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한다는 것은 끔찍한 것이다. 절대적으로 신비롭고 불가해한 특성을 가지며,
나는 내가 시작하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는 것들에 대해 책임을 갖는다." .
-장 폴 사르트르-
우리는 대개 무언가를 잘하고 싶어 합니다.
전문가, 혹은 프로페셔널이 되고 싶어 하지요. 그런 동기나 욕구 덕분에 발전하고 성취를 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러한 성취 욕구에는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정도 잘했으니 됐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고, 항상 다음 목표를 향해 달려갈 준비를 합니다. 지금 현재의 나는 늘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에 더 배우거나 더 노력해서 무언가를 달성하거나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항상 무언가를 ‘하려는’ 우리의 욕구는 언제쯤 만족이 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왜 이렇게 노력하다가 어느 순간 허무함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요? 이렇게 공허하다고 느낄 때에는 더 노력해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내려놓아야 하는 걸까요? 내려놓는다면 과연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일까요?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공허하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사르트르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의자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앉기 위한 것이지요. 의자는 우리가 앉기 위해 존재합니다. 책상은 왜 존재합니까? 우리가 책을 펴서 읽거나 노트북을 올려놓고 쓰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것이 책상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왜 존재하나요?
이에 대해 명확한 답을 하실 수 있으신지요? 아마 어려울 것입니다. 가족을 위해 존재한다? 세상을 이롭게 하려고 존재한다? 사랑하려고 존재한다? 어떤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존재한다? 돈을 벌기 위해 존재한다? 이상하게 들리시죠? 앞뒤가 뒤바뀐 말들입니다.
우리는 존재하기 때문에 가족을 염려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려 애쓰며, 사랑하려는 마음을 내고 무언가를 잘하고 싶어 하며 돈을 벌려고 애를 쓰지요. 욕구들은 다양하겠지만 아마 이 순서가 맞겠지요?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기 전에 이미, 그 전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책상이나 의자가 아닙니다. 어떤 기능이나 목표, 속성으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사르트르의 말마따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무nothingness'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책상이나 의자와 같이 어떤 본질이나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저 우리가 생긴 대로 있으면 됩니다. 가만히 있으면 본질에 진실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본질을 갖지 않습니다. 특정한 이유 없이 먼저 세상에 존재하지요.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바로 이것이 인간의 지독한 혼란과 불안의 근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삶의 목적이나 의미가, 목표나 역할이 정해져 있지 않아 스스로 만들어내야만 하는 것이죠. 우리는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지 어느 순간에도 완성되지 않습니다. 서른 살이든 쉰 살이든 일흔 살이든 ‘나’라는 것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을 뿐이죠. 아직 죽지 않았다면 그것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늘 과정에 놓여 있기 때문에 결코 고정된 실체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핵심에는 항상 근본적인 '무'가 있기 때문에 사르트르는 인간을, 무언가를 가장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하였죠.
무언가를 아주 잘하려 하고 어떤 역할이나 지위를 자꾸 얻으려고 하는 것에는 이러한 인간의 ‘무’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는 것이라고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주장합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그토록 무언가가 되려고 애를 쓰는 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견디기 힘들어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책상이나 의자와 같은 사물처럼 단단하고 고정된 실체를 갖는다면 어떨까요? 똑같진 않지만, 아마 노예로 태어난 자는 노예가 되고 귀족으로 태어난 자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특혜를 누리던 과거의 계급 사회가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존재하기 전에 역할과 실체를 부여 받는다는 점에서 말이죠. 생각 실험 하나 해볼까요?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너는 간호사가 되기 위해 태어났으니 간호사가 되어라.’ 혹은 ‘네 신분은 택시 기사로 정해져 있으니 그 길로 가라.’ 이렇게 누구에게나 역할을 미리 부여하면 어떨까요? 내가 선택할 필요 없이 역할을 정해준다면 어떨까요? 지금보다 덜 혼란스럽고 행복할까요?
우리는 ‘나’라는 것이 고유한 속성과 본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환경이나 주위 사람이 나를 쉽게 바꿀 수 없다고 믿고 싶어 하고 타인과 구분되는 ‘나’라는 것이 확실히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로 산다는 것’, 혹은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일지 고민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이때의 ‘나’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만약 삶이 결과를 결코 내주지 않는, 끝없는 과정에 불과하다면 어떤 과정을 사시겠습니까? ‘나’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길이 삶이라면 어떻게 살고 싶으신가요?
변지영
소장
공생연 (공부와 생활 연구소) 소장으로 한국인의 복잡하고 특수한 ‘자아’ 개념과 이로 인해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학습된 무기력’ 증상을 연구하며 심리학과 철학의 경계에서 ‘삶이 되는 공부’의 방법론에 관해 연구중
역서 「나는 죽었다고 말하는 남자」 저술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당신에게」 「항상 나를 가로막는 나에게」 「아직 나를 만나지 못한 나에게 」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