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일반 기업에 다니고 있는 미혼 여성입니다. 현대 양성평등이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고 이야기 하지만 저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유리천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도 책임자는 남자 직원들이 차지하고 있고 담당자가 여성 직원인데도 중요한 출장, 미팅에는 꼭 남자직원과 함께 가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손님이 오면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여성 직원이 일어나서 차를 타서 내드려야 하는 분위기입니다. 결혼한 여직원들은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제외되고, 출산을 겪은 여자 선배들은 육아휴직 후에 퇴사하거나 돌아오더라도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에 회사의 눈치를 보며 힘들게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결혼 전이지만 이런 생활을 곁에서 보고 있자니 출산은 커녕 결혼조차 망설여집니다.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취업에 성공해 남직원들과 같은 역량으로 일하고 있는데 여성은 왜 승진에서도 밀리고 암묵적으로 일과 육아,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 받는 걸까요?
- 직장인 박모씨 -
여성의 사회적 참여가 활발해지고 상당부분 여성의 지위에 대한 인식 개선이 이루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 회사와 공공기관의 고위직은 대부분 남성들로 채워져 있으며 남녀 간의 임금 격차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육아의 책임은 여성들에게 집중되고 있으며 이에 직장을 다니는 많은 여성들이 ‘슈퍼우먼’을 강요 받고 있는 실정이다.
유교 윤리가 지배하던 조선 시대 여성의 모습은 어땠을까? 특히 가부장적 질서가 뿌리내린 조선 후기 여성은 단지 남성에 종속된 존재로 인식되었으며 여성의 사회 활동은 꿈도 꿀 수 없던 시기였다.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가져 당시 천재 화가로 일컬어 졌던 신사임당은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에 의해 화가의 이미지는 지워지고 ‘현모양처’라는 타이틀만 남게 되었으며 허난설헌은 뛰어난 글 솜씨를 가졌지만 시어머니와 남편의 구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조선시대 최고의 국정기록인 ‘조선왕조실록’ 뿐만 아니라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에 이름을 올린 일반 양인 여성이 있으니 바로 제주 출신 김만덕이다. 심지어 정조는 초계문신들을 대상으로 ‘만덕전’을 짓는 시험을 치루기도 했으며 당대 최고의 학자인 정약용과 정승이었던 채제공 등이 김만덕을 위한 글을 짓기도 하였다. 양인 신분이기는 했지만 기생출신 이었던 김만덕이 어떻게 지체 높은 양반들에게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조선시대 최고의 국정기록인 실록에 까지 그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까?
만덕은 성이 김씨이며, 탐라(제주)의 양인 집안의 딸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귀의할 바가 없었다. 기녀를 의탁하여 살았는데, 점차 성장하자 관부(官府)에서는 만덕의 이름을 기안(妓案)에 올렸다. 만덕은 비록 순종적으로 기녀의 역을 행하였지만, 스스로 기녀로 대접하지는 않았다. 나이 스무 살에 그 사정을 관아에 읍소하니, 관에서 그것을 불쌍히 여겨 기안에서 제외하고 양민으로 복귀하였다. 만덕은 비록 집안에 고용된 노(奴)와 거주했으나, 탐라의 남자를 남편으로는 맞이하지 않았다. 그 재주는 재산을 늘리는 데에 뛰어 났다. 때에 따라 물가의 높고 낮음에 능하여, 팔거나 샀다. 수십 년에 이르러 자못 명성을 쌓았다.
『번암집(樊巖集)』 「만덕전(萬德傳)」
김만덕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양인으로 태어났으나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고, 생계를 위해 기생집에서 의탁해 살다가 결국 기생이 되었다. 비록 생계를 위해 기생이 되었지만 그녀에게는 장사를 하여 큰 돈을 벌겠다는 꿈이 있었다. 김만덕은 스무살이 넘자 자신의 신분을 회복해달라고 제주 관아에 지속적으로 탄원을 하였고 마침내 양인 신분을 회복할 수 있었다. 신분을 회복한 김만덕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포구에 객주를 차리고 장사를 시작했다.
김만덕이 살던 조선 후기에는 상업의 발달로 인해 해상 무역이 활발해지고 포구를 중심으로 유통업이 크게 발달했다. 김만덕은 이러한 시대 변화를 읽어내고 객주를 차린 후 쌀, 소금, 옷감, 장신구 등을 사고 제주의 특산물인 말총, 미역, 전복 등의 제주 특산물을 육지로 내다 팔아 거상으로 성장했다.
김만덕이 단지 여자로서 거상이 되었기 때문에 조선 팔도에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아니다. 1792년 제주에는 흉년과 태풍으로 극심한 기근이 들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1794년 제주 목사 심낙수는 제주도민들을 구하기 위해 조정에 구휼미를 요청한다. 이를 들은 조정에서는 구휼미로 만 여섬의 쌀을 실은 배 12척을 보냈으나 그 중 5척이 침몰하여 제주도민 수천 명이 아사할 위기에 처했다. 이를 본 김만덕은 이듬해 장사를 하며 모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육지의 쌀을 구입했다. 그리고 그 중 10분의 1로 가족 및 친척을 살리고 나머지는 모두 관가에 위탁해 기아에 허덕이는 제주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도록 하였다. 김만덕의 구휼 덕분에 제주도민 수천 명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해(四海)가 모두 내 형제다. 하물며 같은 섬사람 아닌가! 재물이란 외물(外物)이다. 모이고 흩어지는 때가 있다. 내가 어떻게 수전노가 되어 굶어 죽는 사람을 뻣뻣하게 보기만 하고 구휼하지 않겠나.”
이면승(李勉昇), 『만덕전』
제주(濟州)의 기생 만덕(萬德)이 재물을 풀어서 굶주리는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였다고 목사가 보고하였다. 상을 주려고 하자, 만덕은 사양하면서 바다를 건너 상경하여 금강산을 유람하기를 원하였다. 허락해 주고 나서 연로의 고을들로 하여금 양식을 지급하게 하였다.
『정조실록(正祖實錄)』(정조 20년(1796년) 11월 25일)
제주 목사는 이를 조정에 보고 하였고 당시 왕이었던 정조는 크게 감복하여 김만덕에게 상을 내리고자 하였다. 하지만 김만덕은 상을 사양하고 조금은 엉뚱한 소원을 말한다. 바로 상경하여 금강산을 유람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제주도의 여인이 바다를 건너 육지로 들어가는 것이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정조는 김만덕의 소원을 들어주며 가는 길의 고을에서는 양식을 지급하게 하고 역마를 빌려주게 하였다. 이렇게 한양에 도착하였으나 상민 신분의 여성이었던 김만덕은 궁궐에 출입할 수 없었다. 정조는 김만덕에게 당시 여성이 오를 수 있었던 최고의 벼슬인 ‘의녀반수’를 하사하여 궁궐출입을 가능하게 하였고 “의로운 기운을 발휘하여 주린 백성 천여 명을 구했으니 참으로 기특하다.”라고 칭찬하였다. 이후 김만덕은 금강산에 들어가 멋지고 놀라운 경치를 두루 탐방하였고 서울로 들어오자 김만덕의 이름이 한양 안에 가득하였다고 한다. 제주로 돌아온 김만덕은 죽기 전 양자에게 먹고 살 정도의 재산을 물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제주도민을 위해 기부하여 마지막까지 나눔을 실천하였다.
김만덕은 제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것도 모자라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고 다시 양인으로 환원되기는 하지만 생계를 위해 기생이 되었다. 김만덕은 이러한 신분적, 사회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목표와 꿈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갔다.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삶의 방향을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성별, 출신지, 신분을 뛰어넘는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김만덕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는 ‘가치 있는 삶’을 실천했다.
조선시대 제주의 평민으로 태어나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제약을 이겨내고 남성들조차 누리기 어려운 영예를 누린 김만덕. 그의 끊임없는 노력과 도전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당당하게 요구한 삶의 태도는 우리 시대 여성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
최태성
강사
모두의 별★별 한국사 연구소장
KBS 한국사 패널, 중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및 역사부도 집필, EBS 평가원 연계 교재 집필 및 검토
2013년 국사편찬위원회 자문위원, 2011~2012년 EBS 역사 자문위원
MBC <무한도전> '문화재 특강' 진행, KBS 1TV <역사저널 그날> 패널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