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일본어 통역사지만 변변한 일거리는 못 구하고 자질구레한 책을 번역하거나 시간강사 일을 한다. 여자의 남편은 연예 기획사의 매니저 일을 한다. 어느 날 남편이 담당하고 있던 배우 한 명이 사라지지만 결국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일이 되어버린다. 어느 해 남편의 회사 연말 모임에 굉장한 실력을 가진 오페라 가수가 공연을 하고 여자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청난 슬픔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날 밤에 여자는 어릴 적의 기억에 빠져든다.
여자가 어릴 적 살던 마을에는 여자가 태어나기 전에 화재가 일어난 적이 있고, 그 화재에서 여자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오빠가 죽는다. 마을 사람들은 그 화재로 가족 중 한 명 이상을 잃은 경험이 있다. 어머니는 여자에게 화재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한다. 아버지는 출장을 자주 떠나고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화재나 오빠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여자는 비교적 얌전하고 소심한 성격으로 자라난다. 여자가 열두 살이 되면서 부모님은 여자에게 공부에 좀더 전력을 다할 것을 요구한다. 그해 겨울에 마을에는 외부인이 이사를 온다. 외부인은 서른다섯 살쯤 되는 여성이고,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외부인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돈다. 어느 날 여자는 외부인이 사는 집 앞을 지나가게 되고 호기심에 그 집의 문을 두드린다. 외부인은 여자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여자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여자를 데리고 가도록 한다. 여자는 어머니가 자신을 혼낼 거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어머니는 별말을 하지 않는다. 몇 달 후 외부인은 자신의 집에서 자살한 채로 발견되고, 경찰은 여자의 집을 찾아온다. 경찰은 여자의 어머니가 이 자살사건에 관련이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하고 그 일을 기점으로 여자의 집은 산산조각이 나고 마는데……
이 소설이 어떤 식으로 굴러갈까?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이 소설을 처음 구상했을 때 나는 그저 한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작은 동네의 끝도 없는 골목을 혼자 뛰어가는 여자애, 어머니로부터 끊임없이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던 여자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궁금해했던, 언제나 기가 죽어 있는 여자애를 말이다. 나는 그 여자애가 성장해서 어떤 삶을 살게 될지도 좀 궁금하다. 그 여자는 누구를 어떤 방식으로 사랑할까? 어떤 대상을 증오하고 어떤 미래를 기대하고 어떤 때 실망을 할까?
내 생각에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여자를 비롯해서 크든 작든 모두 슬픔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글쎄, 이 소설을 쓰면서 나는 그들이 왜 모두 그러한 슬픔에 사로잡혀 있는지 알아갈 작정이다.
〃 작가소개 〃
손보미소설가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9년 21세기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담요」가 당선 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그들에게 린디합을』,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이 있다. 2012년 젊은작가상 대상, 2013~2015년 젊은작가상에 선정되었으며, 제46회 한국일보문학상, 제21회 김준성문학상, 제25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