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를 향한 문학적 여정
아모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힌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靑무우밭인가 해서 나려 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러서
公主처럼 지처서 도라온다.
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어서 서거푼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바다와 나비」 전문
1939년 김기림은 시 「바다와 나비」에서 바다의 깊이와 물결의 높이를 오인한 나비로 비유된 시적 자아를 통해 더 이상 문명과 희망을 환기하지 않는 ‘근대’를 문제 삼고 있다. 바다에 대한 이런 시적 상상은 제국주의와 식민지, 그리고 전쟁이라는 근대의 현실 앞에 선 김기림의 내면의식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청무우 밭인 줄 알고 내려갔다가 지쳐서 돌아온 나비’의 여정은 바로 ‘근대’를 경험하고 주제화해왔던 김기림 문학의 여로 중 한 지점이었을 것이다.
도쿄 시절, 문학 그리고 신흥예술과의 만남
1920년대 중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20년대 말 조선으로 돌아온 김기림이 근대와 도시를 중심에 놓고 1930년대 초반 모더니즘을 선도한 문학인으로 활동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김기림은 일본으로 두 번 유학을 떠났는데, 첫 번째는 도쿄로 간 1925년부터 1929년, 두 번째는 센다이(仙臺)로 갔던 1936년부터 1938년까지이다. 그런데 김기림의 시나 수필, 문학론 등에서 일본에서의 체류 경험은 적극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때문에 근대 지식인이자 문학인으로서 김기림의 출발지가 되었던 도쿄 생활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주석1)
1925년 봄, 김기림은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시부야구의 요요기(代代木)에 있던 메이쿠(名敎)중학교에 편입학했다. 메이쿠중학교는 1955년에 토카이대학(東海大學) 부속고교가 되어 치바현(千葉縣)으로 학교를 옮겼는데, 메이쿠중학교의 터와 교사(校舍)는 현재 토카이대학의 요요기 캠퍼스에 그 자취가 남아 있다. 메이쿠중학교가 있었던 요요기, 그 지역은 오래전 일본 공산당의 본부가 있어서 공산당의 별칭을 ‘요요기’로 불렀다고도 하는데, 현재는 학교에 이르는 길에 고급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토카이대학의 교수는 웃으면서 이 동네의 집값이 매우 높다고 말한다. 지난 2016년 봄학기의 3개월, 그리고 그 겨울방학 동안 짧게 도쿄에 머물렀던 나는 김기림의 동경 시절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었다. 요요기를 찾아간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래 된 건물은, 뼈대는 두고 외관만을 지속적으로 리뉴얼을 해서 옛 교사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김기림은 당시 세이카(精華)고등여학교에 다녔던 누나 선덕과 함께 근처에서 자취를 하며 중학교를 1년 만에 마쳤다고 한다. 원래 4학년에 편입하는 경우 2년은 공부해야 하는데, 문부성의 대학자격검정시험에 합격하여 1년 만에 졸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26년 봄에 니혼대학 전문부 문과정과(專門部文科正科)-일반적으로는 문학예술과로 불렸고, 현재 예술학부-에 입학하여 주야간부(주간은 법문학부, 야간은 전문부와 문학과) 수업을 들으며 영문학을 중심으로 한 예술 각 분야를 폭넓게 학습했다고 한다.
동문들의 기억에 의하면 니혼대학 예술학부의 분위기는 자유로웠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예술학부에는, 문인이자 비평가로 문단 저널리즘의 주요 인물이기도 했던 아베 지로(阿部次郞)와 키쿠치 간(菊池寬) 등이 1926년까지 강사로 재직했었는데, 특히 키쿠치 칸은 아쿠타카와 상 등을 제정하는 등, 문단과 저널리즘을 잇는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또한 사회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철학과 미학을 가르쳤던 마츠바라 간(松原?) 교수가 있었는데, 그를 통해 김기림은 자본주의와 계급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석2)
니혼대의 캠퍼스는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김기림이 다녔던 치요다구(千代田區) 미사키초(三崎町)의 예술학부 교사는 현재 법학부로 사용되고 있으며 원래 예술학부는 현재 에코다(江古田)와 토코로자와(所澤) 두 캠퍼스로 옮겼다. 지난 봄 나는 에코다 캠퍼스에서 5분 거리에 살았는데 주변에 무사시대학, 무사시노 음대 등이 몰려 있는 대학가였다. 김기림이 유학할 당시의 니혼대 주변은 메이지(明治)·츄오(中央)·센슈(專修)대학 등이 같이 있었고, 진보초(神保町)의 고서점가를 포함해 특색 있는 학생거리가 형성되었던 곳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김기림은 영화와 미술 등을 포함한, 신흥 예술을 자유롭게 습득할 수 있었다.
니혼대에서 천천히 10분정도를 걸어 내려오면 칸다(神田)로 이어지는 진보초 서점 거리가 눈앞에 주욱 가로로 이어져 있다. 오랜 시간을 담은 거리와 서점, 그리고 고서들 사이를 누비며 나는 과거의 어느 시간대에 이 거리에 서 있었을 김기림을 상상했다. 영문학 관련 서적상 ‘오가와(小川)도서’, 영화 관련 전문서를 취급하는 ‘야구치(矢口)서점’……. 난 문을 밀고 들어갔다. 꽉 들어찬 두꺼운 장정의 책들과 고서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각각 1920년(?)과 1918년부터 현재의 자리에서 영업을 시작한 서점으로 진보초 서점가에서도 고서점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나는 마치 100년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것 같은 서점 주인에게 하마터면 조선 유학생 김기림을 아느냐고 물을 뻔했다. 20세기 초부터 조선의 유학생들이 이 지역의 대학에 많이 유학 와 있었다고 말해주고 돌아 나오며, 이 서점들에 분명 영문학과 영화를 좋아했던 김기림이 왔다 갔으리라 ‘그냥 믿기로’ 했다.
김기림 자신의 기억에 의하면 그는 1937년 3월 이상을 만나러 이 동네를 다시 방문했다. 그때 이상은 진보초에 가까운 쿠단 시타(九段下)의 하숙집에 머물고 있었다. 이상에게서 ‘현대라는 커다란 모함에 빠진 골고다의 예수’ 같다는 비극적 인상을 받고는 주석3) 김기림은 유학 중인 토호쿠 제대가 있는 센다이로 다시 돌아갔고 한 달 후, 이상은 도쿄제대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근대를 경험하는 ‘피에로’의 독백
김기림은 니혼대를 1929년 졸업하고, 귀국하여 1930년 조선일보에 입사했으며 조선 문단의 모더니티를 선도하는 문학인으로 부상하였다. 김기림은 근대를 가장 잘 구현한 삶의 조건이 도시라고 생각했으며 도시 풍경 속에서 근대를 발견한다고 이야기했다. 알려져 있듯이 19세기말 이후, 서구에서 국제적인 운동이었던 모더니즘은 도시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일찍이는 보들레르로부터 시작하여 큐비즘과 초현실주의, 미래주의, 다다 등의 아방가르드 운동 등이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의 대도시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 역시 메이지 이후 도쿄를 중심으로 도시화가 진행되었는데 1930년 전후 에는 그 규모나 성격에 있어서 국제적인 도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도쿄의 문명과 문화를 소개하는 다양한 책자가 만들어졌으며 문인들은 도시의 풍경과 흥취를 제제로 삼아 창작했다. 하나의 예로, 1930년대 “세계 대도시첨단 재즈문학 시리즈”로 『モダン TOKIO 圓舞曲』가 출간되었는데, 이 책의 필자로 당대 유명한 모더니스트들이 참여하여 도쿄 시내의 수족관, 공원, 백화점 등의 도시문화공간을 소개하였으며, 첨단 문화 현상으로 스포츠, 기계, 속도, 군중 등에 관한 감상을 이야기했다.
1925년에서 1929년에 이르는 첫 번째 유학 기간 동안 도쿄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김기림은 귀국 후 시와 산문 등에서 도시 생활과 풍경을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1930년대 초기 작품에 드러나는 근대 자본주의와 도시 이미지는 조선적이기보다는 일본에서의 경험을 재구성한 것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초기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도시 번화가는 마치 일본 도쿄의 풍경이라는 렌즈를 통해 조선 서울의 풍경을 찍는 것, 혹은 두 개의 풍경을 겹쳐 놓은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의 도시 풍경이 김기림의 의식 속에서 탄생한 시뮬라크르였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으로도 이어진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 도시를 가로지르며 김기림이 의식한 것은 물질적 감각을 넘어 근대 자본주의의 문제적 도시 현실이었음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국풍속의 ‘그로테스크’한 행렬이 本町3丁目을 흘러간다. 파리떼와 같이 잡답하고 도발적인 가장 행렬이 흘러간다. ‘에그소틱’한 원시악기의 부조화-躁音- 亂調(略) 주석4)
밤하늘을 채색하는 찬란한 ‘일류미네이션’의 人目을 현혹케하는 변화—수백의 눈을 거리로 향하여 버리고 있는 들창—. 거대한 5,6층 빌딩 체구 속으로 혈관과 같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엘리베이터(昇降機) ……중략…… 이곳을 발상지로 하고 ‘에로’와 ‘그로’와 이것을 중심으로 소매치기와 키스와 유인 등 근대적 범죄가 대도시로 향하여 범람한다. ……중략…… 술취한 ‘재즈’가 ‘카페’의 유리창의 자주빛 휘장을 헤치고 거리로 향하여 범람한다. ……중략…… 브르조아가 빚어놓은 향락의 회색지 ……중략…… 도회는 매춘부이다. 주석5)
근대 도시가 가진 발랄한 감각과 함께 병리적 현상 역시 인색했던 김기림이 근대 도시의 이중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공간으로 도쿄의 아사쿠사(淺草)에 주목하고 있음은 흥미롭다. 아사쿠사는 김기림뿐만 아니라 당대 일본의 문인들도 관심을 가졌던 장소였는데, 특히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아사쿠사쿠레나이단(淺草紅團)』에 의해 대중적인 장소로 부각되었다. 아사쿠사는 1882년 도쿄시의 공원 정비 사업을 통해 근대도시 공원으로 계획되었지만, 1922년 관동대지진 이후 영화, 공연, 도박, 술, 매춘 등 도시의 욕망이 소비되는 유흥지로 부상되었는데 당대 일본의 에로틱하고, 그로테스크하며, 난센스한 대중문화의 중심지였다. 아사쿠사는 총 7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져 이중 제6구가 영화관이 집중된 거리였다. 6구는 처음에는 미세모노(見世物:구경거리)흥행장이 몰려있었지만, 점진적으로 영화관이 들어서면서 영화의 거리가 되었다. 아사쿠사에 몰린 영화관에는 당대 노동자들은 물론, 학생 지식인들이 외국영화에 열광했다고 한다. 김기림 역시 이 영화관들을 찾았을 것이다.
요즘 도쿄를 방문하는 여행객들은 628년에 세워진 절 센소지(淺草寺)를 아사쿠사의 중심지로 생각하지만, 센소지는 아사쿠사이고 아사쿠사는 곧 센소지이다. 주석7) 즉 성(聖)과 속(俗), 종교와 오락이 함께 존재하는, 중층적이고 역설적인 공간이 바로 아사쿠사 그 자체라는 의미이다. 센소지를 중심으로 좌측에 유흥지가 몰려 있었고 센소지 주위에는 현재도 다양한 오락 공간이 펼쳐져 있다. 센소지를 들어가는 그 길목은 참배길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 소비되는 ‘나카미세(仲見世)’ 상점가이기도 하다. 그 길을 다 걷고 나서야 절의 문에 들어설 수 있다. 세상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철저히 확인하고서야 불도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일까. 아둔한 중생으로서 도저히 알 수 없는 경지이다.
김기림이 유학할 당시 아사쿠사는 도시 빈민과 부랑자와 거지, 매춘 여성과 도둑들이 함께 기거하며 생활을 이어가는 일종의 도시 빈민시설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즉 높은 실업률과 불경기로 인한 도시 생활의 불안을 해소하는 공간으로서 아사쿠사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아사쿠사 쿠레나이단』은 혼돈의 구조를 보이는 도시를 재현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는 그의 소설이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 속에 허덕이는 도시적 삶의 생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김기림 역시 귀국 초에 아사쿠사를 배경으로 하는 「슈-르 레알리스트」 주석8) 라는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 작품의 주제의식에서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김기림의 비판적 인식을 드러낸다.
근대 자본주의의 빈곤한 도시 현실이 집적된 아사쿠사를 배경으로 홀로 춤을 추는 광대, 피에로는 바로 근대 자본주의에 저항하며 새로운 문학과 혁명을 꿈꾸는 시인, 슈르리얼리스트이며 김기림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시인의 꿈과 역할을 되새기며 김기림은 문인의 길에 들어섰으며, 그 어떤 문인보다 열정적으로 근대를 경험하면서 식민지 현실에 대응해나간 문학적 여정을 보여준 지식인이었다.
그는 그 뒤를 딸흘 수 업는 가엽슨 절름발이외다,
자본주의 제 3기의 「메리·꼬 라운드」로
출발의 전야의 伴侶들이 손목을 잇그나
그는 차라리 여기서 호올로 서서
남들이 모르든 수상한 노래에 맞추어
혼자서 그의 춤을 춤추기를 조와합니다.
그는 압니다. 이윽고 「카지노폴리」의 奏樂은 피곤해 끝이 나고 거리는
잠잠해지고 말 것을 생각지 마르세요. 그의 노래나 춤이 즐거운 것이
라고 그는 슬퍼하는 인형이외다.
그에게는 생활이 업습니다.
사람들이 모-다 생활을 가지는 때
우리들의 「피에로」도 쓸어집니다.
-「슈-르레알리스트」 부분 주석9)
1920년대 당시 아사쿠사의 유흥지로 ‘카지노 폴리’, ‘수족관’, ‘하나야시키(花やしき)’ 등이 인기가 높았다. 위의 시에도 등장하는 카지노폴리는 1899년에 개장한 수족관의 2층에 있던 공연 극장으로 아사쿠사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었다. 일본식과 서양식이 적절하게 혼융된 카지노폴리에서는 재즈송, 만담, 연극, 노래, 춤 등 다양한 볼거리가 상연되었다. 현재 수족관과 카지노폴리가 있던 곳은 거리만 남아있다. 위의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유흥지 아사쿠사의 이미지와 제재를 가져오는 한편 아사쿠사가 환기하는 근대 자본주의와 도시 빈곤의 문제를 의식하면서 문학의 방향, 시인의 임무 등을 고민하는, 전혀 간단치 않은 문제의식을 내면에 깔고 있다.
알려져 있듯이 1929년 대공황에 따라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가 등장한다. 김기림은 이를 놀이동산 하나야시키의 ‘메리고라운드’에 비유한다. 자신의 의사나 의지가 없이 돈을 넣으면 움직이는 메리고라운드,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탄 국가와 시민. 시에 등장하는 피에로 , 주석 10) 절름발이, 슈르레알리스트는 그 흐름에 동승하지 않고 여기서 홀로 춤을 추려는 시인을 상징한다. 자신의 춤이 비록 실제 생활에 기여하는 바는 없지만, 그래도 문제적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의 역사에 올라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자본주의와 근대에 대한 비판의식은 김기림 문학의 저변에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문제의식으로 보인다.
근대 자본주의의 빈곤한 도시 현실이 집적된 아사쿠사를 배경으로 홀로 춤을 추는 광대, 피에로는 바로 근대 자본주의에 저항하며 새로운 문학과 혁명을 꿈꾸는 시인, 슈르리얼리스트이며 김기림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시인의 꿈과 역할을 되새기며 김기림은 문인의 길에 들어섰으며, 그 어떤 문인보다 열정적으로 근대를 경험하면서 식민지 현실에 대응해나간 문학적 여정을 보여준 지식인이었다.
<주석1> 아오야기 유코(靑柳優子)가 편역한 『朝鮮文學の知性,金起林』 (新幹社, 2010)을 통해 김기림의 동경 체류시절에 대한 정보를 보완할 수 있었다.
<주석2> 요시카와 나기,『경성의 다다, 동경의 다다-다다이스트 고한용과 친구들』, 이마, 2015
<주석3> 김기림, 「고 이상의 추억」, 『조광』 1937.6.
<주석4> 김기림, 「찡그린 도시풍경」, 『조선일보』 1930.11.11.
<주석5> 김기림, 「도시풍경1.2」, 『조선일보』 1931.2.21~2.24.
<주석6> 미리엄 실버버그 지음, 강진석, 강현정, 서미석 옮김, 『에로틱 그로테스크 넌센스-근대일본의 대중문화』, 현실문화, 2014.
<주석7> 동일한 한자인 ‘천초(淺草)’를 지역이름으로 부를 때는 훈독을 하여 ‘아사쿠사’로 읽고, 사찰인 ‘천초사(淺草寺)’는 ‘센소지’라고 음독을 한다.
<주석8> ‘슈-르 레알리스트’라는 제목에 눈이 가는데, 이는 당대 일본 시단의 영향 속에서 탄생한 제목이다. 일본 시단 및 학계는 1920년대 중반부터 슈르리얼리즘이 장악하여 유럽의 초현실주의 선언 및 작품, 이론 등이 광범위하게 소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초현실주의 잡지가 유럽 초현실주의계에 번역 소개되었으며 당대 조선 문단에도 알려진 《시와 시론》 등의 잡지가 꾸준히 출간되었다. 김기림 역시 자신의 문학론에서 현대시의 발전과 초현실주의 관련성을 깊이 있게 논의하는데, 시인으로서의 김기림 출발의 근저에 초현실주의가 놓여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석9> 김기림, 『조선일보』 1930.9.30.
<주석10> 김기림은 시와 포에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에로의 독백’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바 있다(「피에로의 독백-포에시에 대한 사색의 단편」, 『조선일보』 1931.1.27.). 1930년대 초반 김기림은 현실 안에서의 시인의 역할을 고민하면서 피에로가 가진 상징을 시인에 투사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