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쉬인사이드

60년대 판타지 오렌지 주스

디쉬인사이드 : 60년대의 판타지 오렌지 주스 in 영화 <맨발의 청춘 />
디쉬인사이드 : 60년대의 판타지 오렌지 주스 in 영화 <맨발의 청춘 />

영화 <맨발의 청춘>속에서 볼 수 있는 풍속도

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 삼키며 밤거리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녀도, 사랑만은 단 하나의 목숨을 걸었다. 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말라~

1964년 영화 ‘맨발의 청춘’ 주제가의 가사다. 이 영화는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미남스타 신성일과 인기절정의 여배우 엄앵란이 주연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위의 가사에서 보이듯이 뒷골목 건달이 신분상 넘을 수 없는 상류사회에 속한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다는 순애보의 이야기다. 미리 밝히고 넘어가자면,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에서 그렇게 자랑할만한 영화는 아니다. 바로 일년 전 일본에서 제작된 ‘진흙투성이의 순정’이라는 영화를 그대로 베껴온 작품이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의 사회 전반적 상황을 고려하여 이러한 표절 또는 ‘번안’작품이 많았다는 부끄러운 과거까지 우리가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그건 그것대로 소중한 영화사적 자료일 것 이다.

필자가 이 영화를 얘깃거리로 삼는 것은 영화의 내용이나 오리지널 영화와의 차이 등을 얘기하고자 함이 아니라 영화 속에 의도하지 않게 담긴 당시의 풍속도가 흥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잠깐 이야기 했듯이 지체가 높은 집 규수의 외동딸과 그걸 넘보아서는 안 될 무식한 뒷골목 건달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이므로, 스토리 전개상 여러 군데에서 신분과 배경의 차이를 대비하여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그런 의도로 만들어 낸 장면에서 도리어 그걸 만든 사람들의 당시 정서와 상식의 한계를 볼 수가 있다.

등장하는 음식으로 보는 판타지적 요소

주인공 요한나(엄앵란)와 두수(신성일)는 행동양식에서 여러가지로 차이를 보이는데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 저녁에 헤어지면서 나누는 대화다. 대사를 옮겨보면 이렇다.

두수: 이제 집에 들어가면 뭐하죠?
요한나: 쥬스를 마시면서 음악감상을 해요.
두수: 음악감상? 어떤 곡을 듣죠? 재즈나 샹송?
요한나: 그런게 아니고 클라식 음악을 들어요. 베토벤의 운명이라든가, 차이코프스키의 고전음악.
두수: 자기는 몇시에?
요한나: 열시 반이요. 자기 전에 성경책을 잠깐 읽어요.
두수: 난 아령 같은 걸로 가벼운 운동이나 하고, 그렇지 않으면 위스키를 나팔 불듯이 마시면서 권투잡지나 싸구려 잡지를 보다가 잠이 드는데.


조금은 서글픈 이야기인데 그 당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그러니까 감독, 각본가, 카메라맨, 미술담당 모두 다 부자로 산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제작된 많은 영화들에서 부자들이 사는 모습은 참으로 현실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영화가 판타지라서 알고 그렇게 묘사한게 아니라 본 적이 없으니 상상으로 묘사한 것의 한계가 너무 드러난다는 말이다.

60년대의 판타지
오렌지 주스

위의 대화에서 나오는 ‘자기 전에 주스를 마신다’는 이야기가 당시엔 그럴 듯 했을지도 모르겠다. 전 국민이 다 가난하던 시절, 극소수의 부유층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주스를 마시면서 잠을 청한다고 영화에 나오면 참 우리와는 달리 우아하구나 하고 관객들은 납득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밑바닥 인생이라는 두수가 자기전에 위스키를 나팔 불듯이 마신다는 것도 현실감이 없는 대사이지만 이건 영화는 판타지라는 점으로 넘어가 주자. 사실 그 당시는 모두가 사발에 탁주, 그러니까 막걸리를 마시던 시절이었다. 아니 젊은이들은 막걸리조차 마실 돈이 없던 시절이었다.

이 영화에서 둘은 데이트를 하다가 거리의 리어카 행상에서 오렌지를 산다. 사실 당시는 국산은 귤도 없던 시절이라, 일반인들은 언감생심 오렌지나 바나나 같은 열대과일은 구경도 못하던 시절에 오렌지를 사서 베어 무는 것도 판타지의 맥락이라면 이해가 간다.

그 시절, 양식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또 흥미로운 장면은 요한나가 두수를 취직자리를 알아보려고 친척집에 데려가 소개를 하는 대목이다. 그 당시 한국사람들에게는 양식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이 있었다. 양식은 손에 익은 젓가락이 아니라 쇠스랑 같은 포크와 과도같이 생긴 나이프를 들고 음식을 먹어야 하고 또 거기에는 아주 복잡한 예법이 따른다는 지식이 두려움으로, 헐리우드 영화를 통해서 본 부자나라 미국사람들처럼 먹는다는 동경이 동시에 마음속에 자리잡았던 것이다. ‘옛날옛날 한 옛날에’의 저자 이창우는 실제 나이가 이 영화에서 설정한 주인공과 비슷한 또래인데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도시락도 못싸와서 배를 곯는 아이들이 숱했던 시절에 국민학교 교과서에 양식을 제대로 먹는 법이라며 포크를 어떻게 쓰고 나이프는 어쩌구 하는게 나왔고, 또 아이들은 그걸 시험에 나올까 외워야 했다고 지적한다.

영화에서 요한나와 두수를 맞이하는 부잣집 친척은 양식을 낸다. 영화가 그리고자 한 건 부자들은 평소에도 우리와 달리 밥 안 먹고 빵 먹는 양식 먹어요,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서글프게도 부자의 식탁은 상상 속의 세계에 머문 것은 미술담당이나 감독이하 다른 스탭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과일이 정물화 속의 그것처럼 그릇에 가득 담겨 식탁에 오른 것도 그렇고, 엄청나게 큰 보온병이 올라가 있는 것도 지금 보면 우스꽝스럽다. 두수가 칼질(나이프를 사용하는 걸 옛날엔 칼질한다고 했다)을 하다가 고기점이 튀어 날라가 건너편 친척의 얼굴에 붙는 건 웃음을 노린 클리셰라고 쳐도 되겠다. 그렇다, 부자들은 점심때에도 고기를 먹는데 그것도 불고기나 갈비구이가 아닌 서양식의 스테이크를 먹는 것이다. 당시 서민들이 상상하기에는 그랬다.

60년대의 문화를 잘 묘사한 작품들

60년대 초기에 나온 한국영화에서 서민들이 먹고 사는 모습을 보면 그런대로 잘 묘사가 되어있는 편이다. 61년 한형모 감독의 ‘돼지꿈’이나 같은 해 이형표 감독의 ‘서울의 지붕밑’ 같은 작품들이 좋은 예이다. 특히 ‘서울의 지붕밑’에서는 술집에서 술을 먹는 장면이 여러번 나오는데 안주가 한결같이 양은냄비에 끓여놓은 찌개와 빈대떡이나 전류가 안주로 상위에 올려져 있다. 좀더 거나하게 차린 주안상에는 잡채가 더해지는데 고명보다는 당면이 대부분인 모양이다. 그리고 모든 주점에서는 싸구려 음식점이건 고급요리집이건 나무젓가락을 쓴다. 이는 일제의 잔재이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고급요정이나 일반 식당 모두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쓴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가 이를 낭비로 여겨 모든 식당에서 재활용이 가능한 쇠젓가락으로 바꾼게 불과 이삼십년 전의 일이다.

영화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문화

‘서울의 지붕 밑’에 나오는 식사풍경에서 눈여겨 볼 장면은 두가지다. 하나는 가장이 따로 혼자서 소반을 받는 장면이다. 동네 터줏대감이자 한의원 주인인 주인공 김학규(김승호)가 식사를 하며 미망인 딸(최은희)에게 한눈 팔지말라고 주의를 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의 아내(한은진)와 딸 현옥이 겸상을 하고 김학규는 독상을 받아 먹으며 상을 건너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필자가 어렸을 때도 시골에 가면 집안의 가장은 소반에 독상을 받았다. 그리고 나머지 식구들은 둥근 밥상에 둘러 앉아 반찬을 공유해서 먹었다. 우리가 요새 한정식 집에 가면 한상 가득히 반찬을 차려 내오는데 이걸 궁중식이네 왕실요리네 하고 외국 관광객에게 소개하는 집들도 있다. 하지만 이건 일제시대 때 ‘요리집’이라고 불리던 변형 음식점에서 내려온 습관이지 우리네 전통과는 무관한 상차림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밥그릇의 크기이다. 요새 우리가 먹는 밥그릇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하게 크다. 우리의 식생활은 밥 중심에서 갖가지 요리나 반찬으로 비중이 옮겨가며 밥을 먹는 양이 계속 줄었다. 당시에는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소와 활동에 소요되는 칼로리를 밥으로부터 섭취하려니 먹어야 하는 밥의 양이 많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같은 해 개봉한 박종호 감독의 ‘골목 안 풍경’이라는 영화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가장은 독상을 받고 9남매 아이들이 올망졸망 둘러앉아 아침을 먹는데 밥그릇의 크기가 요새 그것의 적어도 세배는 되는 모습이다. ‘서울의 지붕 밑’에서는 밥그릇이 사기 그릇이고 ‘골목 안 풍경’에서는 놋그릇이란게 다른 점인데 양쪽 다 요즘 사람들이 보면 질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크다. 조선말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들을 보면 60년대의 것보다 더 큰 밥그릇에 밥을 담아먹는 모습도 보인다. 실제 조선사람은 밥을 많이 먹는다는 그들의 기록도 남아있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의 풍습과 문화가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외래문화에 의해 단절되고 일제의 영향을 받았기에 그대로 거슬러 올라가 찾아보거나 복원을 하기가 쉽지 않다. 영화도 변변하게 남아 있는게 없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의 모습을 잘 묘사한 문학작품은 문화사적인 측면에서도 소중한 자산이다. 채만식의 ‘태평천하’에서 주인공 윤직원 영감이 동기 춘심이와 놀다가 밤중에 야식을 시켜먹는 장면이 나온다.

“너 배안고프냐?”
“아뇨, 왜요?”
“배고프다머넌 우동 한 그릇 사줄라고 그런다.” (중략)
“사주신다믄야 밴 불러도 달게 먹죠.”
“그래, 두 그릇만 시키다가 너하구 한그릇씩 먹자.”
“우동만, 요?”
“그러먼?”
“나, 탕수육 하나만……”
“그래, 두 그릇만 시키다가 너하구 한그릇씩 먹자.”
“저 배때기루 우동 한 그릇허구, 또 무엇이 더 들어가?”
“들어가구말구요! 없어 못 먹는답니다!”
“허! 그년이 생부랑당이네! 탕수육인지 그건 한 그릇에 을매씩 허냐?”
“아마 이십오 전인가, 그렇죠?”
윤직원 영감의 말이 아니라도 계집애가 여우가 다 되어서, 탕수육 한 접시에 사십 전인 줄 모르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탕수육이 필자가 어렸을 때만큼 귀한 음식은 아니지만 요새도 젊은 학생들이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짜장면이나 짬뽕만 먹고, 좀 넉넉하다 싶으면 탕수육을 시켜먹는건 이 소설이 나온 80년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사람들에게 탕수육은 마음이 풍요해지는 특별한 음식이다. 한편, 윤직원 영감과 춘심이는 다음날 진고개, 그러니까 지금의 퇴계로와 충무로 사이에 있는 보석상으로 가서 반지를 산다. 그리고 춘심이 하는 말.

“저어참, 영감님?”
“왜야?”
“우리 저기 미쓰꼬시가서, 난찌먹구 가요?”
“난찌? 난찌란 건또무어다냐.”
“난찌라구, 서양 즘심말이에요.”
“아서라! 그놈의 서양밥, 말두 내지 마라!”
“왜요?”
“내가 그년의 것이 좋다구 히여서, 그놈의 디 무어라더냐 허넌 디를 가서, 한번사먹다가 돈만 내버리구 죽을뻔히였다!”
“하하하, 어떡허다가?”
“아, 그놈의 것 꼭소시랑을 피여 논 것치름 생긴 것을 주먼서 밥을 먹으라넌구나! 허 참……”


여기서 ‘그년의 것’이란 서양점심, 런치를 이르는 것이요, ‘그놈의 디’라는 곳은 ‘그릴’이라 불리는 양식당을 이르는 것이다. 물론 ‘소시랑’을 펴놓은 것처럼 생긴 건 포크를 말한다. 그리고 ‘미쓰꼬시’는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건물에 있던 일본 백화점을 말한다. 일본이 개화기에 받아들인 서양풍물 가운데 우리나라의 식문화에도 들어온 것 가운데 하나가 ‘그릴’이라는 업태이다. 백화점마다 맨 위층에 자리를 잡고 돈카츠, 오므라이스, 함박스테이크 같은 것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여행객을 위하여 역 건물에도 들어가 있었는데 지금도 서울역사에는 서울역 그릴이 있다. 아마 한국에서 가장 오래 명맥을 이어온 양식당이 아닐까 한다.

맺으며

60년대 초반에는 쥬스라는 말도 낯설던 시절이었다. 집안에 아픈 환자가 생기면 사과나 배를 갈아 즙을 내어 먹이기는 했어도 ‘쥬스’는 미군 피엑스에서 나오는 드물고 보기 힘든 물건이었으까. 이야기를 하다보니 미국영화에서나 보던 바나나, 파인애플, 오렌지 같은 과일로 만든 쥬스를, 부자들은 잠들기 전에 우아하게 클래식음악을 들으며 한 잔씩 마신다고 상상하던 시절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영화
<맨발의 청춘>
(1964)

서두수는 길거리의 삶을 사는 폭력배이다. 밀수한 시계를 운반하러 가던 어느날 불량배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요안나와 친구를 구해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요안나와 두수는 서로를 생각하게 되고, 요안나의 학교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두수는 집으로 찾아온 요안나와 만나기 시작한다. 요안나는 대사의 딸로 부유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고 두수는 창녀들이 사는 허름한 방에서 산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에 대한 관심으로 서로가 속한 이질적인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깡패와 외교관의 딸 사이의 신분과 사회의 시선을 뛰어넘는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

이주익

이주익

영화제작자

영화제작자. SCS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영화 <워리어스 웨이>, <만추>, <묵공> 을 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음식과 요리에 관심이 많아, 취미로 음식에 대한 연구를 했고 음식 전문 서전 수천 권을 보유중이다. 음식 관련 영화와 TV 드라마 제작을 희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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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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