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여로

포기해야 했던 식민지 청년의 꿈

소설 『사상의 월야 � 동경의 달밤들』 과 함께 걷는 식민지 청년의 길  소설 『사상의 월야 � 동경의 달밤들』 과 함께 걷는 식민지 청년의 길

일본 유학 중이던 식민지 청년의 도쿄 여정

도쿄역, 소설 속 주인공 송빈이 일본의 근대를 처음 경험한 공간
  • 도쿄역, 소설 속 주인공 송빈이 일본의 근대를 처음 경험한 공간

1936년 3월 14일, 이태준은 ‘이렇다 할 용무는 없으나 멀찌가니’ 도쿄로 가는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간다’라는 표현이 ‘길손’이라는 말보다 시제(詩題)가 되지 못하고, 왠지 ‘칸지(感じ)가 나지 않아’ 불만이라면서 그는 부산에서 시모노세키(下關)로, 시모노세키에서 오사카(大阪)를 거쳐 도쿄(東京)에 이른다. 도쿄 긴자(銀座)와 간다(神田)에서의 호화로운 서점이나 불란서풍 다방, 골동품 상가 구경이나 화가 길진섭, 김환기 등이 개최한 백만회양화전 등의 관람은 이태준에게 ‘몇 달은 잊을 수 없는 특별한 행복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귀국 후 그는 도쿄에서의 여정을 《조선중앙일보》에 「여잔잡기(旅棧雜記)」라는 이름으로 9회에 걸쳐 연재했다. 그런데 연재를 마치며 쓴 마지막 한 문장에 눈길이 간다. “동경도 가서 일주일 동안 더 있을 맛은 조금도 없었다.” 다소는 냉소적인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에게 일본, 그리고 ‘동경’이란 어떤 경험의 공간이었을까.

사실 이태준의 1936년 도쿄행은 두 번째 여정이었다. 그는 1924년 돈 한 푼 없이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이때 외롭고 가난했던 이태준의 삶은 1941년 3월부터 《매일신보》에 연재한 소설 『사상의 월야』 중, 마지막 장인 「동경의 달밤들」 주인공 송빈에게 여실히 투영되어 있다.<주석1> 근대 문물과 문화의 중심지, 도쿄에서 느꼈을 식민지 청년의 가난과 고독, 근대화에 대한 선망 의식 등은 일본에 대한 이태준의 심경을 복잡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도쿄의 풍물에 감동하면서도 식민지 지식인의 냉소적인 자의식을 내비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와세다 대학 입구
  • 와세다 대학 입구

1920년대 일본 유학생이었던 이태준의 도쿄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나 역시 그의 수필에 적힌 이야기들과 연보를 통해 그의 일본 체류 경험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때문에 『사상의 월야』를 자전적 소설로 읽으면서도 후반부인 「동경의 달밤들」에 재현된 고학생 송빈의 삶이 1926년 조치(上智)대학 입학 전 와세다대학에 체류했던 이태준의 실제 경험을 기초로 쓰였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이었다.<주석2> 왜냐하면 이 소설에 묘사된 송빈의 경험을 통해 일본에 대한 이태준의 복잡한 인식과 자의식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가 이태준과 소설 속 송빈의 도쿄 생활

나는 지난 2016년 봄 학기에 도쿄의 무사시대학에 머물면서 와세다호세인(早稻田奉仕園)에서 여는 일본어 강좌에 참여했다. 이 프로그램을 알려준 무사시대학의 와타나베 나오키 교수는 호세인과 내가 강좌를 듣는 건물인 스코트홀(Scott Hall)이 이태준이 쓴 『사상의 월야』의 공간적 배경이라고 소개해주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송빈은 “아침에는 도스까에 있는 스코트홀로 가서 베닝호프 씨의 사무실을 치워야했고 오후에는 다시 한 번 가서 그의 한문으로 쓸 편지봉투와 영어회화와 성경연구반의 프린트 등사를 맡아야 했다.” 그때의 스코트홀에서는 지금도 외국인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이루어지고 있다. 2016년의 내가 일어 강좌를 수강하던 강당과 교실은 1920년대 조선 청년들의 회합의 장소였으며, 청소와 강연 준비로 일정한 보수를 받았던 가난한 유학생 이태준의 노동 현장이었다.

스코트홀로 들어가는 입구와 오르내리는 계단, 그리고 교실과 강당 등에서 나는 쉽진 않겠지만 이태준이 그 당시 느꼈을 식민지 청년의 고뇌는 무엇이었을까 자주 헤아려보았다. 사실 도쿄에 머물면서 식민지 시기 근대문학 자료를 찾다보니 자연스럽게 그 당시 도쿄에 머물렀던 문인들이 자주 생각났다. 니혼(日本)대학을 다녔던 임화와 김기림을 비롯하여 1930년대 현대문학을 이끌었던 백석, 이상, 이태준, 윤동주까지 모두 도쿄를 거쳐 갔다. 나는 그들이 다녔을 만한 대학, 서점, 거리, 다방 등을 기웃거리면서 현해탄을 건너 도쿄까지 온 그들의 열정, 그럼에도 그 안에 도사린 슬픔 등을 상상해보았다. 그리고 「동경의 달밤들」에 재현된 식민지 유학생 송빈에게서 고상하고 세련된 문인 이태준의 내면에 가라앉아 있을 고통스런 식민지 청년의 초상을 만날 수 있었다.

차는 여기서도 밤새도록이나 가 이튿날 아침에야 횡빈을 지났다. 불탄 자리 벽돌집이 무너진 자리, 진재의 자취는 처참한 채 그냥 버려져 있었다. 이런 초토의 거리거리가 한 시간쯤 지나 모서리는 떨어지고 벽은 금이 났으나마 우뚝우뚝한 고층 건축의 밀집지구가 닥치더니 동경역이었다. 신문에서 사진을 본 기억이 있는 굉장히 긴 동경역이었다. 송빈이는 정거장을 나서니 막연하였다. 주머니 돈이라고는 톡톡 털어 일 원 육십전이었다. 마주 보이는 제일 큰 건물의 층수를 세어보고는 다시 대합실로 들어와 우선 세면소를 찾아 세수를 하였다. -----(중략) ----- 송빈이는 일비곡공원(日比谷公園)에서 이틀 밤을 잤다.

주인공 송빈의 여로는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 현관에 도착하여 도쿄행 기차를 타고 오사카와 요코하마를 거쳐 도쿄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 여정이 기술된 부분은 1936년에 쓴 「여잔잡기」의 내용과 유사하기 때문에 1941년에 소설을 쓰면서 이태준은 1924년의 기억이 아니라 1936년 도일(渡日)의 여정을 소설로 재구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24년 이태준이 도쿄역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 도쿄역 앞에는 마루 빌딩, 우정빌딩, 해상빌딩 등 높은 빌딩이 서 있었는데 소설의 주인공 송빈이 고층 빌딩의 층수를 세어보는 장면은 근대 도시의 문명과 만나는 놀라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도쿄에 도착했으나 돈도 없고 머물 곳도 없던 송빈은 히비야공원(日比谷公園)에서 이틀 밤을 잔다.

소설에서도 서술되었듯 도쿄는 여전히 1923년 간도(關東) 대지진 이후 진재의 자취와 초토화된 거리가 남아 있었고 도쿄역 인근에 있었던 히비야 공원에는 지진으로 주택을 잃은 도쿄 주민의 가설 주택이 들어서 있었다. 때문에 도쿄에 도착한 주인공 송빈이 히비야 공원에서 노숙을 했다는 이야기는 1924년 유학 당시 이태준의 실제 체험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908년 베닝호프에 의해 창립된 와세다호세인의 표지판
  • 1908년 베닝호프에 의해 창립된 와세다호세인의 표지판

히비야 공원 노숙 이후 송빈은 신문배달부로 일하다가 우연히 와세대대학 근처 벤텐초(弁天町) 지역에서 베닝호프라고 하는 와세다대학 교수이자 스코트홀에서 기독교 전도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사람의 호의로 지진 이후 비워진 와세다대학 기숙사 우애학사(友愛學舍) 방을 쓰게 된다. 소설 속에서 송빈을 도와주는 인물 베닝호프는 실제 Harry Baxter Benninghoff(1874~1949년)라는 미국인으로 1907년에 일본에 와서 스코트홀을 건축하고 와세다호세인을 창립한 인물이다. 이태준이 수필 「의무진기」에서 자신이 와세다대학에서 미국 정치사를 강의하던 B씨의 헬퍼 노릇을 했었다고 기억하는 것을 보면 소설의 베닝호프는 실제의 베닝호프를 모델로 하고 있다.

식민지 유학생의 불우한 삶의 무대

소설 속 주인공 송빈, 그리고 소설 밖 이태준의 일터였던 와세다호세인을 나와 대학에 이르는 길을 따라 걸어보았다. 와세다호세인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일백 미터 정도를 내려가 네거리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구부러진 좁은 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내려가면 정문이 없는 와세다 대학의 널찍한 입구가 왼쪽에 나타난다. 호세인부터 빠른 걸음으로 10분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이태준은 이 길을 매일 오가면서 근대 지식에 대한 자신의 지적 욕망을 의식했고 또 초라한 고학생의 현존을 자각했을 것이다.

졸업장이니 무슨 학사니 그따윈 내게 허영이다! 그들이 배우는 강의들은 반에서 필기하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인쇄된 게 얼마든지 있다. 그들이 사년씩이나 비싼 수업료를 내고 그 창창한 시일을 들어 배우는 걸 난 일 년 동안이면 죄다 읽어낼 수 있는 거다! 내가 필요한 학문을 시간과 물질에 가장 경제적이게 머릿속에 흡수하면 고만이다! 그러나 송빈이는 베닝호프 씨의 주선으로 이듬해 조대(早大) 전문부 정경과(政經科)에 입학하였다.

송빈은 베닝호프의 조수로 일하면서 틈틈이 책을 읽었고 공부를 했다. 가난한 그로서 대학 입학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젊은 청년들이 근대 지식을 배우고자 붐비는 와세다의 캠퍼스를 가로지르며 홀로 고학해야했던 송빈에겐 대학이라는 제도에 들어가 배운다는 것은 허영이요 사치에 다름 아닌 것으로 인식되었다. 말하자면 ‘無門의 門’을 건학 이념으로 내세우며 배우고 싶은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와세다대학의 입구는 가난한 식민지 청년에게는 굳게 닫힌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와세다대학 정경부(政經部)의 입학을 도와준 베닝호프의 호의는 송빈에게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와세다 대학 주변 전경
  • 와세다 대학 주변 전경

와세다대학 캠퍼스를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았지만 이태준이 다녔을 당시 정경부의 건물은 찾지 못했고 최근 새로 지었다는 현재 정경부 건물만 만날 수 있었다. 대학 입구에서 들어와 오른쪽 골목으로 걸어 들어가면 와세다대학의 정경부 건물이 위치해 있다. 정경부에 아는 교수가 있어 건물 내부와 연구실 등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건물의 외양이나 내부가 캠퍼스 안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또 와세다대 입구로 들어와 바로 왼쪽에 아이즈 박물관(Aizu Museum, 會津八一記念博物館)이라 이름 붙은 박물관이 눈에 띈다. 이 건물은 1925년에 도서관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이태준이 와세다에 머문 기간이 1924년에서 26년까지였음을 고려하면 그 역시 이 도서관을 이용했을 것이다.

아이즈 박물관
  • 아이즈 박물관

와세다 대학을 떠나다 - 송빈

소설에서 베닝호프는 자신이 후원하는 고학생 중에서 송빈을 가장 총애하여 마치 자기 아들처럼 여겼고, 항상 곁에 두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소설의 말미에서 송빈은 조선 청년들의 회합 장소로 스코트 홀을 빌려주지 않으려는 베닝호프와 부딪히게 되면서 그를 떠난다. 베닝호프는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줄 테니 일본으로 돌아와 스코트홀 사업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하며 송빈에게 조선 청년 모임과 멀리할 것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송빈이는 고개를 떨구었으나 오래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절 그렇게까지 유망히 봐주시는 덴 감사합니다. 그러나 유감입니다만 지금 말씀하신 모든 게 제 자신에겐 무의미합니다.” “무의미!” 베닝호프 씨는 붉은 눈알이 솟으며 두 손을 두 바지 포켓에 찌르며 일어섰다. “그런 계획으로 절 도와주신 거라면 이미 받은 은혜만 해두 저로선 갚을 길이 없는 부채올시다. 더 적당한 사람을 골라 이 자리에 쓰시기 바랍니다.” 이리하여 송빈은 다시 앞길이 막연하나 이날 저녁으로 스코트홀에서 나와 버리고 말았다.

와세다 대학을 떠나다 - 이태준

1927년 이태준이 중퇴한 조치 대학의 정문
  • 1927년 이태준이 중퇴한 조치 대학의 정문

구마키 쓰토무 교수가 찾은 정경부 학적부에 의하면 이태준은 1925년 4월에 청강생으로 입학하여 1926년 5월에 제적한 것으로 기입되어 있다. 소설에 기대어 이태준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베닝호프와 스코트홀을 빌려주는 문제로 갈등이 생겼고 이 일로 학비를 조달할 수 없어 와세다대학을 떠나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송빈의 앞길, 즉 이태준의 앞길은 막연했다. 그러나 송빈은 소설 속에서 식민지 ‘조선 청년 중의 한 사람’임을 자각하며 스스로의 길을 다시 선택한다. 새로운 인생의 여정에 그는 다시 들어선 것이었다.

그토록 열망했으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꿈이었기 때문일까. 이태준은 어느 글에도 자신이 와세다대학에 청강생으로 있었던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이태준은 1927년 조치(上智)대학에 입학했다가 같은 해 중퇴하고 귀국하여 조선의 문장가로 우뚝 섰다.

<주석1> 1946년 을유문화사에서 발간한 『사상의 월야』에는 마지막 장 「동경의 달밤」이 빠져 있다. 깊은샘에서 1988년 『이태준전집』을 내면서 이 부분을 다시 게재했다. 이 글에서는 2015년 소명출판에서 발간한 이태준전집 중 『사상의 월야, 해방전후』를 인용했다.

<주석2> 이태준의 도쿄 체류 시절에 관심을 갖는 내게 하타노 세쓰코 교수(니가타현립대학)와 와타나베 나오키 교수(무사시대학)는 2008년 일본의 한국문학 연구자들이 와세다대학 주변 조선인 유학생의 하숙집 주변을 탐방했던 「文學散步- 李泰俊 『思想の月夜』の舞台と早稻田留留生下宿跡探訪」(2008.5.4.) 자료를 흔쾌하게 내주었다. 또 탐방자 중 구마키 쓰토무(후쿠오카 대학) 교수가 쓴 「李泰俊の日本體驗--長編小說 『思想の月夜』の「東京の月夜」を中心に 」(『朝鮮學報』 216집, 2010.7.) 논문 역시 알려주었다. 이 두 분의 도움으로 일본에서의 이태준의 삶에 다가갈 수 있었다. 이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한편 구마키 쓰토무 교수는 당대 역사적 자료들의 고증을 통해 이태준과 소설 속 주인공 송빈의 유사성을 찾았는데 특히 이태준의 와세다대 학적부를 찾음으로써 이태준이 조치(上智)대학 입학 전 와세다대 정치경제과를 다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김진희_평론가,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인문과학원 교수.
평론집 『시에 관한 각서』 『불우한, 불후의 노래』 『기억의 수사학』 『미래의 서정과 감각』, 저서 『생명파시의 모더니티』 『근대문학의 장(場)과 시인의 선택』 『회화로 읽는 1930년대 시문학사』 『한국근대시의 과제와 문학사의 주체들』 등

이태준_소설가. 1904년~미상
소설 『달밤』 『가마귀』『이태준 단편선』 『이태준 단편집』『해방전후』 『구원의 여상』 『화관』 『청춘무성』 『사상의 월야』, 수필집 『무서록』, 문장론 『문장강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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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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