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 후 이야기

박성원의 사랑손님과 누님

사랑손님과 어머니, 이어쓰기 : 2화. 사랑손님과 누님 - 박성원 사랑손님과 어머니, 이어쓰기 : 2화. 사랑손님과 누님 - 박성원

요즘 들어 매형 사진을 보기 더욱 힘들어졌다. 사랑방에 아저씨가 오기 전까지 누나는 장롱 안에 두고 가끔 보는 것 같더니 이젠 아예 꺼내보지도 않는다. 옥희도 별로 찾는 눈치가 아니다. 사라진 건 매형 사진만은 아니다. 장지문을 닫아 사랑방이 두 방으로 나누어졌다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내 방도 반 이상 사라졌다. 옥희를 유치원에 데리고 다니는 것도 이젠 하지 않는다. 옥희 역시 동화책을 읽어달라거나 함께 놀아달라고 더 이상 조르지 않는다. 귀찮은 일이 줄어들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지만 어쩐지 그리 편하지만은 않다.

“옥희는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누.”

마당에 혼자 있던 옥희에게 며칠 전에 물었다.

“그야, 엄마지.”

“엄마 다음엔.”

옥희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흔들리는 작고 여린 눈동자. 아이들의 눈동자는 작은 바람에도 일렁이는 풀과 같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움직일 뿐 바람에 거역하지 않는다.

“아저씨 좋아?”

내가 묻자 옥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내 눈을 보며 말했다.

“삼촌도 좋아.”

“아빠는?”

“아빠? 아빠도……, 물론 좋아.”

거짓말. 거짓말이다. 옥희는 땅만 바라볼 뿐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옥희야, 네 아빠는 말이야.”

나는 옥희를 데리고 가면서 매형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해줄 이야기가 없는 건 아니었다. 매형은 아버지보단 거리가 가까웠고 형보다 더 살가운 사람이었다. 아버지나 형은 새로운 문물을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처럼 대한 반면 매형은 달랐다. 서양음악을 들려주었고 새로운 것들에 대해 늘 알려주었다.

세상은 일본보다 더 넓다. 언젠가 매형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우리 집안은 달랐다. 일본을 욕하면서도 우리는 달걀을 먹을 수 있는 것에 만족했다. 만주에서 들려오는 독립운동에 대해 몰래 이야기하다가도 일본인들이 다니는 중학교에 나를 보냈다. 러시아의 사회주의에 대해 말하다가도 문중에 재산 문제가 생기면 친척이어도 원수가 되었다. 어딜 가나 인간이 문제고 억압과 강제가 문제야. 매형은 그렇게 말했다. 뿔피리 부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도, 계란을 삶지 않고 프라이로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일본인 인권운동가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모두 매형이 보여주었다.

“옥희야, 그러니까……, 아빠는 말이야.”

옥희는 재미없는 표정을 지었다.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아빠에 대해 무슨 그리움이 있을까. 매형처럼 말을 재미있게 해주는 재주도 나에게는 없다. 죽은 사람만 억울하지. 나는 옥희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오후 햇살이 슬며시 사랑방으로 다가갔다. 늙은 고양이처럼.

요즘 들어 찬송가 소리 듣는 게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밤에 울리는 풍금소리는 더더욱 그러했다.

“애야, 잠 좀 자자. 너무 늦은 시간 아니니.”

본채와 바로 붙어 있는 뒷집에서 어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그만 칠 거예요. 오늘 저녁 기도를 하지 못해서 기도 대신에 한다는 게 그만…….”

누나가 말했다. 아저씨도 잠을 설치는지 장지문 너머로 이불 움직이는 소리가 달빛보다 더 맑게 들려왔다.

“너 아직 안자는 모양이구나.”

내가 부스럭거리자 아저씨가 문 너머에서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마치 나 때문에 잠을 못자는 것 같아 자는 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족만큼 소중한 건 없단다. 너는 네 누님이 왜 저렇게 풍금을 울리는지 아니?”

잠시 후 본채의 불이 꺼졌다. 창호지 너머로 희미하게 나오던 불빛이 사라지자 어둠과 함께 고요함이 돌담처럼 자리 잡았다. 너무 조용해지자 다시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모든 것에는 기라는 게 있단다. 미국사람들 말로는 에너지라고도 하고. 불에는 불의 에너지가 있고 끓는 물에는 끓는 물의 에너지가 있지. 학교에서 배웠지?”

“아니요, 다음 학기에 배운다고 들었어요.”

아저씨가 선생님이라는 게 집에서도 버릇이 되어 나도 모르게 대답이 나왔다.

사랑손님과 어머니, 이어쓰기 : 1화. 풍금 - 이동하

“과학 선생님이 나카무라 선생님이시지?”

“아저씨가 잘 안다는 듯 물었다.”

“아뇨, 저희 반은 차형호 선생님이 맡고 있어요.”

“그래? 그렇구나. 차형호 선생님이라. 좋지 않아, 좋지 않아. 음. 내가 실수했구나. 차형호 선생님도 훌륭하신 분이야. 알고 있지?”

“네.”

“내가 일본유학 하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게 뭔지 아니? 가장 그리운 게 이상하게도 전통이었어. 잊고 있던 우리 조선의 전통 말이야. 물론 이 선생님도 태어나기 전에 일본과 합방이 되었지만 어릴 때 보고 들은 것들이 있거든. 너는 기억나는 조선의 전통이 있니?”

“아니요. 제기차기 같은 게 전통인가요? 그런 놀이는 조금 아는데.”

“제기차기라. 글쎄다. 다른 나라에도 제기차기가 있는지 모르겠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어머니의 모습이야. 거안제미(擧案齊眉)라고 해서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밥상을 올릴 때는 매우 공손하게 올렸단다. 요즘은 일본정부가 새해를 신정으로 해서 양력 1월 1일에 쉬지만 우리나라의 설날은 따로 있었어.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엔 종갓집에 모두 모이지. 멀리 떨어져 있던 친척도 만날 수 있고 모두 한자리에 모여 돌아가신 선조들에게 인사를 하고 가족과 친척 간에 서로 인사를 나누지.”

“성탄절은 알아요. 일왕탄신일도 알고요.”

“그래, 그런 것들과는 매우 다르단다. 그런 것들은 모두 외국에서 온 거야. 전통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지.”

“네.”

“내일부터라도 조선의 전통에 대해 조금씩 가르쳐야겠구나. 음.”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선생님.”

내가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선생님, 주무세요?”

“음, 그래. 막 잠 들려는 참이었어.”

“조금 전에 에너지라고 하는 기에 대해 말씀하셨잖아요. 누님이 왜 풍금을 저렇게 치는지 저보고 아느냐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저씨는, 아마도 옆으로 돌아눕는 것 같았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흐르는 물을 가두고 그 옆으로 작은 틈을 내면, 물은 그 방향으로만 미친 듯이 흐른단다. 알겠니?"

“네.”

“밤이 늦었구나. 그만 자거라.”

네, 라고 대답은 했지만 그건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았다.

“네 누님은 불행한 여인이야. 불행한 사람에겐 누군가가 필요해. 무슨 말인지 알겠니?”

“아뇨.”

“넌 너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니? 사람은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어. 다른 사람만이 볼 수 있지. 그만 자자. 밤이 깊었구나.”

아저씨는 얕은 기침을 내뱉었다.

다음 날 나는 학교를 마치고 일찍 돌아왔다. 전통에 대한 공부가 있을 줄 알았지만 아저씨는 옥희랑 놀아줄 뿐이었다.

“여필종부(女必從夫)라고 해봐.”

아저씨가 말하자 옥희가 따라했다.

“여필종부.”

“우리 옥희는 누굴 닮아 이렇게 똑똑하누. 엄마 닮았지?”

“네.”

아저씨는 상으로 옥희에게 삶은 달걀을 주었다.

며칠 후는 일요일이었는데, 아저씨는 아침 일찍부터 옷을 차려 입고 준비를 했다.

“어디 나들이를 가세요?”

내가 묻자 아저씨는 거울을 보면서 누나가 다니는 교회에 간다고 했다. 내가 알기로 아저씨는 불교신자였지만 양복을 갖춰 입고 성경책을 낀 모습이 독실한 기독신자처럼 보였다. 살짝 여우비가 내릴 것 같은 날씨였고 가을 냄새가 살금살금 다가왔다. 볕을 찾아가는 고양이처럼.

조용한 건 무덤밖에 없었다. 옥희가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지 물어볼 때도 나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매형 무덤엔 누나도 옥희도 자주 오지 않는다. 나만 자주 들릴 뿐이었다. 아저씨가 온 후로 매형 무덤을 더 자주 찾게 되었다. 조용해서 좋은 것인지 아니면 매형에게 이런저런 말을 혼자 할 수 있어 좋은 것인지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날은 나보다 누군가가 먼저 와 있었다. 차형호 선생님이었다. 내가 다가가서 인사를 하자 선생님은 부끄러운 일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놀랬다. 입에 풀을 물고 있었는데 놀란 나머지 풀을 삼킬 것 같았다. 입안에서 풀을 꺼낸 선생님은 겨우 말을 꺼냈다.

“어쩐지 깨끗하더라니. 네가 와서 잡초도 뜯고 한 모양이구나.”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자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차형호 선생님도 나만큼 여길 자주 왔단 말일 텐데 매형과 친분이 두터웠는지는 처음 알았다. 물론 같은 선생님이어서 잘 알 수도 있을 테지만 장례식에 다른 동료 선생님들과 한 번 다녀간 게 다였다.

“매형과 선생님은 서로 친구이셨나요.”

내가 묻자 선생님은 잠시 가만히 있었다.

“글쎄. 친구였나.”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매형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게 떠올랐다. 내가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매형은 이런 말을 했다.

“서로 잘 알아도 아는 척을 하면 안 되는 그런 세상이야. 친구임을 숨겨야 살 수 있는 시절이지. 마치 홍길동처럼 말이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너는 이런 시절이 싫지?”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지를 털었다.

“넌 매형이 왜 죽었는지 아니?”

나는 가만히 있었다. 매형의 죽음에 대해 어른들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억울하면, 너무 억울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어. 물론 그 억울함은 누군가가 모함을 했기 때문이지. 죽은 사람만 억울하지.”

선생님은 무덤 위에 있던 풀을 하나 꺾어 풀피리를 만들었다. 매형과 만드는 방식이 똑같았다.

“자, 선물.”

선생님은 풀피리를 나에게 주었다.

“참. 그리고 줄 게 있어. 이거 네 집에 계신 선생님 손수건이다. 내가 빌려놓고 잊고 있었어. 대신 전해줄래?”

차형호 선생님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고는 손수건만 주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려갔다. 차형호 선생님이 건네준 손수건은 분명 매형의 것이었다. 내가 그토록 확신하는 건 내가 선물한 손수건이기 때문이었다. 매형의 성은 박 씨였고 손수건에 영문자 ‘P’를 새겨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손수건이 왜 아저씨 것이란 말인가.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저기, 선생님.”

나는 큰소리로 차형호 선생님을 불렀다. 선생님은 멈춰 서서 나를 보았다.

“선생님. 이 손수건은.”

내가 말하자 선생님은 말했다.

“누님 드리면 알 거야.”

선생님은 내려가면서 풀을 다시 하나 꺾고는 접으면서 내려갔다.

나는 집으로 가서 손수건을 들고 한동안 망설였다. 누나에게 직접 줄 수 없었다. 나조차도 영문을 모르는데 일이 더 복잡해질 것만 같았다. 나는 아저씨 빨래에 넣었다.

다음 날 빨래를 마친 누나는 옷들을 개키고 다림질을 하다가 매형의 손수건을 보았다. 누나도 너무 놀라는 눈치였다.

“얘, 옥희야.”

누나가 옥희를 불렀다.

“이 손수건 분명 아저씨 세탁물에서 가져온 거니?”

“응.”

옥희가 대답하자 누나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한참 뒤에 방으로 가서 편지 한 장과 손수건을 가지고 나와 아저씨에게 전해주라고 했다. 옥희는 누나가 준 편지와 손수건을 가지고 아저씨 방으로 갔다. 전해주고 나오는 옥희를 이번엔 내가 몰래 불렀다.

“아저씨에게 손수건 줬어?”

“응. 그런데 아저씨가 손수건 안에 있던 편지를 읽더니 얼굴이 새파래지던데. 아저씨 아픈 거야?”

“글쎄. 모르겠어.”

그건 진심이었다. 무언가 알 것도 같았고 모를 것도 같았다. 눈에 보이는 구름처럼 분명 보이는데도 잡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냥 하늘을 보았다. 구름에 가려 있던 달빛이 나타났다. 하품하다 눈을 뜬 고양이 눈동자처럼.

며칠 후 아저씨는 사랑방에서 나갔다. 언덕 위에서 우는 누나를 보았다. 삶은 달걀을 사주지 않았다고 옥희도 울었다. 나는 매형 무덤에 가서 풀피리를 만들었다. 만드는 건 제법이지만 아직 잘 불어지지 않는다. 언젠가는 잘 불겠지. 나는 소리도 제대로 나지 않는 풀피리를 계속 불고 불었다. 늙은 고양이 소리 같았다.

“참 염치없는 욕심이지요. 조국 독립을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말이지요.”

그러면서 계면쩍은 웃음을 머금더군요.

“이 친구, 여기 대학으로 곧 옮겨올 거야.”

큰외삼촌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식구들도 같이 와야지?”

왠지 모를 일이지요. 갑자기 그 분의 귓불이 눈에 띄게 붉어졌어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로 조그맣게 머리를 주억거리기도 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그러니까 이도저도 영 자신 없어 하는 것 같았어요. 그때부터 분위기도 어쩐지 썰렁해졌고 시간도 꽤 흘렀으므로 우리 정담의 자리는 그것으로 파했습니다.

두어 주일쯤 뒤에 그분은 ‘티룸 풍금’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어요. 지난번엔 엉겁결에 빈손으로 왔었다며 철 이른 장미 한 다발을 안고 오셨지요. 많이 늦었지만 ‘티룸 풍금’의 개업을 축하한다고 하시대요. 학기가 시작됐기 때문에 학교로 돌아가노라고, 아마도 내년 봄학기부터는 여기서 일하게 될 것 같다고 하더군요. 저는 철부지처럼 냅다 환성을 질렀지요.

“아! 그리 되면 자주 뵐 수 있겠네요……”

손뼉이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었지요. 어머니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피어났습니다. 하지만 잠시뿐이었어요. 어머니는 금방 웃음을 지우고 시선을 떨구었습니다. 저는 갑자기 어머니가 몹시 외롭고 쓸쓸한 여자처럼 느껴져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머니는 장미를 풍금 위의 항아리에 담아 두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가지 못해 시들고 말더군요.

다음 해 봄에 그분은 정말로 K대학의 교수로 부임해 왔습니다. 혼자였습니다. 가족은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조만간 뒤따라 올 거라고 했지요. 외삼촌을 통해 들은 바로는 다섯 살 난 아들과 두 살 박이 딸을 두었다고 했어요. 그리고 또, 삼촌은 잠시 짬을 두었다가 이렇게 불쑥 말했지요.

“와이프가 백인 여자라더만……”

저는 너무너무 놀란 나머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 시절만 해도 그런 경우란 매우 드물었으니까요. 그 무렵 해방정국의 중심인물 중 한 분이던 이승만 박사의 경우가 제가 들어 아는 유일한 거였지요. 어머니 역시 충격을 받은 것 같았어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동공이 활짝 열렸어요. 놀라움이라기보다 어떤 두려움 혹은 안타까움 같은 것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까지 했습니다. 세상에! 저는 속으로 가만히 혀를 찼습니다.

어쨌거나, 그분은 우리 ‘티룸 풍금’에 종종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주로 큰외삼촌이나 다른 친구분들과 함께였지만 더러는 혼자이기도 하였지요. 그런 때면 저 풍금 곁에 자리잡고 앉아 음악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홀 안에 잔잔히 흐르고 있는 음률에 모든 걸 맡긴 사람처럼 깊숙이 등을 대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움직임이 없었지요. 약간 헝클어진 머리와 반듯한 이마, 그리고 깊이 그늘진 인중 아래 꾹 다문 입…… 저는 그의 모습에서 지적 매력과 더불어 뜻밖의 외로움 혹은 생의 고달픔 같은 걸 발견하고 내심 놀라워했답니다. 저 유명대학 교수님의 어깨를 무겁게 하고 있는 건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 보았지만 인생을 알기에 저는 역시 한낱 어린 계집아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좀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간혹 어머니가 새로 내린 커피를 들고 가 맞은편에 앉기도 했습니다. 다른 손님이 거의 없는 늦은 시간에요. 두 사람은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자주 웃기도 했지요. 그런 때 두 얼굴은 어찌나 환하게 빛나던지요. 스스럼없이 손이라도 맞잡을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하지만 오래진 않았어요. 어머니가 빈 잔을 챙겨 일어서고 나면 그는 다시 눈을 감고 깊이 가라앉는 것이었어요. 그 밝고 환하던 공간이 금방 어두운 그늘에 잠겨버리는 거지요.

다음 해에도, 그리고 또 그 다음 해에도 그분은 여전히 그런 식으로 ‘티룸 풍금’을 드나들었습니다. 가족은 여전히 오지 않았습니다. 아이들 때문이라기도 하고 또 우리나라 상황이 여전히 불안한 탓이라고도 했지요. 물론 외삼촌이 한 말일뿐 정작 그분은 말이 없었어요. 방학 때마다 한두 달씩 미국을 다녀오곤 하셨죠. 가족은 언제 오나요? 언젠가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을 때도 그는 애매한 웃음만 보이더라구요. 아, 애들이 그새 또 컸겠네, 나는 내심 생각했어요. 일곱 살, 네 살…… 부인이 백인 여자랬지. 애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어요.

1950년,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저는 스물한 살, 어머니는 서른아홉이었답니다. 저의 10대는 두 해 전에 끝났고 청상에 과부댁이 된 어머니는 어느새 마흔 고개를 눈앞에 둔 때였습니다.

전쟁이 나고 사흘째 되는 날 외삼촌네는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녀는 동행할 수가 없었어요. 저 때문이었지요. 우리 모녀가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병원에서였습니다. 그 이틀 전에 제가 맹장수술을 받았거든요. 그 시절만 해도 그건 큰 외과수술이었어요. 당장 피난길을 나서기는 무리라는 게 담당의사의 소견이었지요. 며칠만 더 기다려 보자, 하고 우리는 불안을 달랬습니다. 설마 수도 서울을 쉽게 내주기야 하랴 싶었던 거지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 이승만 대통령의 거듭 되는 방송을 들으면서 가슴을 졸였습니다. 참 헛된 꿈이었지요.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그날 정부는 이미 대전으로 옮겨갔고, 그리고 다음 날인 28일 새벽에 한강 다리가 끊어졌더군요.

소련제 장갑차를 앞세운 인민군이 서울 시내에 진입한 것은 전쟁 발발 4일차인 28일 이른 아침부터였습니다. 거리 풍경이며 분위기가 어떠했으리라는 건 굳이 말씀 드리지 않아도 족히 상상하실 테지요. 그날부터 우리 모녀는 ‘티룸 풍금’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칩거에 들어갔습니다. 그로부터 꼬박 석 달 동안이나요. 바깥세상이 지옥처럼 끔찍스럽게 상상되었으니까요. 하필이면 이 난리통에 맹장수술이라니! 저는 자신의 불운이 더없이 원망스러웠답니다.

주방에 딸린 조그만 방에서 숨죽이며 생활한 지 한 달쯤 지났을까요. 한밤중에 누군가 현관문을 잡아당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 그 순간의 두려움이라니…… 밤마다 잠을 설치던 우리 모녀는 그야말로 혼비백산했지요. 처음엔 퍼렇게 질린 얼굴을 마주보면서 마냥 떨기만 했습니다.

“좀 이상하지 않니?”

어머니가 쉰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뭐가?”

“도둑인가? 이런 난리 중에?”

그랬습니다. 문을 억지로 열려고 안간힘 하는 듯 몹시 은밀하고 초조한 태도가 느껴졌거든요. 한없이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어요. 갑자기 어머니가 현관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도어록을 풀더라구요. 저는 입만 벌린 채로 멍하니 서 있었어요. 어머니에게 저처럼 결연한 데가 있구나! 내심 감탄했지요. 문이 열리자 한 사내가 재빨리 들어섰습니다. 그분이었어요. 일부러 위장을 한 걸까. 노숙하는 부랑자들과 다를 바 없는 남루한 행색이었어요.

어쩌다 피난기회를 놓쳤다고 했습니다. 사정이 있어 나흘째 되는 28일에나 나설 작정이었는데 그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한강다리는 이미 폭파됐고 인민군 장갑차가 새벽부터 미아리고개를 넘어오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더라고 했어요.

“하숙집에 혼자 남았지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 대문을 두들기는 자들이 자주 나타났어요. 사람을 찾는 거 같았어요.”

임시방편으로 급조한 은신처에서 잘 모면했기 망정이지 불행히도 검거됐다면 결국 북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으리라. 문득 ‘티룸 풍금’이 생각났다는 거였어요. 피난들 가고 비어있을 거라 생각했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여기가 되레 안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거지요.

“몰래 잠입하려 했는데 갑자기 문이 열려서 기절할 뻔 했습니다.”

경황 중에 그는 웃고 있었어요. 두려움 같은 건 말끔히 걷힌 얼굴이었죠. 어머니가 그의 손을 꼭 쥐고 있었습니다.

9.28수복 후에도 한동안 우리는 함께 생활했습니다. 우리 모녀와 그분, 그렇게 세 사람이 ‘티룸 풍금’에서 동거한 거지요. 주방에 딸린 골방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분은 늘 홀의 풍금 뒤편에 잠자리를 폈지요. 얼마나 불편하셨을지 상상이 돼요. 서로 민망한 순간도 많았지만 아무도 내색하지 않았어요. 전시 중이어서 일까요. 되레 그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듯 우리는 자주 웃음을 머금곤 했지요. 비록 불안하고 옹색한 생활이었지만 우리는 결코 불행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숙집이나 학교가 정상화되어 그분이 제자리로 돌아간 건 그 해 십일 월 중순도 지나서예요. 그러니까 석 달 남짓, 우리는 함께 살았던 거지요. 전쟁의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말이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전쟁이라는 미증유의 경험을 치른 터라 누구에게나 그러했겠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 각별한 기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후 내내 심중에 깊이 남아 점점 더 무겁게 되새겨지곤 했어요. 우리 세 사람이 ‘티룸 풍금’에 갇혀 살았던 그 시간 그 순간들이 말이에요. 피난길 발목을 잡았던 저의 맹장수술이 두 분에게는 어쩌면 뜻밖의 축복이 아니었나 싶은 거지요. 그때로부터 또다시 긴 세월이 흘러간 지금도 마음 한 구석이 자꾸만 아릿해지곤 한답니다.

열여덟 너무나 이른 나이에 청상이 된 어머니는 이승에서 예순넷의 수를 누리고 우리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그 서너 해 전에 정년 퇴직하여 미국의 가족에게로 돌아가 살던 그분을 어머니의 영결식장에서 보게 된 건 저로서는 적지 않은 위안이 되었답니다. 어머니도 그러셨을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박성원 소설가 사진

〃 작가소개 〃

박성원

소설가.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69년생
소설 『이상(異常), 이상(李箱), 이상(理想)』 『나를 훔쳐라』 『우리는 달려간다』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루』 등

  • 『사랑손님과 어머니』

    1935년 《조광(朝光)》지에 발표된 주요섭(1902~1972년)의 단편소설 『사랑손님과 어머니』는 과부인 어머니와 사랑방에 하숙을 든 아저씨의 미묘한 연정을 여섯 살 난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서술한 서정성 짙은 작품입니다.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아저씨와 어머니는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채 아저씨가 사랑방을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 됩니다.

작성일
2017-12-0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