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문학 기행

거리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

다큐 문학 기행 : 영화같은 시인 파블로 네루다 다큐 문학 기행 : 영화같은 시인 파블로 네루다

힘겨운 노동으로 얼굴이 상하고 먼지 때문에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광부가 나를 보자마자,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그런 묵직한 순간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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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민중을 위해 시를 쓰다

다큐 문학 기행 : 거리의 시인이라 불리는 파블로 네루다
거리의 시인이라 불리는 파블로 네루다
조용한 어촌마을 칠레 발파라이소 이슬라 네그라 섬, 우편배달부 마리오 히메네스는 매일 아침 단 한명의 고객인 늙은 시인에게 편지를 배달한다. 젊은 우편배달부가 노시인과의 만남을 통해 시를 알게되면서 변화하는 과정을 담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소설,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우편배달부 마리오는 평범한 칠레 시민을 대표하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노시인은 칠레 국민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파블로 네루다는 소설 속 시인처럼 평생 민중을 위해 시를 쓴 인물이다.

파블로 네루다의 삶

다큐 문학 기행 : 젊은 시절 파블로 네루다와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젊은 시절 파블로 네루다와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1904년 7월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 중부의 포도주 산지인 카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 파블로 네루다는 노골적으로 문학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필명이었다. 시인으로서 큰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특히 열아홉에 출간한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남미 전역에서 큰 사랑을 받았다. 이 시절 네루다는 연애 시가 내 몸 전체에서 돋아났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남미의 정부들은 젊은 시인들에게 영사 자리를 줌으로써 그들을 격려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네루다도 스물두살때부터 버마를 시작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1935년 스페인 마드리드 주재 영사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데, 프랑스 독재정권과 시민군 사이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민중들을 위한 연애편지

다큐 문학 기행 : 광산 노동자들과 파블로 네루다
광산 노동자들과 파블로 네루다
자연에 대한 찬탄과 더불어 사랑 외로운 우울을 노래하던 그는 이 시기 <가슴속의 스페인>을 집필하기 시작하고 이듬해 ‘반파시즘 세계작가 대회’를 조직, 반파시즘 예술가와 지성인 단체를 창설한다. 네루다는 거리나 시장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시를 썼다. 글을 모르는 노동자라 할지라도 그 뜻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이를 테면 민중들을 위한 연애편지를 쓴 것이다.

“대낮에 광장에서 읽는 시가 되어야 한다. 책이란 숱한 사람들의 손길에 닳고 닳아 너덜너덜해져야 한다.”
1945년 3월에는 광산노동자들의 지역에서 상원의원으로 당선, 7월에는 공산당에 입당한다. 파시즘에 대한 반발과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에 대한 애정이 공산주의를 지지하게 된 것이다. 이 후 그의 생애는 격동의 세월 그 자체였던 칠레의 역사와 더불어 영광과 고난의 길을 번갈아 걸어야만 했다. 1949년에 들어선 독재정권은 정부를 비판한 연설을 한 네루다의 의원직을 박탈하고 체포령을 내린다. 네루다의 망명생활은 이때부터 3년 동안 지속되는데 하지만 이런 도망자 생활에서도 매일 일정 시간 글을 쓰고 읽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찬란했던 라틴아메리카의 문명과 자연 문화 예술을 담은 <모두의 노래>는 이때 쓰여졌다.

이루지 못한 대통령의 꿈, 노벨문학상으로

다큐 문학 기행 :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파블로 네루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파블로 네루다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1952년 다시 조국 땅을 밟은 네루다는 한적한 바닷가 마을 <이슬라 네그라>에 자리잡고 활발한 작품활동을 이어간다. 1960년대 극단적인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다시 그를 현실정치의 장으로 이끌고 공산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한다.

하지만 좌파후보 단일화를 위해 오랜 사상적 동반자이자 친구인 ‘살바도르 아옌데’ 후보에게 양보하는데 대통령에 당선된 아옌데는 네루다를 프랑스 대사직에 임명하고 임기중인 1971년. 노벨 문학상의 영예를 안게 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그는 민중에게 더 큰 상을 받았다고 자선전에 적었다.
“힘겨운 노동으로 얼굴이 상하고 먼지 때문에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광부가 나를 보자마자,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그런 묵직한 순간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길지 않은 민중의 승리, 떨어진 꽃잎

다큐 문학 기행 : 20년이 지난 후 귀향되는 파블로 네루다의 유해
20년이 지난 후 귀향되는 파블로 네루다의 유해
하지만 그와 민중의 승리는 짧았다. 1973년 9월 아옌데 대통령이 군부정권에 의해 사망하고 네루다도 몇 일 후인 9월 23일 세상을 떠나고만 것이다. 그의 유해는 군부정권에 의해 떠돌다 사망한지 20년이 지나서야 이슬라그네에 돌아올 수 있었다.

어린 네루다가 집 담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얼굴도 모르는 이웃집 아이와 양 인형과 솔방울을 나누어 가진 일이 있었다. 네루다는 자서전에서 어릴 때 겪은 이 일이 자신의 시 세계의 원천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언젠가 내가 담장 옆에 솔방울을 남겨놓았듯이
나는 내 말을 내가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문 앞에,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나 쫓기는 사람 또는 외로운 사람들 문 앞에 놓아왔던 것이다.”


네루다가 솔방울처럼 곳곳에 놓았던 시로 인해 잠에서 깨어나 사랑하고 분노하고 투쟁한 민중들, 그의 시는 지금도 민중의 마음 속에 거리의 한복판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다큐 문학 기행 : 영화같은 시인 파블로 네루다
“대낮에 광장에서 읽는 시가 되어야 한다. 책이란 숱한 사람들의 손길에 닳고 닳아 너덜너덜해져야 한다.”
- 파블로 네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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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02-23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