 소설이 텍스트 안에서의 담론을 넘어 페어클로의 비판적 담론분석이 말하는 담론적 실천으로 확장되거나, 사회문화적 담론으로 모두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사회적 담론과 만날 때에만 가능하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운 좋게도 그 만남(담론 접합)에 성공했다. ‘운 좋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운’은 단순히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기적이나 행운이 아니다. 시간과 눈물과 땀, 다르게 말하면 힘들고 질긴 ‘투쟁’이 가져다준 기회일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갈등과 모순 중에서도 가장 깊고 오래된 것, 더 깊게 들어가면 오랜 역사성과 문화성과 의식까지 스며들어 있는, 특정 집단에서만이 아닌 인간사회와 삶의 모든 곳에 뿌리박혀있는 성차별에 대한 문제제기와 해결담론이야말로 인간다운 세상의 종착점인지도 모른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그 분위기와 절박함을 눈치 채고 일깨움으로써 단순히 소설의 차원을 넘어 뜨거운 사회 담론의 텍스트가 되었다. 소설이 담고 있는 담론의 찬반이나 가부를 새삼 따질 생각은 없다. 소설이 그렇듯 독자의 판단 또한 각자의 몫이다. 페미니즘 담론 텍스트로서 ‘82년생 김지영’이 가진 가치나 의미가 아닌 소설로서의 『82년생 김지영』과 영화로서의 <82년생 김지영>사이에는 분명 다른 모습들이 존재한다. 그것이 소설보다 영화가 더 주목받는 이유일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소설적 완성도로 보면 지극히 허술한 작품이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일지(日誌)에 가깝다.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기록해 나간 것도 그렇고, 단순한 서술적 구성으로 일관한 것도 그렇다. 그것도 작위적이며 당사자가 아닌 제3자, 그것도 남성인 정신과 의사가 쓴 진료상담 기록이다. 아니면 어느 한 사람의 일기장을 정리해 놓은 것 같다. 작가(조남주)가 이런 선택을 한 것은 창작 능력의 부족이라기보다는 리얼리즘과 일반화의 개인화를 의식한 선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추측이 가능한 이유는 여성차별과 관련한 이야기 뒤에 마치 보고서처럼 사회적 자료들을 덧붙여 놓은 것을 보면 그렇다.
<82년생 김지영>은 소설의 플롯을 무시했고, 소설적 상상력이나 극적 긴장감을 가지지 못했다. 주제와 시각은 다르지만 비슷한 구성 방식인 영화 <국제시장>과는 차이가 난다. 물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소설 속에 담긴 주제와 담론이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사람들이 소설은 현실이 아니라고, 착각하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반론도 우리 사회의 정서, 특히 페미니즘과 관련한 태도를 감안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소설에서 김지영은 “나는 이렇게 살았어, 너도 이렇게 살았니?”, “엄마도 이렇게 살았어?”하고 직설적으로 묻고는 “그렇게 살았지”, “이제는 이렇게 살지 말자”, “더 이상 참지 말고 나대”라는 답을 기다린다.
때문에 소설 같지 않은 소설, 객관적 시점(의사)으로 기록한 가정과 사회에서의 여성차별에 대한 고발로 엄청난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킨 『82년생 김지영』을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소설이 폭발시킨 사회 담론의 무게를 영화가 어떻게 덜어내고 분산시킬 것인가. 차라리 원작이 없었다면 훨씬 부담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에 대한 기대감과 선입견에서 오히려 자유로우니까.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이 속박과 딜레마를 현명하게 극복한 모습이다. 소설에 파묻혀 허둥대거나 쩔쩔매지 않고 조금 높은 곳에 올라, 눈을 조금 더 크게 뜨고, 마음을 조금 더 열고 김지영만이 아닌 우리가 사는 세상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렇다고 김지영을 소홀히 하거나 ‘특별화’, ‘개인화’하지도 않았다. 섬세한 감각으로 소설의 에피소드를 거의 버리지 않고 곳곳에 놓았다. 한 사람의 시점이 아닌 우리 모두의 시선으로 김지영의 삶을 들여다보게 했고, 이 땅에 사는 여성들만의 모습이 아닌 사람들의 모습으로 확장했다. 그것으로 소설의 담론이 가진 날카로움과 강렬함, 이분법을 잃어버렸는지는 모르겠으나 대신 공감의 폭과 깊이를 더한 것만은 분명하다. 관객들의 반응이 그랬다. 영화에서 김지영은 더 이상 82년생이 아니다. 그녀는 52년생(김지영의 어머니인 미숙)이기도 하고, 72년생(김 팀장)이기도 하고, 어쩌면 이제 두 살 된 2015년생(딸 아영이)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김지영은 꼭 여자이고, 정대현의 아내이고, 아영이의 엄마만은 아니다. 그녀는 남자이고, 남편(정대현)이고, 남편의 친구이고, 아버지(영수)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이들은 정도는 다를지 몰라도 시대와 역사가 만든 온갖 불평등과 차별의 벽이 만든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며,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소설에서 김지영의 ‘빙의’는 산후우울증이 가져온 정신적 병리 현상이고, 피해자로서의 잠재의식의 표현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그것은 상대에 대한 이해와 공감, 소통의 애달픈 기호이다. 지영이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되어 딸인 어머니에게 묻어두었던 마음을 전하는 장면에서 왜 관객들은 너나없이 눈물을 훔쳤을까. 그들과 비슷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여성들, 그리고 또 다른 한 편에서 그런 삶을 강요했거나 눈 감았던 이 땅에 남편과 아버지로 살아온,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쩌면 가해자일지 모른다는 자책감에 아내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남편 정대현이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안다. 김지영의 어머니가 말한 “그 때 여자들은 다 그러고 살았어”, “요즘 애 엄마들은 다 이러고 살았어”의 ‘그러고’와 ‘이러고’가 어떤 것인지. 과거 나의 어머니가 그랬고, 지금의 나의 아내가 그렇고, 어쩌면 어린 딸의 미래가 여전히 그럴지도 모르니까. 소설의 김지영도, 영화의 김지영도 그리고 그의 남편도 곳곳에서 걸려 넘어지고 깨지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소설 속의 김지영이 다분히 과거와 현재의 비극과 모순, 절망과 분노를 일깨우려 한 정치적, 사회적 상징이라면, 영화 속의 김지영은 그것을 지나 연민과 공감, 열림과 희망의 상징으로 나아갔다. 그렇다고 영화가 소설의 담론들을 가볍게 여기거나 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상팔자, 맘충 등으로 표현되는 소설이 총체적으로 나열한 담론의 극단적 텍스트까지 영화는 빼놓지 않고 녹여냈다.
남편과 아내가 함께 길을 건너고,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고 김지영이 다시 일을 하는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마지막 선택인 ‘희망’과 ‘열림’을 얄팍한 상업적 전략의 ‘판타지’라고 비판하지 말자. 현실을 허구로 날려버리는 짓이라고 욕하지 말자. 영화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고, 그래야 하고,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영화가 바라는 것은 비록 판타지로 끝나더라도 늘 지금보다 나은 세상, 지금보다 아름답고 평등한 세상이니까.
존 피스크가 말한 ‘문화는 정치다’도 여기까지이다. 공감의 폭을 넓히고, 그 공감이 어느 날 세상을 바꾸는 마음의 힘이 되는 것. 진짜 세상을 바꾸는 정치는 영화가 아닌 현실에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