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머니의 풍금소리를 다시 들은 것은 그로부터 여덟 해가 흐른 뒤였습니다. 사랑손님이 떠나시던 그날, 우리 모녀는 뒷동산에 올라 멀리 내려다보이는 정거장을 향해 말 없는 배웅을 했었지요. 참 슬픈 날이었어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저는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습니다. 엄마의 낯빛이 너무너무 슬퍼 보여서 울음을 억지로 참았던 거지요. 어쩌면 엄마가 저보다 더 서럽게 울까봐 두려웠던 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저보다 더 잘 참아냈습니다. 그래서 어른인가 보다 했습니다. 기어이 눈을 비집고 나온 뜨거운 눈물 두 방울을 엄마 몰래 소매로 얼른 훔치고 나서 저는 안 그런 척 시치미를 뗐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말했어요.
“우리 옥희가 많이 서운한가 보구나……”
물기가 촉촉하게 밴 음성이었어요. 하지만 그 얼굴은 차갑고 고요했습니다. 저는 그만 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어쩌자고 조그만 주먹을 만들어 엄마의 옆구리를 콩콩 쥐어박았지요. 왜 그랬던가?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도 제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네요.
집으로 돌아오는 즉시 어머니는 그때까지 열어두었던 풍금 뚜껑을 닫았습니다. 다시는 풍금 타는 일이 없으리라는 걸 다짐이라도 하듯 쇠를 채우고 나서 그 위에다 전처럼 반짇고리를 올려 두었습니다. 그게 여덟 해 전, 내가 여섯 살 때 일이었던 거지요. 그날 이후 어머니는 정말 풍금 뚜껑을 여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따금씩 그쪽으로 망연한 눈길을 던지고 있는 모습만 보였을 뿐이에요. 그런 때 어머니가 본 건 무엇이었을까요? 어머니의 눈길은 풍금을 지나 더 멀리 아득한 곳을 헤매고 있는 것처럼 저에게는 느껴지곤 했습니다.
아! 그 풍금 뚜껑을 어머니가 가만히 열었지요. 반짇고리 대신 올려 두었던 꽃병과 인형을 조심스레 내려놓은 다음에요. 그렇군요. 네, 여기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대강 말씀 드려야겠군요.
제가 열한 살, 그리고 어머니가 스물아홉 나던 해인 1940년 가을에 우리 가족은 서울(경성부)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손님이 떠나신 후 다섯 해가 지나서인데 사실은 큰 외삼촌네 이삿짐에 묻어서 한 거예요. 무슨 생각에서 큰외삼촌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을 버리고 그리도 먼 남행길을 나서게 됐는지 저는 물론 알고 있지 못합니다. 나중에 삼팔선이라는 게 생겨서 길이 막히고 나서 보니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어쩌면 큰외삼촌에게는 선견지명이라는 게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그로부터 다시 세 해가 더 흐른 1943년 봄에 ‘티룸 풍금’이 종로통 한 구석에서 문을 열었지요. 주인이자 마담은 그 해 서른둘의 제 어머니셨습니다. 열네 살의 저는 겨우 시다 역을 자임했구요. 그나마 학교를 다녀온 이후에나 거들 수 있었지만…… 낯선 땅 낯선 도시에서 우리 모녀가 닻을 내리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나마 외삼촌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요. 어쨌거나 어머니는 바느질품이며 식당업, 문구점 등을 거쳐 마침내 ‘티룸 풍금’을 개업하기에 이른 것이지요.
종로통이라곤 해도 좁은 뒷골목의 목조2층이었고, 여기저기서 모아 들인 의자 스물 두어 개쯤을 겨우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어요. 특별한 내부 장식도 없이 그저 소박하고 편안하게 꾸몄답니다. 그래서였나요. 어머니의 저 풍금을 홀 한쪽에다 내놓고 모조품인 백자 항아리를 그 위에다 올려놓았는데 그게 썩 그럴 듯해 보이기에 저는 항아리 옆에다 인형도 나란히 놓아두었지요. 사랑손님으로부터 작별 선물로 받은 바로 그 인형이지요. 사랑방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다들 좋아 하시더라구요. ‘티룸 풍금’이란 상호와도 잘 맞아떨어진다고, 누구 아이디어냐고 더러 묻기도 했습니다.
상호를 정하고 그런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바로 어머니셨어요. 세상 많고 많은 말들 중에 왜 ‘풍금’일까? 간판 올리던 날부터 저는 종종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풍금, 풍금, 풍금…… 저로선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위해 사 주신 거라고 했습니다. 풍금이 귀하던 그 시절에 말입니다. 아버지의 넉넉한 마음도 그렇지만 처녀적 어머니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곰곰 상상하다 보면 문득문득 엉뚱한 얼굴이 떠올랐지요. 오래 전에 우리 곁을 떠난 저 사랑손님의 얼굴이…… 개업 자축연 자리에서였습니다. 외삼촌을 비롯한 외가 쪽과 어머니의 친구분들 해서 고작 열서너 명쯤의 조촐한 잔치였지요. 그래서 생일잔치처럼 가족적인 분위기였습니다. 함께 둘러서서 따끈따끈한 시루떡을 떼고 갓 내린 커피를 한 모금씩 음미하던 중에 누가 불쑥 제안했어요.
“이런 날 우리 마담의 풍금 솜씨를 한번 감상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중에 안 거지만, 어머니의 오랜 친구분이셨어요.
“그거 좋겠구먼!”
“좋다마다…… 처녀때 솜씨 어디 갔을라구……”
“성악가나 피아니스트가 되리라고 다들 기대했었지, 우리……”
그런 소리들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기 때문에 그들을 초대한 어머니로서는 도저히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얼굴이 새빨개진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풍금 뚜껑을 열었지요. 그러고 나서 한참 동안 호흡을 가다듬더니 마침내 손을 건반 위로 가져갔습니다. 그 순간 저는 너무너무 긴장되어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이었어요. 그만 두 눈을 꼭 감아버렸습니다.
아! 풍금 소리…… 저는 첫 소절만 듣고도 금방 기억해냈습니다. 저 여덟 해 전 사랑손님과 함께 들었던 바로 그 곡이었어요. 저는 눈을 떴습니다.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그때처럼 한없이 맑고 고운 목소리였어요. 때마침 붉게 물든 저녁볕이 창 너머로 흠뻑 쏟아져 들어온 탓이었을까요. 어머니의 얼굴에는 어느덧 뜨거운 어떤 열망 같은 것이 타오르는 듯했습니다. 저는 ‘티룸 풍금’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그만 잊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그 얼굴빛이 여덟 해 전의 그 순간으로 저를 되돌려 놓았던 거지요. 그때처럼 어머니가 저를 껴안고 울음이 잠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것 같은 착각에 빠졌거든요.
“옥희야, 난 너 하나문 그뿐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열네 살, 저는 막 사춘기로 접어들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요. 비로소 어머니의 그 말이 무슨 뜻이었나 깨달아졌습니다.
삼년이란 세월이 또 금방 흘러갔습니다. 8.15 해방 다음 해이니까 1946년도 여름입니다.
장마철답게 하루 종일 궂은 날씨더니 해질 녘부터는 제법 굵은 빗줄기가 골목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월요일 저녁이기도 해서 홀은 텅 비다시피 했지요. 아홉 시쯤이었나, 그만 문을 닫아야겠다며 카운터를 나서던 어머니가 느닷없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마침 홀 안으로 성큼 들어선 큰외삼촌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뒤따라 단정한 양복 차림에 중절모를 눌러쓴 신사분이 들어섰던 거지요.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저 역시 외마디 소리를 뱉어내고 말았어요. 왜냐구요? 중절모를 벗어 들고 어머니 앞에서 조용히 웃고 서 있는 사나이, 그는 저 사랑손님이 분명했기 때문이지요.
세상에! 제 입은 얼어붙고 말았어요. 너무너무 뜻밖의 일이었거든요. 어머니는, 잠깐이긴 했지만, 숫제 넋을 잃어버린 듯했습니다. 핏기 잃은 얼굴에 두 눈만 겁먹은 듯 번히 열려 있었어요. 열한 해만의 만남인데도 뭐라 말 한 마디 뱉어놓지 못하더군요. 저 역시 그랬어요. 반가운 마음에서 그에게로 와락 다가서긴 했지만 입술이 딱 달라붙어서 도무지 떨어지지 않더라구요.
“옥희가 많이 컸구나……”
그가 제 어깨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말했어요.
“반갑다. 이젠 아리따운 처녀가 되었구나……”
저는 얼른 어머니 등 뒤로 가 숨었습니다. 그제야 왈칵 부끄러움이 밀려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날 저녁에 우리는 참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신사분과 큰외삼촌이 나란히 앉고 맞은편에 어머니와 제가 앉았지요. 제가 새 커피를 내려 왔더니 그 분이 굳이 나를 잡아 앉혔어요. 이젠 여섯 살짜리 계집아이가 아니라는 거지요. 큰외삼촌도 이렇게 거들었어요.
“아무렴. 네 엄마가 시집 간 나이다. 허허……”
그랬지요. 어언 저는 열일 곱, 어머니는 서른다섯의 여인이었습니다.
우리 집 사랑을 떠난 이후 그 분은 미국 유학의 길을 나섰노라고 했습니다. 스탠포드 대학에서 교육학 박사를 받은 다음 미네소타주립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었어요. 그러다 조국이 해방을 맞자 기왕이면 내 나라에서 일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고 했지요.
“참 염치없는 욕심이지요. 조국 독립을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말이지요.”
그러면서 계면쩍은 웃음을 머금더군요.
“이 친구, 여기 대학으로 곧 옮겨올 거야.”
큰외삼촌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식구들도 같이 와야지?”
왠지 모를 일이지요. 갑자기 그 분의 귓불이 눈에 띄게 붉어졌어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로 조그맣게 머리를 주억거리기도 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그러니까 이도저도 영 자신 없어 하는 것 같았어요. 그때부터 분위기도 어쩐지 썰렁해졌고 시간도 꽤 흘렀으므로 우리 정담의 자리는 그것으로 파했습니다.
두어 주일쯤 뒤에 그분은 ‘티룸 풍금’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어요. 지난번엔 엉겁결에 빈손으로 왔었다며 철 이른 장미 한 다발을 안고 오셨지요. 많이 늦었지만 ‘티룸 풍금’의 개업을 축하한다고 하시대요. 학기가 시작됐기 때문에 학교로 돌아가노라고, 아마도 내년 봄학기부터는 여기서 일하게 될 것 같다고 하더군요. 저는 철부지처럼 냅다 환성을 질렀지요.
“아! 그리 되면 자주 뵐 수 있겠네요……”
손뼉이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었지요. 어머니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피어났습니다. 하지만 잠시뿐이었어요. 어머니는 금방 웃음을 지우고 시선을 떨구었습니다. 저는 갑자기 어머니가 몹시 외롭고 쓸쓸한 여자처럼 느껴져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머니는 장미를 풍금 위의 항아리에 담아 두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가지 못해 시들고 말더군요.
다음 해 봄에 그분은 정말로 K대학의 교수로 부임해 왔습니다. 혼자였습니다. 가족은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조만간 뒤따라 올 거라고 했지요. 외삼촌을 통해 들은 바로는 다섯 살 난 아들과 두 살 박이 딸을 두었다고 했어요. 그리고 또, 삼촌은 잠시 짬을 두었다가 이렇게 불쑥 말했지요.
“와이프가 백인 여자라더만……”
저는 너무너무 놀란 나머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 시절만 해도 그런 경우란 매우 드물었으니까요. 그 무렵 해방정국의 중심인물 중 한 분이던 이승만 박사의 경우가 제가 들어 아는 유일한 거였지요. 어머니 역시 충격을 받은 것 같았어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동공이 활짝 열렸어요. 놀라움이라기보다 어떤 두려움 혹은 안타까움 같은 것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까지 했습니다. 세상에! 저는 속으로 가만히 혀를 찼습니다.
어쨌거나, 그분은 우리 ‘티룸 풍금’에 종종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주로 큰외삼촌이나 다른 친구분들과 함께였지만 더러는 혼자이기도 하였지요. 그런 때면 저 풍금 곁에 자리잡고 앉아 음악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홀 안에 잔잔히 흐르고 있는 음률에 모든 걸 맡긴 사람처럼 깊숙이 등을 대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움직임이 없었지요. 약간 헝클어진 머리와 반듯한 이마, 그리고 깊이 그늘진 인중 아래 꾹 다문 입…… 저는 그의 모습에서 지적 매력과 더불어 뜻밖의 외로움 혹은 생의 고달픔 같은 걸 발견하고 내심 놀라워했답니다. 저 유명대학 교수님의 어깨를 무겁게 하고 있는 건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 보았지만 인생을 알기에 저는 역시 한낱 어린 계집아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좀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간혹 어머니가 새로 내린 커피를 들고 가 맞은편에 앉기도 했습니다. 다른 손님이 거의 없는 늦은 시간에요. 두 사람은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자주 웃기도 했지요. 그런 때 두 얼굴은 어찌나 환하게 빛나던지요. 스스럼없이 손이라도 맞잡을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하지만 오래진 않았어요. 어머니가 빈 잔을 챙겨 일어서고 나면 그는 다시 눈을 감고 깊이 가라앉는 것이었어요. 그 밝고 환하던 공간이 금방 어두운 그늘에 잠겨버리는 거지요.
다음 해에도, 그리고 또 그 다음 해에도 그분은 여전히 그런 식으로 ‘티룸 풍금’을 드나들었습니다. 가족은 여전히 오지 않았습니다. 아이들 때문이라기도 하고 또 우리나라 상황이 여전히 불안한 탓이라고도 했지요. 물론 외삼촌이 한 말일뿐 정작 그분은 말이 없었어요. 방학 때마다 한두 달씩 미국을 다녀오곤 하셨죠. 가족은 언제 오나요? 언젠가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을 때도 그는 애매한 웃음만 보이더라구요. 아, 애들이 그새 또 컸겠네, 나는 내심 생각했어요. 일곱 살, 네 살…… 부인이 백인 여자랬지. 애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어요.
1950년,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저는 스물한 살, 어머니는 서른아홉이었답니다. 저의 10대는 두 해 전에 끝났고 청상에 과부댁이 된 어머니는 어느새 마흔 고개를 눈앞에 둔 때였습니다.
전쟁이 나고 사흘째 되는 날 외삼촌네는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녀는 동행할 수가 없었어요. 저 때문이었지요. 우리 모녀가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병원에서였습니다. 그 이틀 전에 제가 맹장수술을 받았거든요. 그 시절만 해도 그건 큰 외과수술이었어요. 당장 피난길을 나서기는 무리라는 게 담당의사의 소견이었지요. 며칠만 더 기다려 보자, 하고 우리는 불안을 달랬습니다. 설마 수도 서울을 쉽게 내주기야 하랴 싶었던 거지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 이승만 대통령의 거듭 되는 방송을 들으면서 가슴을 졸였습니다. 참 헛된 꿈이었지요.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그날 정부는 이미 대전으로 옮겨갔고, 그리고 다음 날인 28일 새벽에 한강 다리가 끊어졌더군요.
소련제 장갑차를 앞세운 인민군이 서울 시내에 진입한 것은 전쟁 발발 4일차인 28일 이른 아침부터였습니다. 거리 풍경이며 분위기가 어떠했으리라는 건 굳이 말씀 드리지 않아도 족히 상상하실 테지요. 그날부터 우리 모녀는 ‘티룸 풍금’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칩거에 들어갔습니다. 그로부터 꼬박 석 달 동안이나요. 바깥세상이 지옥처럼 끔찍스럽게 상상되었으니까요. 하필이면 이 난리통에 맹장수술이라니! 저는 자신의 불운이 더없이 원망스러웠답니다.
주방에 딸린 조그만 방에서 숨죽이며 생활한 지 한 달쯤 지났을까요. 한밤중에 누군가 현관문을 잡아당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 그 순간의 두려움이라니…… 밤마다 잠을 설치던 우리 모녀는 그야말로 혼비백산했지요. 처음엔 퍼렇게 질린 얼굴을 마주보면서 마냥 떨기만 했습니다.
“좀 이상하지 않니?”
어머니가 쉰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뭐가?”
“도둑인가? 이런 난리 중에?”
그랬습니다. 문을 억지로 열려고 안간힘 하는 듯 몹시 은밀하고 초조한 태도가 느껴졌거든요. 한없이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어요. 갑자기 어머니가 현관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도어록을 풀더라구요. 저는 입만 벌린 채로 멍하니 서 있었어요. 어머니에게 저처럼 결연한 데가 있구나! 내심 감탄했지요. 문이 열리자 한 사내가 재빨리 들어섰습니다. 그분이었어요. 일부러 위장을 한 걸까. 노숙하는 부랑자들과 다를 바 없는 남루한 행색이었어요.
어쩌다 피난기회를 놓쳤다고 했습니다. 사정이 있어 나흘째 되는 28일에나 나설 작정이었는데 그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한강다리는 이미 폭파됐고 인민군 장갑차가 새벽부터 미아리고개를 넘어오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더라고 했어요.
“하숙집에 혼자 남았지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 대문을 두들기는 자들이 자주 나타났어요. 사람을 찾는 거 같았어요.”
임시방편으로 급조한 은신처에서 잘 모면했기 망정이지 불행히도 검거됐다면 결국 북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으리라. 문득 ‘티룸 풍금’이 생각났다는 거였어요. 피난들 가고 비어있을 거라 생각했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여기가 되레 안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거지요.
“몰래 잠입하려 했는데 갑자기 문이 열려서 기절할 뻔 했습니다.”
경황 중에 그는 웃고 있었어요. 두려움 같은 건 말끔히 걷힌 얼굴이었죠. 어머니가 그의 손을 꼭 쥐고 있었습니다.
9.28수복 후에도 한동안 우리는 함께 생활했습니다. 우리 모녀와 그분, 그렇게 세 사람이 ‘티룸 풍금’에서 동거한 거지요. 주방에 딸린 골방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분은 늘 홀의 풍금 뒤편에 잠자리를 폈지요. 얼마나 불편하셨을지 상상이 돼요. 서로 민망한 순간도 많았지만 아무도 내색하지 않았어요. 전시 중이어서 일까요. 되레 그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듯 우리는 자주 웃음을 머금곤 했지요. 비록 불안하고 옹색한 생활이었지만 우리는 결코 불행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숙집이나 학교가 정상화되어 그분이 제자리로 돌아간 건 그 해 십일 월 중순도 지나서예요. 그러니까 석 달 남짓, 우리는 함께 살았던 거지요. 전쟁의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말이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전쟁이라는 미증유의 경험을 치른 터라 누구에게나 그러했겠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 각별한 기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후 내내 심중에 깊이 남아 점점 더 무겁게 되새겨지곤 했어요. 우리 세 사람이 ‘티룸 풍금’에 갇혀 살았던 그 시간 그 순간들이 말이에요. 피난길 발목을 잡았던 저의 맹장수술이 두 분에게는 어쩌면 뜻밖의 축복이 아니었나 싶은 거지요. 그때로부터 또다시 긴 세월이 흘러간 지금도 마음 한 구석이 자꾸만 아릿해지곤 한답니다.
열여덟 너무나 이른 나이에 청상이 된 어머니는 이승에서 예순넷의 수를 누리고 우리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그 서너 해 전에 정년 퇴직하여 미국의 가족에게로 돌아가 살던 그분을 어머니의 영결식장에서 보게 된 건 저로서는 적지 않은 위안이 되었답니다. 어머니도 그러셨을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 작가소개 〃
이동하
소설가. 1942년생
소설 『모래』 『바람의 집』 『저문 골짜기』 『폭력연구』 『삼학도』 『문 앞에서』 『우렁각시는 알까?』 『도시의 늪』 『냉혹한 혀』 『장난감 도시』『매운 눈꽃』 등
『사랑손님과 어머니』
1935년 《조광(朝光)》지에 발표된 주요섭(1902~1972년)의 단편소설 『사랑손님과 어머니』는 과부인 어머니와 사랑방에 하숙을 든 아저씨의 미묘한 연정을 여섯 살 난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서술한 서정성 짙은 작품입니다.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아저씨와 어머니는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채 아저씨가 사랑방을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