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재소설

[완결]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25화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25부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25부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25부

어떤 날의 승리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어떤 날의 패배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미래의 태양을 더 밝게 느끼기 위해 오늘을 암흑 속에서 보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2회와 3회에 연속 2실점을 하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지고 싶지 않았다면 다른 종목을 택해야 했다. 수영이나 마라톤 같은. 1등과 2등과 3등은 있지만, 이기거나 졌다고 말하지 않는 종목. 

그저 내 기록을 깨고 또 깨면서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 

그런데 소프트볼은 그런 경기가 아니었다. 이기지 않으면 진다. 

한 팀이 아무리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더라도, 또 한 팀이 아무리 처참하게 지고 있더라도, 그만둘 수 없다. 도망칠 수 없다. 

정해진 이닝이 끝날 때까지, 최후까지 싸워야 한다. 그것이 게임의 규칙이었다. 

3회 말에도 우리 팀은 삼자범퇴를 당하고 끝났다. 

0대4. 

우리 팀의 마지막 타자가 제대로 한번 배트를 휘둘러보지도 못한 채 물러나는 걸 보고서 나는 더그아웃 벤치에서 엉덩이를 뗐다. 

선생님이 내 어깨를 짚었다. 내 귀에만 들리도록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아픈 덴 없지?”

“네.”

마음이 아파요, 겁나서 이제 더는 못 올라가겠어요,라고 고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와 교체해줄 투수는 없으니까. 나 말고는, 던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이 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어떤 손바닥에는 말줄임표가 묻어 있다. 손 닿은 곳이 따듯했다.

“아프면 꼭 말해야 해. 참지 말고.”

“네.”

나는 대답했다. 

상대 팀은 4회에서 1점, 5회에서 3점을 얻었다. 

우리는…… 득점하지 못했다. 경기는 5회 콜드게임으로 끝났다. 우리의 패배였다. 완벽한 패배. 

마치 약속한 것처럼 우리 팀 선수들이 일제히 울기 시작했다. 오직 나 한 사람만 빼고. 

솔미가 내 목을 끌어안고 꺽꺽 우는데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에게 배운 대로 솔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내 손바닥도 따듯하기를 바랐다. 

아, 울지 않는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선생님이었다. 

“얘들아, 얼른 일어나자. 다음 팀 들어온다. 우리가 빨리 짐 빼줘야 돼.”

선생님이 목소리는,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심지어 명랑하게 들렸다. 

학교 앞 떡볶이 집에서 대기하는 손님들을 위해 빨리 먹고 일어나자는 것 같았다. 

솔미가 ‘핏’도 아니고 ‘풋’도 아닌, 그 중간쯤 되는 콧소리를 뱉었다. 눈물방울은 여전히 큰 눈에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빨리들 일어나. 이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거 먹으러 가게.”

선생님이 말한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것’은 중국 음식이었다. 선생님은 경기장에서 가까운 중국 음식점에 예약을 해놓으셨다고 했다. 

“예약 시간보다 좀 빠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뭐 쫓아내기야 하겠니?”

그냥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문 앞에 배달 오토바이 한 대와 철가방이 놓여 있는 식당이다. 우리를 위해 룸이 준비되어 있다.

꽤 큰 방 같았는데 우리가 들어가 앉으니 꽉 찬다. 

곧, 탕수육 두 접시와 깐풍기 두 접시, 그리고 자장면과 짬뽕 그릇이 탁자 위에 풍성하게 놓인다. 

그래도 인간이 염치라는 걸 가진 존재임을 잊지 않으려는 듯 그때까지 제법 조용하게 자숙하는 분위기를 풍기던 아이들이 음식 앞에서 하나둘 마음의 빗장을 열기 시작했다. 

“선생님, 진짜 여기가 이 동네 최고 맛집 맞아요?”

탕수육 한 점을 입안에 욱여넣으며 지윤이 물었다. 

“나도 몰라. 검색해서 젤 가까운 데 잡은 거야. 우리가 맛있게 먹으면 그게 맛집이지.” 

선생님이 깐풍기 접시에서 큼지막한 닭고기를 덜어 솔미 앞에 놓아주었다. 

솔미가 그것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오물오물 맛있게도 씹어 삼켰다. 

나도 모르게 솔미의 빈 물컵에 찬물을 가득 따라주었다. 솔미가 시원하게 물을 들이켜는 모습을 보니, 오늘 처음으로 마음에 편안함이 차올랐다. 

이런 걸 안도감이라 부르는 것인가 보다. 솔미가 내내 음식을 먹지 않으려 한다는 걸 선생님은 예전부터 알고 계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선생님은 처음부터 아셨을 것이다. 우리가 1차전을 통과하다니, 그건 언감생심, 말도 안 된다는 것을. 

하하호호 큰 웃음소리가 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은 잔뜩 쫄아 있지도 않다. 

그냥 큰 시험을 보고 나온 이후의 얼굴들이다. 더러는 홀가분하기까지 한 표정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일단은 그 일을 마쳤다는 것이 중요한 순간도 있는 것이다. 

다 함께 끝마친 첫 번째 시합을 축하하는 자리. 그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낡은 탁자를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여기까지 오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 지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들이 스쳐 지나간다.  

“자, 배는 웬만큼 채웠지? 이제 오늘 경기 분석 들어간다.”

선생님이 젓가락을 내려놓으셨다. 좌중에서 ‘어우우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얘들아, 그럼 서울 가서 할래? 서울 가는 차 안에서 할래? 나 같으면 그냥 여기서 깔끔하게 딱 마무리하겠네.”

‘어우우우’ 소리가 아까보다는 조금 작아진 것도 같다. 나도 입 모양으로 따라 하고 있었다. 

“비록 패했지만 오늘 우리 팀의 베스트 플레이어는 누굴까?”

아이들이 서로 눈치만 보았다. 

“모두 다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했지만 내 생각엔 강지유다. 지유 없었으면 우린 20대0으로 졌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던져준 지유한테 박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도 참 주책이다. 이런 순간에, 뒤늦은 눈물이 차오르다니. 나는 츤데레처럼 손등으로 얼굴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몇 달이 흘렀다. 2학기가 되면서 소프트볼 팀에는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첫째, 팀원이 대폭 늘었다. 늦여름 열린 국제여자야구대회에 우리 선생님이 출전한 것이다. 

‘10년 전, 여자 소프트볼계를 주름잡던 민기정 선수 홀연히 떠났다 돌아오다’라는 내용으로 신문 인터뷰 기사도 실렸다. 

그 기사가 인터넷 포털사이트 메인 화면에 걸리는 바람에 ‘민기정’이라는 이름이 검색어 순위에도 오르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뉴스기사 속의 선생님 사진은 실물보다는 못 나왔지만 그래도 봐줄 만했는데 ‘여자 맞냐?’라는 악플들이 꽤 달렸다. 

나는 일일이 찾아서 야무지게 반대 버튼을 눌렀다.

“7년 동안 뭘 했느냐고요? 여러 가지를 했어요. 워킹홀리데이로 외국에도 다녀오고, 유치원생들에게 체육을 가르치기도 하고, 사촌오빠의 사무실에서 전화 받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있었죠. 운동을 떠나 살 수 있으면 무엇이든 괜찮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지금은 여자고등학교의 소프트볼 팀 지도교사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는 부분에 형광펜을 칠해 학교 교정의 게시판에 붙여놓으니 그걸 보고 꽤 많은 아이들이 소프트볼 팀을 찾아왔다. 

신청자를 모두 다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디션을 봐야 했다. 

둘째, 지윤이가 팀을 그만두었다. 

“애들이 이렇게 몰려오니 정말 다행이야. 이 틈을 타서 나는 빠질게.”

몸이 아픈 지윤이가 여기까지 함께해준 것도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자기 하나가 빠지면 팀 정원수가 부족할까 봐 힘들어도 참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셋째, 나 말고 다른 투수들이 둘이나 더 생겼다. 

오디션 때부터 투수 포지션을 염두에 두고 선수를 뽑자는 데에 선생님과 내 마음이 일치했다. 

혼자 하던 투구연습을 셋이 같이 하니 마음이 훨씬 편안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다음 경기에선 나 홀로 괜히 비장한 척하지 않을 수 있게 된 셈이다. 

언제까지 소프트볼을 계속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은 스스로에게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그 말의 전제가 어리석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까지’라니. 잘은 모르지만, 당장 한 시간 뒤의 삶도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말이다. 

나는 그냥 걸어가 보기로 했다. 걷다 보면 다 만나겠지. 

역대급 토네이도도 만나고, 기막히게 아름다운 호숫가도 만나고, 아무도 모르는 오솔길도 만나고. 

그 한적한 오솔길을 걷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어린 동물에 놀라 주저앉을 수도 있겠다. 

그럴 땐 호흡을 가다듬고 일어서기 전에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을 것이다. 

세상 무엇보다 부드럽고 단단한 공 하나가 거기 있다면, 한결 마음이 놓일 테니까.

정이현 작가 사진

정이현 작가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상냥한 폭력의 시대』,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사랑의 기초ㅡ연인들』 『안녕, 내 모든 것』, 짧은 소설 『말하자면 좋은 사람』, 산문집 『풍선』 『작별』 등을 펴냈다. 이효석 문학상, 현대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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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08-30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