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볼 수 있는 흔적들
1호선의 마지막인 인천역에 내려서 광장으로 나오면 자그마한 조형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옛날 증기기관차 형태인데 옆에는 한국철도 탄생역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답니다. 이곳은 1899년 완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의 출발점입니다. 경성과 인천을 연결하던 이 철도 노선은 원래 미국인 사업가 모스가 부설권을 얻어서 공사를 시작했지만 자금부족으로 인해 일본이 넘겨받아서 완성시킵니다. 조형물이 놓인 광장 건너편에는 화려한 패루가 눈에 띄는데요. 바로 인천 차이나 타운의 시작점입니다. 차이나 타운의 역사는 1883년 인천의 개항과 함께 합니다. 이곳의 역사는 우리 근대사의 아픔과 함께 하는데요.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면서 청나라 군대가 개입했고, 이때 함께 온 청나라 상인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조선의 상전 노릇을 했던 청나라는 이곳에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지를 만들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청나라 사람들이 몰려들게 된 것이죠. 패루를 지나 경사진 언덕을 오르면 양 옆으로 중국 음식점을 비롯해서 중국풍이 물씬 나는 상점들로 가득합니다. 월병과 화덕만두 같이 이곳에서만 맛 볼 수 있는 음식들은 물론 짜장면을 맨 처음 팔았다고 하는 공화춘이 이곳에 있습니다. 짜장면 박물관에 가시면 국민 음식이 된 짜장면의 역사를 한 눈에 보실 수 있습니다. 이곳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에도 계속 전성기를 구가했고, 오늘날에는 관광명소로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습니다. 언덕을 오르는 것이 조금 힘들지만 다리가 아픈 것쯤은 쉽게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구경거리들이 많습니다.
일본 조계지의 흔적 개항누리 길
삼국지의 주요장면들이 벽화로 그려져 있는 벽화거리를 지나면 드디어 오르막길이 끝나고 내리막길이 이어지는데요. 쭉 내려가다 보면 길 오른편에 공자상과 만나게 됩니다. 공자상은 눈 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는 듯 한 모습입니다. 2002년 중국 칭다오시가 인천시에 기증한 것입니다. 공자상 아래로는 양쪽에 석등이 있는 계단이 쭉 이어져있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공자상이 오른편으로 치우쳐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그것은 이 계단을 기준으로 청나라와 일본 조계지가 나눠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청나라 조계지보다 먼저 들어선 것이 바로 일본의 조계지입니다. 그리고 이 계단이 바로 두 나라 조계지의 경계선입니다. 공자상도 그래서 가운데가 아니라 청나라 조계지가 있는 오른편으로 치우쳐 있는 것이죠. 조금 더 내려가면 언덕 저편에 하얀색 건물이 하나 보입니다. 인천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인 제물포 구락부 건물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집어삼키고 조계지가 폐쇄되면서 문을 닫게 된 제물포 구락부는 다른 용도로 쓰이다가 인천 시립박물관과 문화원을 거쳐서 현재는 예전의 제물포 구락부로 복원된 상태입니다. 언덕 아래에는 일본 조계지가 시작되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 일본식 저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본 성곽 같은 축대 위에 담쟁이 넝쿨에 둘러싸여 있어서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풍깁니다. 이곳에서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인천 중구청과 개항누리 길이 나옵니다. 인천 중구청은 1933년에 세워진 인천부 청사 건물을 그대로 사용 중입니다. 1930년대 건축물의 특징인 모더니즘 양식의 특징이 잘 남아있는데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충남도청처럼 스크래치 타일을 사용한 것이 눈에 띕니다.
인천의 윌 스트리트
인천중구청에서 바다가 보이는 내리막길로 내려가면 특이한 건축물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20세기 전후에 지어진 것으로 단층이거나 규모가 크지 않지만 독특한 건축양식들을 자랑합니다. 바로 일본이 인천에 진출하면서 세운 은행 지점들입니다. 일본은 조선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금융기관들을 진출시켰습니다. 경인선이 놓이기 이전에는 경성보다는 인천에 먼저 자리를 잡게 되는데 조계지가 있고, 교통과 통신이 더 편리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은행 지점 건물은 제1은행, 제18은행, 그리고 제58은행입니다. 일본의 국립은행조례에 따라 가장 먼저 인가를 받은 제1은행은 1878년 부산에 지점을 내면서 조선에 진출합니다. 인천지점은 1883년 세워졌는데 현재의 건물은 1897년부터 2년간에 걸쳐 지어진 것입니다.
단층이긴 하지만 그리스 신전의 건축 양식을 빌려왔고, 지붕에는 돔까지 있습니다. 뒤쪽으로는 금고 역할을 하는 건물과 이어져있는데 내부는 현재 인천 개항박물관으로 사용 중으로 열차 모형과 전화기 같은 것들이 전시 중입니다. 제18은행 인천지점도 현재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1은행 지점처럼 화려하지는 않고 일본풍이 많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내부에 들어가면 존스턴 별장을 비롯해서 오례당, 세창양행 사옥처럼 지금은 볼 수 없는 근대 건축물들의 모형을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일제 강점기 인천의 모습을 재현한 디오라마로 전시되어 있답니다. 바로 옆에 있는 제58은행 인천지점 건물은 현재 사무실로 이용 중이라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외형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다른 은행지점들과는 달리 2층 건물로 되어 있고, 프랑스풍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습니다. 현관 위 2층의 발코니는 물론 창틀과 처마가 매우 화려한 편이죠. 이 세 건물들은 모두 신포로 23길에 나란히 있습니다. 그리고 이 거리의 시작점에 대불 호텔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
대불호텔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호텔입니다. 1884년 즈음에 일본인이 지은 곳으로 처음에는 일본식 목조 2층 주택으로 지어졌습니다. 당시 한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인천항으로 들어와서 짐을 들어줄 일꾼이나 가마를 구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하루나 이틀 정도는 이곳에 머물러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외국인 선교사나 사업가들이 머물만한 숙소가 필요했습니다. 덕분에 대불호텔은 영업을 시작한지 4년 만인 1888년 3층 벽돌 건물로 신축하게 됩니다. 모두 11개의 객실이 있었고, 식당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큰 홀이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아펜젤러나 언더우드 같은 선교사들은 물론 외교관과 사업가들이 주로 머물렀습니다. 외국인 고객을 위해서 서양식 식사가 제공되었는데 이때 커피도 함께 주어졌다면 우리나라 최초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창 전성기를 누리던 대불호텔은 1899년 인천과 한성을 연결하는 경인선이 완공되면서 쇠락하게 됩니다. 더 이상 인천에서 머물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중화루라는 중국음식점으로 바뀌었다가 1978년 철거됩니다. 이후 공터로 남아있다가 올해 초에 새롭게 복원되었습니다. 방문했을 당시에는 아직 내부 정리가 안되어 있는 상태라 좀 어수선했습니다. 청나라와 일본의 조계지의 흔적이 있는 인천은 우리 근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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