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지혜

조선의 민낯을 보여준 이혼소송 사건

고전의 지혜 : 조선 통치 제도의 민낯 고전의 지혜 : 조선 통치 제도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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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조선 숙종 통치기에 이혼소송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오랜 논쟁과 진실공방을 불러일으켰던 이 사건은 결국 승자 없이 패자만 남긴 채 9년 만에 끝나고 말았죠.그러나 이 이혼사건은 단순히 한 가문, 혹은 남녀 사이의 문제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면에 가려져 있던 조선 통치 제도의 치부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던 것이죠.

고전의 지혜 : 어떤 백성을 품을 것인가?

이혼소송 사건의 발발

1704년 유정기라는 양반이 이혼을 요청하는 문서를 조정에 올렸다. 예순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자신의 가문에 먹칠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어 이혼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소송을 담당한 예조판서는 나라 법에 따라 이혼을 불가하다며 이혼청구를 기각했다. 그러나 유정기는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의 친구 임방을 통해 숙종에게 본인의 사연을 고했다.

“전하, 유정기는 아내와 사별하고 신태영과 재혼을 했사옵니다. 헌데 신씨는 남편과 시부모에게도 서슴없이 욕을 하는 등, 포악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또한 제사용 술에 오물을 섞고 사당에서 난동을 부리기까지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숙종이 이혼을 허락하려하자 이혼을 기각했던 예조판서가 나서서 부인의 진술도 들어본 후에 사실 여부를 밝히는 것이 마땅하다 청하였고 부인 신태영은 의금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된다.

“저야말로 정말 억울합니다. 저는 남편과 혼인하여 10년동안 5명의 자녀를 낳고 살 정도로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남편이 여종을 첩으로 삼으면서 저를 내치기 위해 꾸며낸 것입니다.”

고전의 지혜 : 어떤 백성을 품을 것인가?

대신들의 논쟁

부인 신태영이 혐의를 부인하고, 목격자의 진술도 번복되자 조정 대신들의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고 대신들의 갑론을박 끝에 2년의 시간이 흐른 뒤 판결이 내려졌다.

“남편 유정기는 집안을 잘못 다스린 죄로 장 80대에 처한다. 아내 신태영은 남편에게 욕을 한 죄로 태 40대와 장 80대를 치고 먼 곳으로 유배하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이혼소송은 기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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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후 다시 시작된 소송

이렇게 마무리 되었던 이혼소송은 무려 6년 후에 다시 시작됐다. 숙종의 어가행렬 앞에 나타난 유정기가 다시 이혼을 요청했던 것이다.이미 노쇠했던 유정기는 조정에서 이혼소송 논의가 시작되기 전에 사망했지만 죽은 후에도 신태영과의 부부관계가 법적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이혼소송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었다.결국 이혼소송은 9년만에 비로소 끝이났다. 세간의 웃음거리가 된 유정기의 가문은 몰락했고. 신태영은 악녀로 손가락질 받으며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9년간의 이혼소송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9년에 걸쳐 진행되었던 유정기와 신태영의 이혼소송 이야기는 조선의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조선이 근간으로 삼았던 가족제도가 결국 여성의 희생을 통해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오늘 날에도 약자의 희생을 통해 제도를 유지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지 않은지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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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08-09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