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석에 서있는 남자에게 판사 윌슨은 자신이 다루었던 중 최악의 사건이라 덧붙이며 유죄를 선언한다.
수인번호는 C.3.3. 열여섯 살 어린 남성과의 사랑을 이유로 강제 노동을 포함한 징역 2년을 선고 받은 남자. 그는 바로 유명 극작가이자 소설가, 동화작가이자 비평가였던 오스카 와일드다.
*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평범함을 거부했던 괴짜 작가
1854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오스카 와일드는 안과의사이자 고고학자였던 아버지와 시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그리고 스무 살에 옥스퍼드대에 진학한다.
“내가 유명해질 수 없다면 악명이라도 떨치고 말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어로 하는 유미주의를 지향했던 오스카 와일드는 일상에서도 남다른 옷차림을 즐겼다. 190센티미터의 큰 키에 블랙 벨벳코트와 승마바지 실크스타킹과 에나멜 가죽구두 그리고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은 어딜 가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수많은 명언을 남긴 와일드는 화려한 재담으로 사람들을 흐뭇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과 철학으로 동시대인들에게 지탄도 많이 받았다. 당시 미국과 캐나다 순회강연을 가며 세관에 했다는 이 말은 와일드의 재치와 함께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을 보여준다.
“신고할 것이라고는 내 천재성 밖에 없소”
그런 그였기에 <행복한 왕자>라는 단편집과 희곡으로 유명해져서도, 작가로서보다는 언론에 오르내리는 인사로 더 유명세를 치렀다. 그러다 1891년 처녀작이자 유일한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희곡 <살로메>를 발표하면서 일약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영혼의 거울,<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는 화가 바질이 그려준 초상화를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에 눈뜨고 그것이 사라질까 두려워한다.
“난 언제나 젊고 이 그림이 대신 나이를 먹을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뭐든지 바칠 텐데!”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中 >
그의 바람대로 악행을 저지로고 타락을 해도 그의 얼굴만은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고,대신 초상화의 얼굴이 늙고 흉해지게 된다.
“초상화의 얼굴은 약간 달라진 것처럼 보였다. 표정이 달랐다.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中>
이후 영혼을 타락을 들킬까 우려하던 도리언 그레이는 급기야 화가 바질을 죽이는 살인까지 저지르고 끝내 자신의 초상화를 칼로 찌른 뒤 그 역시 최후를 맞이한다. 이 작품은 오스카 와일드의 생애와 가장 많이 닮은 작품으로 꼽힌다.
금지된 사랑의 시작
서른 일곱 살, 두 아이의 아빠이자 한 여자의 남편이었던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완성한 그 해 여름 동성 연인인 앨프리드 더글러스를 만난다.
“그 존재만으로도 그토록 매혹적이어서, 내가 허용하기만 한다면 나의 본성과 나의 영혼 전부를, 나의 예술 자체를 다 빨아들이고 말 누군가와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中>
와일드는 자신의 마지막 사랑이자 예술작품의 뮤즈가 되어준 더글러스를 만난 이후, 문학 인생에서도 화려한 절정을 맞이하지만, 4년 후 곧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1895년 4월 6일 오스카 와일드 동성애 혐의로 체포
더글러스의 아버지 퀸스베리 후작은 그에게 공개적으로 동성애자라 고발하겠다는 위협을 가했고 와일드 역시 맞고소로 대응했다. 이렇게 해서 영국과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와일드의 재판이 열리게 된 것이다.
“문학은 언제나 삶을 앞지르지. 삶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빚는 거야.” <거짓의 쇠락 中>
재판 결과 와일드는 유죄를 선고 받고 작가로서의 영광과 명예, 그리고 자신의 전 재산을 잃은 채 수감 생활을 시작한다.
오스카 와일드가 끝까지 바라본 별
“비록 우리 모두 시궁창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들 중 누군가는 별을 바라보고 있다.” <원더미어 부인의 부채 中>
감옥에서 14개월 동안 글을 쓰지 못한 와일드에게 새로 부임한 교도소장은 펜과 종이를 허락한다. 문학에 1인칭은 없다고 주장했던 그의 최초의 자기고백이자 더글러스에게 보낸 연애편지이기도 했던 <심연으로부터>는 바로 여기서 탄생한다.
힘든 수감생활 중에도 와일드는 문학과 사랑이라는 별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감옥생활 중 사랑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내와 자식들은 와일드라는 성을 버렸다.
아이들을 유독 사랑했던 와일드에게 자녀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그가 받은 가장 큰 벌이 아니었을까. 그가 쓴 유명 동화집 행복한 왕자도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며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왕자의 이야기. 이것은 19세기말 물질주의가 만연한 영국사회를 비판해 동화 중에 걸작이라는 격찬을 듣기도 했던 작품이다. 2년간 옥살이를 끝내고 출소한 와일드는 더 이상 영국에 머물 수 없어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그곳에는 연인 더글러스가 있었지만 둘의 사랑은 이내 식었고 돈도 사랑도 잃은 와일드는 가난에 시달리다 1900년 수감생활에서 얻은 지병으로 세상에서 잊혀진 채 죽음을 맞는다.
오스카 와일드, 예술작품으로 남다
그는 사망한지 한 세기만인 1998년 다시 런던으로 돌아온다.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와일드의 동상이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2017년 1월 31일 영국에서 동성애 금지법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남성 동성애자들을 사면하는 새로운 법이 시행되고, 사후 사면을 적용 받은 5만여명에 오스카 와일드도 이름을 올렸다.
파리 페르자셰즈에 있는 와일드의 묘비는 금지된 사랑으로 형벌을 받았던 와일드에게 보내는 수 많은 여성 팬들의 키스자국으로 뒤덮였다. 무덤의 훼손을 막기 위해 2미터 높이의 투명 플라스틱 보호막이 설치된 이후에는 방문객들이 아름다운 꽃으로 그를 추모하고 있다.
“내 삶은 한 편의 예술작품과도 같습니다” <심연으로부터 中>
그 어떤 예술작품만큼 화려했던 그의 삶과 작품은
묘지를 뒤덮은 수십만 개의 키스와 꽃처럼 강렬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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