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역사

흙수저 양반 김육의 백성을 위한 선택

선택의 역사 : 흙수저 양반 김육의 백성을 위한 선택
선택의 역사 : 흙수저 양반 김육의 백성을 위한 선택

수저계급론과
현실에 대한 고민

“저는 이른바 흙수저입니다. 아버지는 평범한 직장인이셨다가 지난해 퇴직하셨고요. 어머니는 가정주부이셨다가 아버지는 퇴직 후 마트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고3 때 위로 형과 누나가 대학에 다니고 있어 집안 형편상 과외는 받지 못하고 단과학원에만 다녔습니다. 그리고 겨우 서울 중하위권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죠. 현재 대학졸업을 유예시켜 놓고 취업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토익, 자격증 등 취업에 도움되는 스펙을 쌓기 위해 닥치는 대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매일 같이 기업의 인력 모집 공고를 확인하고 벌써 수십 장의 응시원서를 제출했지만 여전히 취준생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금수저인 제 대학 동기는 벌써 취업에 성공하여 대기업에 다니고 있습니다. 학점은 저보다 낮고 어학연수를 다녀온 것 외에는 스펙도 저보다 별다른 것이 없는데 어떻게 그 친구는 대기업에 한 번에 합격했을까요? 이렇게 계속 취업준비에 매달려야 하는 건지 차라리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 직장인 김모씨 -

흙수저 양반 김육
백성을 이롭게 하려고 일생을 바치다

최근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신조어는 아마 ‘수저계급론’ 일 것이다. 수저계급론은 부모의 재력과 지위가 자식의 사회적 ‘계급’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특히 심각한 취업난을 겪고 있는 청년층 사이에서는 수저계급론이 확산되고 있으며 이들은 가정환경과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금수저’, 부모의 능력이나 형편이 넉넉치 못해 경제적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흙수저’라고 부르고 있다.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 시대. 신분제의 맨 꼭대기에 있었던 양반층은 모두가 금수저라 생각하겠지만 임진왜란 이후 양반층이 분화하며 양반들 중에서도 이른바 일반 상민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이른바 흙수저가 존재했다. 김육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숯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일반 농민보다도 더 가난한 흙수저 양반이었다. 하지만 김육은 영의정까지 오르며 다시 집 안을 명문가 반열에 올리게 된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뜻을 모아 그를 기리는 비석을 세워 주기도 했다. 어떻게 어려운 삶을 극복한 것도 모자라 백성에게 까지 사랑 받는 성공한 재상이 되었을까?

블랙리스트 집안,
일반 농민보다 가난한 양반

김육의 고조할아버지는 김식으로 조광조 등의 사림이 숙청된 기묘사화 때 희생된 사람 중 한 명이다. 서인 세력이었던 김식의 가문은 요즘 말로 하면 블랙리스트에 올라 김육의 증조 할아버지부터 아버지까지 중앙의 요직을 맡지 못했다. 김육이 13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터져 피난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의 나의 15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로부터 6년 뒤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당시 김육은 부모의 합장묘를 만드는데 사람을 쓸 돈이 없어 본인이 직접 묘소를 만들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고 한다.

부모님을 모두 여의었지만 김육은 과거 준비를 해서 소과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했다. 그러나 김육은 성균관에서 대과를 준비하던 중 대북파와의 마찰로 성균관을 떠나 자신의 고향인 경기도 가평의 잠곡으로 내려왔다. 낙향한 김육은 집이 없어 2년간 땅굴에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무척 가난했다. 그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직접 농사를 짓고, 나무를 하며 숯을 만들어 팔았다. 그렇게 김육은 10년 동안 일반 농민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늦깎이 공무원
영의정에 오르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김육에게는 의금부도사라는 벼슬이 내려졌지만 김육은 이내 관직을 그만두고 당당히 대과에 급제하여 정식으로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다.

정식으로 관료 생활을 시작한 김육은 요직을 두루 거쳤다. 왕의 신임을 얻어 중국에도 네 차례나 다녀왔다. 하지만 당시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은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10년 간 일반 백성의 삶을 경험해 본 김육은 백성들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김육은 중국에서 보고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백성의 삶을 이롭게 하기 위한 개혁이론을 마련한다.

대동법 확대에 일생을 바치다

우의정 김육이 상차하기를, 왕의 정사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우선할 일이 없으니 백성이 편안한 연후에야 나라가 안정될 수 있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천변(天變)이 오는 것은 백성들의 원망이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동법은 역(役)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한 것이니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입니다. 경기도와 관동에 이미 시행하여 힘을 얻었으니 만약 또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에서 시행하면 백성을 편안케 하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방도로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신으로 하여금 나와서 회의하게 하더라도 말할 바는 이에 불과하니, 말이 혹 쓰이게 되면 백성들의 다행이요, 만일 채택할 것이 없다면 다만 한 노망한 사람이 일을 잘못 헤아린 것이니, 그런 재상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효종실록 2권, 효종 즉위년 11월 5일 경신 4번째 기사-

백성의 삶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 김육은 백성들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국가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대동법 시행에 총력을 기울였다. 대동법은 공납을 특산물 대신 1결당 12두의 쌀 등으로 납부하도록 한 것으로 방납의 폐단을 막고자 광해군 때 시행되었다. 대동법은 집단위로 부과되던 공납을 토지를 기준으로 부과한 것으로 토지가 없거나 적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유리한 일종의 감세정책이었다. 이에 양반 지주들은 대동법 실시에 엄청난 반대를 하였다. 그리하여 경기지역에만 한정하여 실시되었을 뿐 전국적으로 확대되지 못했다. 김육은 효종 즉위 후 우의정에 오른다. 그때 그의 나이 일흔이었다. 백성을 위한 구제책으로 대동법만한 것이 없다고 판단한 김육은 대동법의 전국적 실시를 위해 자신의 정치 인생을 건 승부수를 던진다. 왕에게 대동법을 시행하지 않으려거든 자신을 재상으로 쓰지 말라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러한 김육의 노력으로 대동법은 충청도 지역까지 확대 실시된다.

하지만 김육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생전에 전라도 지역까지 대동법을 실시하기 위한 집념을 보입니다. 그는 죽기 열흘 전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다.

신의 병이 날로 더욱 깊어지기만 하니 실낱 같은 목숨이 얼마나 버티다가 끊어지겠습니까? 호남의 (대동법 실시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서필원을 추천하여 맡겼는데, 이는 신이 만일 갑자기 죽게 되면 하루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 일이 중도에서 폐지되고 말까 염려되어서입니다. 그가 사은하고 떠날 때 전하께서는 힘쓰도록 격려하여 보내시어 신이 뜻한 대로 마치도록 하소서.

-효종실록 20권, 효종 9년 9월 5일 기해 1번째 기사-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겠다는 결심으로 죽는 날까지 대동법 실시를 외친 김육. 비록 김육은 자신의 소망이 달성되는 것은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호서대동법의 성공적인 시행에 힘을 얻어 1658년(효종 9년)에 호남지역에도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이후 대동법은 전국에 걸쳐 실시되었고, 대동법의 영향으로 조선의 경제는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선택의
역사 결론

내가 아닌 백성,
일흔 아홉의 인생으로 보여준 삶

효종은 그가 죽자 “어떻게 하면 김육과 같이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게 국사를 담당할 사람들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고 백성들은 대동법 실시를 기념하여 김육에 대한 존경을 담은 비석을 세웠다.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재상의 자리까지 올랐으며 관직에 나아가서도 오로지 백성의 삶을 생각한 김육. 그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흙수저로 시작하여 다시 집안을 명문가 반열에 올려놓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일흔 아홉의 일생을 통해 ‘한 번의 인생 어떻게 살 것 인가’를 보여줬기 때문일 것이다.

최태성

최태성

강사

모두의 별★별 한국사 연구소장
KBS 한국사 패널, 중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및 역사부도 집필, EBS 평가원 연계 교재 집필 및 검토
2013년 국사편찬위원회 자문위원, 2011~2012년 EBS 역사 자문위원
MBC <무한도전> '문화재 특강' 진행, KBS 1TV <역사저널 그날> 패널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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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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