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같지 않은 서울
종로에서 버스를 타고 자하문 고개에 오르면 서울이 한 눈에 내려다보입니다. 종로타워를 비롯해서 즐비한 고층빌딩들과 수 많은 차들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요. 서울은 그렇게 수 많은 차와 사람, 그리고 높은 빌딩들로 이뤄진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도시입니다. 하지만 그런 서울 안에서도 도롱뇽이 사는 1급수가 흐르는 계곡이 있습니다. 바로 백사실 계곡이지요. 청와대 뒤편의 자하문은 조선시대 한양의 경계선이었습니다. 경치가 대단히 아름답고 한양과 가까웠기 때문에 권세가들을 비롯한 양반들의 별장과 정자들이 모여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자하문 고개를 지나서 세검정 삼거리 즈음에서 내리면 오른편으로 흐르는 홍제천 옆에 작은 정자와 만나게 됩니다. 바위 위에 세워진 이 정자의 이름은 세검정입니다. 영조시대 즈음에 세워진 이 정자의 이름인 세검정에는 몇 가지 뜻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우선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 당시 반정군이 이곳에 모여서 칼을 씻으면서 결의를 다졌다는 뜻이 있습니다. 아니면 실록을 편찬하고 남은 종이를 이곳에서 씻으면서 세검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세검정은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기는 우리 조상들의 기억이 담긴 곳입니다. 이곳을 지나 세검정 우체국 즈음에서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가면 백사실 계곡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도심 속의 자연
야트막한 오르막을 걷다 보면 길이 점점 좁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막다른 골목이라고 생각한 지점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작은 길과 만나게 됩니다. 이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이곳이 서울인가 싶은 곳을 보시게 될 겁니다. 물론 남산을 비롯해서 서울 속에서도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은 많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다른 곳과는 달리 압도적으로 고요합니다. 다른 곳은 차와 사람들로부터 많이 떨어져 있지 못한 반면, 이곳은 완벽하게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종각에서 20분 정도 버스를 타고 내려서 10분 정도만 걷게 되면 마치 인적이 드문 강원도의 깊은 산 속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계단을 부지런히 오르다 보면 어디선가 졸졸거리면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커다란 바위 뒤에 수줍게 숨어있는 현통사 옆으로 흐르는 개울물이 바로 소리의 주인공입니다. 그 개울물이 흐르는 곳이 바로 백사실 계곡입니다. 이 개울물은 너무 깨끗해서 1급수에서만 사는 도롱뇽이 서식하고 있다고 합니다. 백사 이항복의 별장이 있어서 백사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과연 안으로 들어가면 별장 터가 나옵니다. 계단과 초석이 있는 별장 터 앞에는 커다란 연못과 육각정의 흔적도 남아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자연을 벗삼아서 조용하게 지낼 수 있는 곳입니다. 아침에 별장의 문을 열고 나오면 커다란 연못과 육각정이 있고, 이름 모를 산새가 울면서 반겨준다면 누구나 마음의 편안함을 얻을 수 있겠죠.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백사실 계곡은 도시의 삶에 지친 여행객들의 피로를 씻어줍니다. 물이 너무나 맑아서 걸음을 멈추고 발을 담그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백석동천 각석이 반겨주다
별장 터를 지나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바위에 백석동천이라는 한문이 새겨져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백석은 북악산이고, 동천은 경치 좋은 계곡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백석동천은 북악산에 있는 경치 좋은 계곡을 가리킵니다. 오늘 우리가 여행하는 백사실 계곡이 조선시대부터 잘 알려진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 이곳은 서울에서는 드물게 명승 제3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백사실 계곡을 돌아볼 수 있는 코스는 여러 개가 있습니다. 환기 미술관과 산모퉁이 카페를 들릴 수 있는 코스를 가장 많이 가지만 저는 지름길로 내려왔습니다. 백사실 계곡만큼이나 아름다운 곳을 만나기 위해서죠. 큰 길로 나와서 자하문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오른편에 커다란 바위에 걸쳐지듯 지어진 건물이 있습니다. 바로 석파정 서울 미술관입니다.
대원군의 별장에 세워진 미술관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다양한 현대 미술을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동선이 자연스럽게 짜여 있고 볼만한 게 많으니까 석파정을 보고 싶더라도 참고 둘러 보시길 바랍니다. 3층까지 관람이 끝나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보입니다. 이곳을 나가면 석파정을 볼 수 있습니다. 석파정은 원래 고종때의 권력가인 김흥근의 별장입니다. 그가 있었을 때는 삼계동이라는 지명을 따서 삼계동정사라고 불렸답니다. 사랑채 뒤편 바위에는 삼계동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답니다. 한양 바로 밖인데다가 근처에 백사실 계곡까지 있으니 휴식을 위한 별장 자리로서는 최적이라고 할 만합니다. 김흥근의 삼계동정사 이전에도 다른 별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김흥근에게서 이 별장을 넘겨받은 것은 다름 아닌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입니다. 이곳을 차지한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호를 따서 석파정이라는 이름을 짓게 됩니다. 뒤로는 인왕산이 있고, 앞에는 북악산 자락이 보이는 곳이라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습니다. 거기다 한양과는 아주 가까웠으니 권력가들에게는 안성맞춤인 별장 자리였을 겁니다. 가운데로 졸졸 흐르는 개울을 따라 올라가면 독특한 정자와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봤던 정자와는 달리 크기도 작고 모양새도 이상합니다.
서양과 청나라의 영향이 물씬 풍기는데 지붕도 기와가 아니라 동판을 씌웠습니다. 사실 정자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돌로 만든 다리입니다. 일부러 굽어지게 만들어서 독특한 조형미를 선사합니다. 산책로는 정자 뒤편으로 이어지는데 마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산 속에 온 것 같은 느낌입니다. 운이 좋으면 이름 모를 새의 노래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석파정은 자연과 역사를 동시에 만날 수 있고, 현대 미술과 근대의 건축을 함께 맛 볼 수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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