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입니다. 대학에 입학하면 입시 스트레스에 벗어나 낭만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취업이 하늘의 별따기인 요즘 고3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학점 관리에도 소홀 할 수 없고 틈틈이 자격증 공부도 해야 하기 때문이죠. 방학에도 영어공부 등 외국어 공부에 쉴 틈이 없습니다. 취업이 안 돼서 남들보다 뒤처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스트레스가 너무 심합니다.”
현대인은 다양한 스트레스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학업, 취업, 육아, 업무 등 다양한 스트레스에 직면하게 되고 뿐만 아니라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을 패배자로 인식하는 사회적 풍토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있다.
과연 스트레스는 현대인의 전유물일까? 과거에도 스트레스는 존재했다. 특히 극한직업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조선시대 왕은 과중한 업무와 보위에 대한 불안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선비들은 과거 합격과 입신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고 현모양처를 강요 받았던 여성들 역시 그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다. 과연 역사 속 사람들은 어떻게 스트레스를 극복하였을까?
정조는 아버지가 할아버지 영조의 기대를 이기지 못하고 광증에 이르고 결국 죽음을 맞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이는 분명 어린 정조에게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다. 또한 왕위에 올라서도 자신을 견제하는 세력들에게 끊임없이 위협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이 또한 일반인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만약 정조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면 아버지 사도세자와 같은 길을 겪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조는 아버지와는 달랐다. 즉위 후, 정조는 정사에 대해 한시도 생각을 놓지 않았으며 매일같이 있는 신하들의 정무 보고를 폐한 적이 없었다. 항상 밤 깊은 줄을 모르고 정무에 힘썼으며 항시 나랏일에 대해 생각하여 궐문이 열리기도 전에 명령이 내려지는 것이 보통의 일이었다고 한다.
정조는 "정사에 부지런하고 백성들을 걱정하고 하여 자기 직분만 다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라고 생각하는 임금이었다. 그는 오직 왕의 백성을 위한 왕의 직분만을 생각하며 달려 나갔던 것이다. 다른 곳에 눈 돌리지 않고 오로지 더 나은 조선을 만들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았던 정조. 그의 이러한 집중력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자신을 견제하는 세력들에 대한 스트레스를 이기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군주로서 수많은 개혁을 추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퇴계 이황은 율곡 이이와 함께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로 평가 받고 있다. 당시 청년들은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삼아 공부에 전념 하였고 입신 후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 불리우는 재상 자리에 오르는 것을 가문에 큰 영광으로 여겼다.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로 평가 받고 있는 이황은 과거에 3번이나 낙방한다. 하지만 그는 이것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초조해 하지 않았다. 이황은 33세라는 늦은 나이에 대과에 급제 후 승문원의 다양한 직책을 역임하고 시강원 문학, 성균관 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퇴계는 중년에 접어들며 건강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나겠다는 상소를 거듭한다. 그가 진정 바란 것은 벼슬보다는 학문을 탐구 하는 것이며 학문적 성취를 행복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황이 성리학에 연구에 몰두한 궁극적인 목적은 “성리(性理)로 마음을 바르게 하여 보편적 선(善)을 추구하기 위함”이었다. 이황은 성공이나 출세에 목적을 둔 공부가 아닌 티끌과 욕망이 없는 순백의 도덕세계, 즉 성인의 경지에 오르기 위한 공부를 한 것이다. 세상이 정한 성공에 연연하지 않고 내면적 성취에 집중한 이황. 결국 이황은 성리학 연구에 있어 주희에 버금가는 경지에 이르렀으며 동방의 주자라 추앙 받게 되었다.
조선시대 여성들이야 말로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대상일 것이다. 조선 시대 여성은 남성에 종속된 존재로서 아들을 낳아 집안의 대를 잇고, 남편의 과거 급제를 위해 집안 경제를 책임져야 했으며 수도 없이 많은 집안 제사를 준비해야 했다. 조선 중기 화가이자 율곡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처지도 위와 다르지 않았다. 신사임당의 비해 집안이 보잘것없었던 이원수는 신사임당과의 결혼을 통해 집안이 안정되자 비로소 과거를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학문에 뜻이 없던 이원수는 계속 과거에 낙방하며 나이 오십이 되도록 백수 생활을 하게 된다. 이것도 아내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었을 텐데 이원수는 이에 더하여 주막집 아낙을 첩으로 두기까지 한다. 이원수는 오십이 넘어서야 겨우 수운판관이라는 하급관직을 맡게 되었다. 남편이 벌이가 없으니 집안 경제는 집안 경제와 자녀교육은 모두 신사임당의 몫이었다.
신사임당은 친가와 외가 모두 명망 있고 유복한 집안이었다. 또한 신사임당에 대한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랑이 매우 각별하였기 때문에 그는 아주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랬던 신사임당의 삶이 이원수를 남편으로 두게 되면서 180도 바뀌게 된 것이다. 아마도 신사임당은 남편으로부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그는 어떻게 스트레스를 이겨냈을까?
신사임당은 어릴 때부터 그림과 글 솜씨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신사임당은 고단한 생활 속에서도 틈틈이 시를 적고, 그림을 그리는 등 예술적인 활동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자녀가 반듯하게 자라주는 것도 신사임당의 기쁨이었겠지만 그림과 시는 그에게 또 다른 해방처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비관하기보다 비록 여성이지만 집안을 이끌어 나가고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재주를 펼쳐나간 신사임당. 그는 천재화가로 칭송 받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대학자 율곡 이이를 길러낸 어머니라는 수식어까지 얻게 되었다.
스트레스는 대부분 타인과의 비교에서 얻어지는 것이 많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과 기준에 맞추어 살다 보면 자아의식이 약해지고 무기력함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만의 삶의 기준과 목표를 세우고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정진하다 보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내면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조와 이황, 신사임당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최태성
강사
모두의 별★별 한국사 연구소장
KBS 한국사 패널, 중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및 역사부도 집필, EBS 평가원 연계 교재 집필 및 검토
2013년 국사편찬위원회 자문위원, 2011~2012년 EBS 역사 자문위원
MBC <무한도전> '문화재 특강' 진행, KBS 1TV <역사저널 그날> 패널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