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역사

편견없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선택의 역사 : 편견 없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하여
선택의 역사 : 편견 없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하여

현대 사회에서의
장애인 차별

최근 장애인 특수학교 건립을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거세다. 특히 공립 특수학교 신설 토론회에서 장애 학생 어머니가 무릎을 꿇은 채 특수학교 설립을 호소하는 장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특수교육을 받아야 하는 국내 장애학생은 8만9353명에 달한다. 그러나 특수학교가 턱없이 부족해 이들 중 28%(2만5789명)만이 특수학교에 다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근에 특수학교가 없어 일반 학교에 진학한 장애인 학생은 제대로 된 학습지도를 받지 못하거나 동급 학생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자치구에 특수학교 신설 문제가 대두 될 때마다 찬반 대립이 심하게 일어난다. 이처럼 장애인과 그들의 부모는 똑같이 이 사회의 구성원 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배려와 이해를 부탁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인권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사회적 차별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 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개인의 이익 앞에 공동체 정신은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전통사회에서는 장애인들을 어떻게 바라 봤을까? 신분제 사회 속에서 수많은 차별이 존재 했던 조선시대였지만 적어도 장애인에게 만큼은 사회적으로 차별적인 시선이 존재하지 않았다.

차별이 아닌 돌보아
주어야 할 대상으로 보다

장애인의 사전적 의미는 신체의 일부에 장애가 있거나 정신 능력이 원활하지 못해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장애인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매우 위독한 병에 걸린 사람이라는 뜻의 독질인(篤疾人), 몸에 질병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의 잔질인(殘疾人), 고칠 수 없는 병을 가진 사람이라는 폐질인(廢疾人)이라고 분류했을 뿐이다. 조선시대에는 장애를 그저 하나의 질병으로 여겼던 것이다. 조선의 장애인은 가족 부양이 원칙이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친척, 마을에서 지원을 해주었고 국가에서도 이들을 위해 복지혜택을 제공했다.

조선시대 장애인은 조세, 부역 등을 면제 받았고 죄의 처벌에 있어서도 연좌제의 적용을 받지 않았고, 형벌을 받는 대신 면포를 내는 등 혜택을 받았다.

“부모가 나이 70세 이상이 된 사람과 독질이 있는 사람은 비록 나이 70세가 차지 않더라도 시정(侍丁)* 한 사람을 주고, 만약 여러 아들이 먼저 죽었으면 여러 손자 가운데서 시정 한 사람을 주고, 친손자가 없으면 외손자에서 시정 한 사람을 주고, 외손자가 없으면 조카와 종손 가운데서 시정 한 사람을 준다.”

- “세종실록” 57권, 14년 8월 29일 을묘 1번째 기사 ?

* 시정 : 조선시대 나이가 많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군역에서 면제된 사람

또한 장애인 중에 생활이 궁핍하여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사람은 지방 관청에서 우선적으로 이를 구휼하도록 하였다. 특히 세종은 장애인들의 구휼과 자립을 위한 정책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흉년이 들었을 때 마을에 사는 병자, 장애인 중 굶어 죽는 자가 없게 할 것을 수령에게 엄하기 지시하기도 했다.

명통시와
관현맹인의 운영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장애인에 대한 구휼뿐만 아니라 장애인의 자립을 위한 제도도 마련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명통시의 설치와 관현맹인의 운영이 그것이다.

조선 최초 장애인 단체인 명통시에는 서울 5부의 시각장애인이 모여 활동하였으며 한 달에 두 번씩 경문을 외며 나라의 안위를 빌고 기우제를 관장하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명통시에서 시각장애인들이 돈을 받고 점을 쳐주거나 경을 읽어주는 매복독경에 대한 대가로 정기적으로 쌀, 콩, 베를 지급하였고 노비나 건물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관현맹인은 조선시대 음악 기관에 소속되어 궁중의 잔치 때 악기를 연주하던 시각장애인을 뜻하는데 시각 장애가 있는 음악인들을 장악원에 소속시켜 연주를 맡기고 대가로 녹봉을 지급하였다.

“관현의 음악을 맡은 장님은 모두 외롭고 가난하여 말할 데가 없는 사람들로서 …… 옛날의 제왕은 모두 장님을 사용하여 악사를 삼아서 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는 임무를 맡겼으니, 그들은 눈이 없어도 소리를 살피기 때문이며, 또 세상에 버릴 사람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미 시대에 쓰임이 된다면 또한 그들을 돌보아 줄 수 있는 혜택이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 “세종실록” 54권, 세종 13년 12월 25일 병진 5번째 기사 ?

불편함보다는
능력을 바라보다

조정에서도 능력이 출중하다면 등용 시 장애여부는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다. 명재상이라 평가 받는 이들 중에는 신체적 장애가 있었던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조선 초기 태조에서 세종까지 4명의 왕을 모시고 이조판서, 좌의정, 우의정을 두루 거쳤으며 건국 이후 통치체제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역할을 한 명재상 허조는 등이 굽어있는 척추 장애인이었다. 허조는 왕에게도 간언을 서슴치 않을 만큼 강직했으며 먹는 것과 입는 것 모두 최소한의 것만 취하는 등 매우 청렴했다고 한다. 특히 허조는 세종 대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판서로서 세종이 민본정치를 펼쳐나가는데 필요한 인재 육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세종 실록에만 허조에 관련된 기록은 약 800건에 달하지만, 그의 신체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허조라는 사람은 그저 능력있는 관리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 중기 선조 때부터 인조 때까지 재상을 지낸 이원익은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병을 토벌하였으며 이후에는 사태를 수습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원익은 키 작은 정승으로 불리었는데 선천적으로 왜소증이 있어 키가 1m가 조금 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광해군이 즉위한 후 영의정을 맡아 전쟁복구와 민생 안정책으로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적극적으로 간언하였다. 또, 이괄의 난 때는 78세의 나이에도 왕을 공주까지 호위하였고, 정묘호란으로 사태가 급박해지자 80세가 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세자와 왕을 호위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영조 때의 이덕수는 성균관의 대사성, 홍문관 대제학, 이조 판서까지 지낸 인물로 문장에 능하고 글씨가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귀가 매우 어두운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1738년 영조는 청나라에 파견할 외교관(동지정사)으로 도승지 이덕수를 임명하였다. 이에 사헌부에서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엉뚱한 대답을 할 수 있다며 이덕수는 적임자가 아니라며 반대한다. 그러나 영조는 어차피 중국어는 우리나라 말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건 같다며 문제될 것이 없다 말한다.

대사헌 이수항이 아뢰기를 "동지 정사 이덕수는 문학에 있어서 매우 뛰어나지만, 다른 나라에 가서 물음에 답하는 일은 아마도 그 적임자가 아닐 듯합니다. 만약 뜻밖에 말을 주고받을 일이 생길 경우가 이는 진실로 염려스러우니, 마땅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하였다. 대개 이덕수는 귀가 어둡기 때문이었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중국어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모두 귀머거리인데, 어찌 이를 병폐로 여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 “영조실록” 47권, 영조 14년 10월 15일 갑오 2번째기사 -

이처럼 조선 시대에는 장애에 대한 선입견이 거의 존재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구분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사는 사회를 위한 다양하고 구체적인 정책도 함께 제시되었다.

선택의
역사 결론

차별 아닌 공동체 정신의
필요성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는 헌법 조항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평등’이라는 가치가 보편타당한 권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 약자들은 또 하나의 계급으로 분류하고 그들을 절벽 끝으로 몰아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수많은 다름이 존재하고 있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차별적으로 대할 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차별은 사회의 균열을 만들고 그 균열로 인하여 결국 사회는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하게 된다. 약자 보호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잘 살기 위해 역사에서 보여주고 있는 공동체 정신을 되새길 필요가 있는 시점이다.

최태성

최태성

강사

모두의 별★별 한국사 연구소장
KBS 한국사 패널, 중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및 역사부도 집필, EBS 평가원 연계 교재 집필 및 검토
2013년 국사편찬위원회 자문위원, 2011~2012년 EBS 역사 자문위원
MBC <무한도전> '문화재 특강' 진행, KBS 1TV <역사저널 그날> 패널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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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09-28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