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지혜

정절을 지킨 불효자 화순옹주

고전의 지혜 : 화순옹주와 열녀문 고전의 지혜 : 화순옹주와 열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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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영조의 딸 화순옹주가 애통한 마음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 누웠다. 남편이 이른 나이로 세상을 뜨자 그를 따라 죽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조는 한걸음에 달려가 딸을 달래 보았지만, 옹주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는데…

고전의 지혜 : 어떤 백성을 품을 것인가?

식음을 전폐한 화순옹주와 애타는 영조

1758년 영조는 급히 궁을 나와 딸 화순옹주의 집으로 향했다.

“며칠째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들었다. 애타는 마음은 알겠으나 아비를 생각하여 미음이라도 한 술 들도록 하거라.”

화순옹주는 하는 수 없이 미음을 넘겼으나 곧 토해내고 말았다.

“이미 뜻을 정했으니 차마 목으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어허 대체 이를 어찌할꼬…”


영조와 화순옹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고전의 지혜 : 어떤 백성을 품을 것인가?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화순옹주

영조의 둘째 딸로 태어난 화순옹주는 성품이 유순하고 행실이 바르며 검소했다.

“옹주에게 보석과 노래기를 앞에 펼쳐놓았는데 일부러 눈을 감고 보지 않았다고 하옵니다.”

“그것이 정말인가? 정말 기특한 아이구나.”


영조는 화순옹주를 특히 예뻐하며 <소학>, <열녀전> 등을 읽어주고 도리를 가르치곤 했다. 이렇게 아비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옹주였지만 그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옹주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고 이듬해 병사했고, 아홉 살 때에는 한 살 위인 오라버니 효장세자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열 살 때는 한 궁인이 자신의 처우에 앙심을 품고 옹주에게 독약을 먹여 죽이려 한 적도 있었다. 다사다난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화순옹주는 열세 살 때 동갑인 김한신과 결혼을 했다.

“인물도 훤칠하고 머리도 영민하며 몸가짐이 항상 겸손하니 옹주의 짝으로 더할 나위가 없겠구나.”

김한신은 왕의 사위가 돼서도 비단옷을 걸치지 않았고 그가 왕의 사위인지 주변사람들이 모를 정도였다. 부부 사이도 남달리 좋아 당시 사람들은 이 부부를 ‘어진 부마와 착한 옹주’라 부르며 칭송했다. 하지만 화순옹주에게 다시금 비극이 찾아왔다. 김한신이 서른 아홉 살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이를 애통해하던 화순옹주는 남편을 따라서 죽기로 결심하고 음식을 끊었다.

고전의 지혜 : 어떤 백성을 품을 것인가?

화순옹주의 죽음과 영조의 고민

“옹주가 남편이 죽은 뒤로 7일 동안 곡기를 끊었다고 하니 이를 내버려두면 어찌 아비 된 도리라 하겠는가.”

궁으로 돌아간 영조는 옹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장문의 편지까지 썼지만, 옹주는 끝내 음식을 끊은 지 14일만에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비통한 마음으로 옹주의 상에 참석한 예조판서는 영조에게 이렇게 청했다.

“남편을 여의고 슬픔이 심할 때 그 자리에서 자결하기는 쉬우나 열흘 넘게 음식을 먹지 않고 절조를 지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이에게 모범이 될 수 있도록 옹주에게 열녀문을 내리기를 청하옵니다.”

하지만 영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궁궐로 돌아왔다.

“딸의 장례를 지켜보는 것도 비통한데 열녀문을 내리라고 청하다니…”

당시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효와 정절을 중시 여겼다. 그래서 죽은 남편을 따라 죽은 여인을 열녀로 칭하였고 집이나 마을 앞에 붉은 문을 세우고 노역을 면하는 혜택을 주었다. 이것이 바로 열녀문이다. 대신들이 화순옹주에게 열녀문을 내릴 것을 재차 청하자 영조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옹주가 비록 정절은 지켰으나 자식으로서 아비의 말을 따르지 않고 죽었으니 효에는 모자람이 있었소. 그러하니 아비가 자식에게 열녀문을 내리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소.”

“전하의 말씀은 지당하오나 훌륭한 정절을 그대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백세토록 사라지지 않는 것은 정절에 달려있지 열녀문에 달려 있지 않다. 앞으로 다시는 이 일을 논하지 말라.”


화순옹주는 남편 김한신의 묘 옆에 합장되었으며 영조의 명대로 열녀문은 내려지지 않았다.

“정절도 중하지만, 효 또한 중한 것이오. 또한 옹주에게 열녀문을 내리지 않은 것은 만일 내가 옹주의 죽음을 칭송할 경우 앞으로 남편을 먼저 보낸 여인들에게 죽음을 강요할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오.”

자식의 죽음과 슬픔 속에도 대신들과 논쟁을 치르고 그 일이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서 다양한 가치를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는 리더의 숙명. 아버지로서, 그리고 임금으로서 효와 정절 사이에서 고민하던 영조의 결정은 옳았던 것일까. 실제로 25년 후 영조의 손자인 정조가 자신의 고모인 화순옹주의 정절을 칭송하며 열녀문을 세우자, 영조가 우려했던 대로 남편을 따라 죽는 여인들의 사례가 늘어났다고 한다.

화순옹주와 열녀문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유교 문화를 바탕으로 하던 조선시대에는 효와 정절 모두 마땅히 따라야 할 규범이었으나, 위의 사례와 같이 두 가치가 서로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결정이 최선의 판단일지를 숙고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중대한 일이다. 영조의 판단은 지도자로서, 아버지로서의 숙고가 묻어나는 결정이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어느 한 가치에 치우치지 않고 여러 상황과 그로 인해 파생될 결과까지 예측해 보는 혜안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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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11-09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