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문학 기행

시인들의 시인 사슴의 시인 백석

다큐 문학 기행 : 분단으로 잃어버린 시인 - 백석 다큐 문학 기행 : 분단으로 잃어버린 시인 - 백석

1938년 한 청년이 경성 청진동 골목에 어느 집 대문을 두드린다. 청년은 여인에게 누런 미농지 봉투를 건넨다. 그 안에는 여인이 평생 잊지 못할 시 한 편이 담겨있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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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민족의 정서를 노래하다

다큐 문학 기행 : 분단으로 잃어버린 시인 - 백석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
훤칠한 외모에 큰 키, 검은 곱슬머리와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의 깔끔한 옷차림. 조선 최고의 모던보이였던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 그는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한국어를 가르치던 오산고등학교를 졸업한 백석은 집안형편상 대학진학이 어려웠다. 하지만 동향인 조선일보 사주 일가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오고 이후 19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발표하며 등단까지 하게 된다.


“백석이 가장 닮고 싶었다는 시인이 김소월입니다. 김소월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한국사람들의 가슴에 담겨있는 정조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겁니다.” 곽효환 l 시인, 대산문화재단 사무국장
백석의 문학적 감수성에 불을 지폈던 것은 바로 오산학교 7년 선배 김소월이었다. 생전에 그를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백석은 소월을 깊이 흠모했다. 백석의 고향은 곧 소월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백석의 시에는 소월이 그랬듯 향토색 짙은 민속어를 통해 질박하고 정감 있는 우리의 일상과 민족혼을 담아내고 있다.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모닥불, 백석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모여 따뜻한 모닥불을 피우는 이 어울림을 통해 백석은 일제 치하와 근대화를 비판하고 우리고유의 정서가 배어있는 삶의 따스함 진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전하기도 했다.

시인들의 시인

다큐 문학 기행 : 분단으로 잃어버린 시인 - 백석
백석의 시집 사슴 초판본
스물 다섯 살이던 1936년 1월, 백석은 시집 <사슴>을 백부 한정판으로 발간한다 이 시집은 금새 동이 났고 당시 백석보다 다섯 살 어렸던 시인 윤동주 역시 이 시집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다 겨우 빌려 필사해 곁에 두었다고 한다. 백석은 사슴 한 권으로 시인들의 시인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사슴을 처음 읽던 흥분을 잊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읽고 또 읽었다. 저녁밥도 반사발 밖에 먹지 못했으며 밤도 꼬박 새었다.” -신경림
“백석 시를 배끼기 위해 시를 써 왔다.” -안도현


그리고 시집 사슴을 낸 그 해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하며 운명적인 만남을 맞이한다.

시인, 나타샤와 사랑에 빠지다

다큐 문학 기행 :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
백석와 나타샤
문학적 재능이 두드러졌던 엘리트 지식인이지만 집안의 파산으로 기생이 되었던 스물 두 살의 김영한을 만났던 것이다. 김영한은 백석을 처음 만난 일을 이렇게 묘사했다.

“단 한번 부딪힌 한 순간의 섬광이 바로 두 사람의 영원한 사랑의 시작이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매듭이 없는 슬픈 사랑의 실타래는 이미 그때부터 풀려가고 있었다.” -내사랑 백석, 김영한

그녀에게 지어준 아호는 자야(子夜). 자야는 후에 자신이 일궈온 요점 ‘대원각’ 등을 시주해 서울 성북동 사찰 길상사를 탄생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그의 유명한 시에 나오는 것처럼 둘은 눈이 푹푹 쌓인 길을 오고가며 사랑을 나누곤 했다. 하지만, 백석은 부모의 독촉으로 억지 결혼을 해야 하는 조선의 사내이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을 벗어나 자야와 함께하고 싶었던 백석은 그녀에게 만주로 떠나 자유롭게 살 것을 제의하는데 끝내 자야는 그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경성으로 떠나버린다. 그렇게 백석은 만주로 자야는 경성에 남게 되면서 잠깐의 이별은 전쟁의 분단으로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만다.

시인, 만주를 떠돌다

다큐 문학 기행 : 분단으로 잃어버린 시인 - 백석
백석이 살았던 일제강점기
백석은 일제 강점기 암울한 시기를 보내면서도 당시 시인으로선 드물게 친일시를 쓰지 않았다. 그가 만주를 떠돈 것도 그런 이유였는데. 세관원 측량기사, 중국인의 소작농으로 전전하며 오직 시 쓰기에만 매진했다고 전해진다.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긴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된 마지막 ‘문장’지 4월호에 발표된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 의 한 구절.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는 특히 당대 시인들이 느꼈던 무력감을 표현해 시인을 위해 쓴 노래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시인, 고향에 묻히다

다큐 문학 기행 :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
백석의 노년 모습
1945년 해방 이후 백석은 어머니가 계신 고향 평안도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월남하지 않고 그 곳에 머무르는데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
백석의 시가 남한의 잡지에 마지막으로 발표된 것은 1948년 10월. 을유문화사에서는 시집출간을 예고했으나 남북으로 오가며 백석의 원고를 전해줬던 친구 허준이 월북하면서 결국 시집은 출간되지 못한다. 이후 백석은 우리문학사에서 사라진 이름이 되었고 1988년 납월북 문인에 대한 해금이 이루어진 후에야 우리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백석이 일제강점기에 친일 시를 쓰지 않았던 것처럼 북한 땅에서 정치적인 목적의 시를 쓰고 싶진 않았던 것일까. 백석은 그 뒤로 시를 쓰지 않았고 1950년대 중반 압록강 인근으로 추방당한 채 협동농장에서 생활하다 1996년에 생을 마감한다.

한편, 백석이 죽은 후에도 그를 잊지 못한 자야는 평생 모은 돈 1000억원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했다. 그때 기자의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1000억원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요.” -김영한(자야)
다큐 문학 기행 : 분단으로 잃어버린 시인 - 백석
“시인은 진실로 슬프고 근심스럽고 괴로운 탓에 이 가운데서 즐거움이 그 마음을 왕래하는 것입니다.” -백석

백석이 말하길 시인은 온갖 슬프지 않은 것에도 슬퍼할 줄 아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으로 슬픔으로 마음이 가득 찰 때 백석의 시 한 줄을 꺼내 읽으면서 위로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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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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