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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고흐는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후 오베르 쉬르 와즈라는 고장으로 이주하는데, 그 이유는 정신과 전문의였던 폴 가셰 박사 때문입니다. 동생 테오가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가셰 박사를 형에게 소개시켜 주었던 것이죠. 테오는 가셰 박사가 고흐의 주치의가 되어 병을 잘 살펴주기를 바랬습니다. 실제로 고흐와
박사는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가셰 박사를 그린 고흐의 그림은 1990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940억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에 낙찰되기도 했습니다.
고갱은 고흐의 죽음과 관련해 많은 비난을 받습니다. 고흐의 장례식장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6개월 뒤 병으로 사망한 테오의 죽음에도 무관심했던 것이죠. 화가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지 않게 되자 문학계 시인들과 교류하면서 예술가로서 새로운 입지를 다져 나갑니다. 41살에는 원시의 섬 타히티로 떠나 그곳 원주민들의
순박함과 열대지방의 색깔에 매료되어 수많은 작품을 남깁니다.
고흐는 37살에 고갱은 55살에 세상을 떠납니다. 두 사람 모두 건강이 좋지 않았고 자살을 시도했을 만큼 정신적으로도 힘든 시간을 보냈죠. 하지만 그들의
예술적 신념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강렬한 붓터치 속에 녹여낸 고흐의 그림은 이후 표현주의 회화의 시조가 되었고, 기억과
상상력, 관념과 지성을 바탕으로 한 고갱의 작품은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의 시조가 되어 이후 마티스, 피카소 등 입체파 화가들에게까지 영향을 주게
됩니다.
고흐의 <까마귀 나는 밀밭>과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를 보면 두 사람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위에 서있는 두 화가의 존재감이 느껴지기 때문이죠. 그들이 목숨처럼 간직했던 예술적 신념은 새로운 미술의 길을 열었습니다.
보이는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대로, 머리로 생각하는대로, 상상하는대로 그릴 수 있는 미술의 자유를 열어 20세기 미술사의 가장
위대한 유산으로 남게 되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진정한 위대함은 뛰어난 작품 뒤에 숨은 고흐와 고갱의 신념과 삶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