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궁궐 안의 그리스 신전
분수대가 있는 계단 아래 서서 석조전을 올려다보면 딱 한 가지 생각이 듭니다. ‘왜 그리스 신전이 창덕궁에 있는 거지 ’라고요. 돌로 지은 집이라는 뜻의 석조전은 정말로 아테네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 신전을 닮았습니다. 그것은 그리스의 건축양식이 로마를 통해 유럽으로 이어졌고, 근대화를 시도한 대한제국이 그대로 도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무와 기와로 구성된 한옥들로 가득한 궁궐 안에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만든 서양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석조전이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석조전은 당시 대한제국 해관의 총 세무사로 일하고 있던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로 지어졌으며 설계는 모두 영국인들이 맡았습니다. 내부에서 사용할 가구들 역시 영국의 메이플사 제품이라 한 마디로 영국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1900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해서 1910년에 완공된 건물로 원래 계획대로라면 고종 황제와 황후가 머무는 공간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1905년의 을사늑약을 거쳐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국권을 빼앗기면서 석조전은 주인을 잃고 맙니다. 이후 다른 용도로 사용되던 석조전은 2009년부터 복원을 시작해서 2014년 가을, 마침내 대한제국 역사관으로 우리 곁에 다시 다가왔습니다.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 자료와 가구를 공급했던 영국 메이플사의 카탈로그를 통해서 내부 구조를 거의 복원해낸 것이죠. 이곳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인터넷을 통해서 사전 예약을 해야만 합니다. 한번에 15명만 들어가서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서 움직이기 때문에 천천히 둘러볼 수 있는데요. 일반 관람의 경우 대략 45분 정도가 소요됩니다. 자, 이제 계단을 올라가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중앙 홀과 귀빈 대기실
외곽의 모습이 고대 그리스 신전이라면 내부의 모습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것 같은 근대 유럽의 궁궐과 그대로 닮아있습니다. 실제로 18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유럽의 궁궐을 그대로 재현해냈기 때문인데요. 여러 차례 들어가본 저도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설 때 마다 놀라고 합니다. 너무 화려하고 아름답기 때문이죠. 대리석으로 만든 기둥과 벽난로는 물론이고 벽에는 온통 금박으로 된 장식이 붙어 있습니다. 로비 같은 역할을 하는 중앙 홀의 정면에는 접견실이 있고, 좌측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탁자와 의자가 있습니다. 원래 이곳에 있다가 창덕궁의 희정당으로 옮겨진 것을 복원 과정에서 다시 가져온 것이라고 합니다. 처음 석조전을 만들 때부터 있던 몇 개 안 남은 가구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일본에 강제로 유학 중이던 영친왕 이은이 잠시 귀국했을 때 이곳을 숙소로 사용했는데 그 때 찍은 사진을 통해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중앙 홀의 오른편에는 귀빈 대기실이 있습니다. 황제를 알현하러 온 손님들이 기다리던 곳인데요. 그들은 이곳에서 기다리면서 황실에서 제공하는 비스킷과 샴페인, 커피 등을 마셨다고 합니다. 중앙홀 못지 않은 화려한 금박으로 장식된 벽과 대리석으로 된 벽난로가 보입니다. 원형 테이블과 긴 의자, 그리고 난방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라디에이터가 눈에 띕니다. 의자에 있는 쿠션에는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벽에 붙은 거울의 테두리도 금박으로 입혀져 있는데 사람이 쓰기에는 다소 높은 곳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해설사는 장식적인 의미와 햇빛을 반사해서 조명처럼 사용하려는 목적 때문이라고 설명해줬습니다. 귀빈 대기실 옆에는 작은 전시실이 있는데 석조전과 대한제국에 관한 짤막한 설명이 담겨있습니다. 특히 이곳에 있는 석조전의 모형이 있어서 눈길을 끕니다. 예전에는 건축물을 만들기 전에 모형을 미리 만들었다고 하네요. 덕분에 석조전의 지붕과 뒤쪽까지 상세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황제와 황후의 침실
1층을 둘러보고 대리석으로 된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 봅니다. 2층에는 황제와 황후가 머물던 침실과 서재, 그리고 욕실로 추정되는 공간이 있습니다. 황제의 침실은 온통 노란색입니다. 침대의 지붕과 커튼은 물론이고 방 전체가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기 때문인데요. 노란색은 황제를 상징했기 때문에 침실을 이렇게 꾸몄다고 합니다. 침대와 가구들은 모두 영국 메이플사 제품으로 해당 회사의 카탈로그를 참조했다고 합니다. 침실 옆에는 서재가 딸려있는데 역시 노란색입니다. 다행히 서재는 찍어놓은 사진이 있어서 복원이 쉬웠다고 합니다.
바로 옆에 있는 황후의 침실과 서재는 모두 자주색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황후를 상징하는 색깔이라고 합니다. 벽에는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이 새겨진 금박 장식이 붙어있고, 커튼에도 새겨져 있습니다. 침실의 커튼과 침대 시트 역시 자주색으로 치장되어 있어서 눈길을 확 잡아 끕니다. 맞은편에는 욕조와 변기, 세면대가 갖춰진 공간이 보입니다. 원래 용도를 알 수 없었는데 방수 공사가 되어 있는 것을 토대로 추정했다고 합니다. 욕조에 걸린 수건에 자그마한 오얏꽃 무늬를 보고 잠깐 웃음이 나왔습니다.
2층 발코니와 1층 대식당
침실과 서재를 둘러본 다음에는 2층 복도로 나올 수 있습니다. 1층과 2층이 트여 있기 때문에 아래층이 잘 내려다 보입니다. 그냥 내려다봤을 때는 몰랐는데 좀 떨어진 곳에서 보니까 바닥의 기하학적인 무늬가 일정하게 새겨진 것이 눈에 들어오네요.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오면 저절로 탄성이 나옵니다. 기둥 사이로 보이는 멋진 바깥 풍경 때문인데요. 원래는 외국에서 가져온 꽃과 나무를 심었다가 연못을 조성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38년에 석조전의 오른쪽에 미술관을 지으면서 지금의 형태로 바꿨다고 하네요.
석조전의 왼편에는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과 고종이 막내 딸인 덕혜옹주를 위해 유치원으로 이용했던 준명전이 보입니다. 한옥으로 이뤄진 궁궐 안에 그리스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서양식 건축물이 함께 있는 것은 시대의 교차로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든 서구화를 이루겠다는 대한제국의 꿈의 흔적이기도 하고요. 안타깝게도 석조전이 지어진 해 대한제국은 막을 내립니다. 나라를 잃은 고종 황제는 이곳에 머물지 않았다고 합니다. 망국의 아픔 때문일까요 이후 석조전은 미술관과 박물관으로 오랫동안 이용되었습니다. 1946년과 그 이듬해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착잡한 마음을 안고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1층의 대식당이었습니다.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만찬이 열리는 곳으로 완전히 서양식입니다. 식기와 포크, 나이프들이 격식대로 차려져 있고, 와인과 물을 마시는 잔도 여러 개 놓여있습니다. 대식당 한쪽에는 벽돌로 쌓은 석조전의 안쪽 벽과 2층으로 올라가는 파이프들을 볼 수 있는 공간도 있습니다. 이곳을 쓰려고 했던 황실은 사라졌고, 대한제국도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석조전은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 우리 곁에 남았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석조전을 잊지 말아야 할 진짜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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