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동화

김포인과 꿩의 약속

김포인과 꿩의 약속 김포인과 꿩의 약속
나는 김씨 아저씨 포클레인입니다. 얼굴에 코끼리의 코처럼 길고 큰 삽을 들고 있어요.

이 삽으로 흙을 퍼내고 파헤치고 옮기고 바닥을 다집니다. 하는 일이 아주 많지요. 그래서 김씨 아저씨는 나를 아주 자랑스러워합니다.

이름도 지어주셨는걸요? 김포인이라고.

녹슬고 여기저기 긁힌 자국투성이지만 이래봬도 난 온전한 이름을 가진 베테랑 포클레인입니다.

김씨 아저씨와는 손발이 척척 맞아서 무슨 일이든 눈감고도 할 수 있어요.

하루 일을 마치면 김씨 아저씨는 “김포인, 오늘도 수고했다.” 하시는데 그때 나는 정말 행복해요.

유월의 어느 날, 김씨 아저씨는 개망초로 뒤덮인 산 밑의 구릉진 언덕에 나를 내려놓았어요.

이 땅의 주인이 여기에 멋진 집을 짓는답니다.
“내일 보자, 김포인! 아침 일찍 올게.”
아저씨가 돌아간 뒤에 혼자 주위를 둘러보니 ‘참 아늑한 곳이다.’란 말이 절로 떠올랐어요.

어머니가 아기를 품에 안고 어르고 있는 것 같았어요.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강을 건너온 햇빛이 평화로이 노니는 곳이었어요.

잔돌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밭고랑에는 새로 피어나는 어린 개망초와 하늘하늘한 냉이꽃과 쑥, 토끼풀, 씀바귀, 노란 민들레가 내 활개를 치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풀들의 천국이라고나 할까요.

이런 곳이라면 어린 동물들이 얼마나 잘 뛰어다닐까요.

김씨 아저씨는 아랑곳 하지 않지만 나는 종종 이런 땅에서 일을 할 때 마음이 좀 불편했습니다.

아기 동물들의 놀이터를 덮치는 것 같아서요.
“아, 좋다! 바람도 시원하고 정말 조용하네. 잠이 솔솔 오네.”
그때 누가 나를 불렀습니다.
“이 괴물 포클레인아! 여기는 내 자리야. 그 엉덩이 좀 치우고 저리 멀리 떨어져.”

“뭐라고? 누가 나를 괴물 포클레인이래? 난 김포인인데.”
나는 최대한 교양을 갖추며 중얼거렸어요. 그런데 누가 내게 말을 걸었는지는 알 수 없었어요.
“여기야, 여기! 바로 네 발밑이라고. 이게 너의 발이 맞다면.”
몇 번을 두리번거린 후에야 나는 내 왼쪽 개망초 덤불 속에 나를 노려보는 눈을 찾아냈어요.

꼼짝을 않고 있는 걸 보니 알을 품고 있는 꿩이 틀림없었어요.
“미안, 네가 여기 먼저 차지하고 있는 줄 몰랐네. 알았어도 할 수 없었겠지만.”

“인사가 좀 애매하네. 어쨌든 나와 내 열세 알 아기들이 여기 있으니까 조심을 해달라는 거야. 아기들이 지금 무럭무럭 크고 있다고.”
난 불현듯 내일부터 이곳이 파헤쳐질 거라는 사실이 떠올랐어요.
“안 돼. 지금 당장 자리를 옮겨야 해. 내일부터 공사를 한다고! 그러면 이곳이 엉망이 될 거야.”
꿩은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입을 다물었어요.
“절대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누구 맘대로! 그리고 얼마 안 남았어. 일주일이면 된다고. 일주일이면 내 아기들이 알 껍질/알껍데기를 깨고 나올 거라고.”

몸을 부르르 떨며 꿩은 절규했어요. 이번에는 내가 가만히 있었어요.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네가 우리를 지켜줘. 넌 그럴 수 있어. 다른 포클레인과는 다르잖아. 이름도 갖고 있고 나와 말도 통하고. 네가 어떻게 해줘.”

“나도 어쩔 수 없다고. 난 그저 아저씨가 하라는 대로 할 뿐이야. 내 맘대로 못해.”

“아냐, 넌 네 맘대로 움직일 수 있어. 너 자신을 믿어 봐.”
우리는 그 이후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어요. 나는 나대로 꿩은 꿩대로 혼자 하는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밤처럼 깊어졌습니다.

다음날, 이른 아침인데 김씨 아저씨가 와서 나를 깨웠습니다.
“안녕? 푹 쉬었지? 그럼 오늘 일 시작해볼까?”
물론 나는 푹 쉬었습니다. 쉬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죠.

산에서 부는 시원한 바람, 별이 가득한 밤하늘, 풀벌레 소리…….

하지만 일을 바로 시작하고 싶지 않았어요.

어제 꿩과 나눈 대화가 뇌리에 맴돌았습니다.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슬쩍 곁눈질을 하니 꿩은 전날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붙박여 앉아 있었어요. 물은 언제 마시고 화장실은 언제 갔다 오는지…….
김씨 아저씨가 소리쳤어요.
“어이, 김포인, 뭐가 문제지? 밤새 잠 안 자고 놀러 다녔어? 왜 이래? 왜 오른쪽으로 가니? 그것도 굼벵이처럼.”
내가 나도 모르게 꿩이 있는 개망초 덤불을 피해 오른쪽으로 옆걸음질을 한 거예요.

김씨 아저씨는 나를 살살 달래며 왼쪽으로 핸들을 돌렸는데 그래도 나는 계속 옆으로 걷는 게처럼 오른쪽으로 몸을 옮겼어요.

급기야는 맘씨 좋은 김씨 아저씨가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어요.
“알았어. 오른쪽부터 하자는 말이지? 그래, 네가 하자는 대로 하지 뭐.”

“감사합니다!”
김씨 아저씨와 나는 열심히 일을 했어요.

아저씨는 땀으로 뒤덮이고 나는 먼지로 뒤덮였지요. 아저씨는 물을 틀어서 흙먼지를 닦아주고는 (이때 정말 상쾌해요.)

처음 있던 자리에 나를 내려놓고는 “수고했다. 김포인! 내일은 왼쪽이다.” 하고는 집으로 돌아갔어요.
“아, 시끄러워 죽는 줄 알았어. 도대체 언제까지 하는 거니?”
꿩이 부리를 쫑긋거리며 내게 먼저 말을 붙였어요.
“그게 그러니까……. 점심때 아저씨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엿들었거든. 공사는 가을이 되어야 끝난대. 그러니까 너도 다르게 생각을 해 봐. ‘꿩 먹고 알 먹고.’ 하는 말이 왜 생겼는지 알아? 그렇게 버티고 있다가는 너도 잡히고 알도 잡힌다고. 알은 다시 낳으면 되잖아.”
꿩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어요.
“뭐라고? 알을 포기하라고? 그건 엄마가 하는 일이 아니야. 엄마들은 그렇게 못해. 너도 알을 낳아봤다면, 엄마가 되어봤다면 그렇게 못할 거야. 자기 아기를 버리는 부모가 어디 있니?”
나는 할 말이 없었어요.

저녁 해는 긴 옷자락 같은 노을을 거뭇거뭇한 산등성이에 걸쳐놓고 멀어져갔어요.

내일은 꿩과 열세 알들에게 마지막 날이 될지 몰라요.
‘아, 내가 어떻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속으로 가슴을 쳤어요.

다음날 김씨 아저씨가 올라타 왼쪽으로 핸들을 돌렸을 때 나는 또다시 이를 악 물고 저항을 했어요.

아저씨는 급기야 언성을 높였어요.
“너 왜 그러니? 왼쪽으로 몰아도 오른쪽으로만 가고. 자꾸 말을 안 들으면 고물상에 팔아버릴 거야. 부지런히 해야 오늘 할 일을 다 마칠 수 있어.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니야.”
그래도 내가 계속 버티자 김씨 아저씨는 처음으로 나에게 소리를 질렀어요.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가 되고 싶어? 더 화내기 전에 말 들어.”
내가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라고?

김포인이란 이름은 완전히 잊어버린 걸까? 김씨 아저씨가 나를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 걸 보니 슬픔이 밀려왔어요.

나도 죽을 수 있다는 말이잖아요. 이렇게 힘차게 살아 있는데 감히 나를 죽게 한다니. 나도 살 권리가 있는데…….

김씨 아저씨와 나는 하루 종일 옥신각신 실랑이를 했어요.

더는 못 참겠는지 아저씨는 작업을 중단하고 나를 정비소에 데려간다며 트럭에 실었어요.
“뭐가 고장 났는지 모르지만 너, 내일도 그러면 이제는 끝장이다. 너를 수리하느니 다시 새 놈으로 사는 게 낫지. 신형 김포인으로.”
포클레인도 울 수 있다면 나는 눈물을 한 바가지나 쏟았을 거예요.

눈물을 참고 있자니 몸이 더 심하게 떨그럭거렸어요. 내 운명은 어찌 될까요.
“아무 이상이 없어요. 엔진도 정상이고 브레이크나 핸들도 문제없고. 그런데 오른쪽으로만 간다고요? 참 이상하네…….”
정비사가 우물쭈물하는 말에 아저씨는 역정을 내고는 나를 도로 트럭에 태웠어요.

설마 이대로 폐차장으로 가는 건 아니겠지 했는데 개망초 언덕으로 향하는 걸 보고 안심을 했어요.

멀리서도 보이는 하얀 개망초꽃들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아저씨도 마음이 풀어졌는지 이렇게 중얼거렸어요.
“어제 내가 술을 너무 마셔서 조작을 잘못 했을지도 몰라. 오늘은 일 그만 하고 좀 쉬자꾸나.”
아저씨는 고물 덩어리라고 말한 거 취소한다며 내게 미안하다고 했어요.
“잊어버려라. 다시 열심히 해보자.”
가슴이 쓰렸어요. 김씨 아저씨에게 꼭 배신을 하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나는 다만 알을 지키려는 꿩 엄마와 따뜻한 열세 알을 살게 해주고 싶을 뿐인데…….

내가 집짓는 걸 방해하거나 뭐 그런 게 아니라 곧 알을 깨고 나올 열세 마리의 아기 새들에게 이 숲과 하늘을 보게 해주고 싶을 뿐인데…….

하루만이라도 이 개망초 언덕의 흙 내음과 풀향기, 바람 냄새를 맡게 해주고 싶은데…….

다음날 아침이었어요. 결단을 내려야 했어요.

어느 때보다도 기분 좋게 아저씨는 “김포인, 잘 쉬었니? 오늘은 새 마음으로 잘 해보자!” 하고 미소 지었어요.

나는 여전히 궁리 중이었어요.

아니 궁리는 끝났지만 가슴이 조마조마했어요. 하도 긴장이 되어 몸이 부르르 떨렸습니다.

꼭 고장이 나기 직전인 것처럼요. 나에게 올라탄 김씨 아저씨도 긴장이 되었는지 심호흡을 했어요.
“자, 왼쪽이다. 왼쪽!”
김씨 아저씨는 일부러 소리 높이 외치고는 내 몸을 앞으로 빼서 팔을 내두를 공간을 확보한 다음, 왼쪽으로 내 팔을 길게 움직이게 했어요.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순간이 왔어요.

나는 팔을 조금씩 조금씩 꿩이 앉은 자리로 내뻗었어요.
그러고는 크게 손목을 움직여 흙더미를 떠올렸어요.

꿩은 거대하고 흉측한 갈퀴손이 자기 앞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부르르 떨었어요.

그러곤 더욱 아기들을 꼭 끌어안았죠. 전날 밤에 미리 말해두지 않았다면 꿩과 열세 알들은 기절하고 말았을 거예요.
“성공할 수 있을까?”

“그 방법밖에는 없어.”
이게 우리가 나눈 대화였죠.

김씨 아저씨 눈에는 제발 그저 그런 개망초 흙더미로 보이기를 바랐는데, 내가 꿩이 앉은 흙더미에 닿는 순간 몸이 앞으로 쏠리면서 눈이 크게 열리더라고요.

그래서 꿩과 나는 다 틀렸다 하고 낙담을 하는데 순간 전화벨 노랫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것입니다.

누가 아저씨에게 전화를 한 거예요.
“어, 아들! 웬일이야? 정말? 잘 됐네. 축하해. 그래, 언제부터 출근이야? 우아, 그렇게 빨리! 그래그래, 오늘 축하파티하자. 응응.”
다행스럽게도 반가운 소식이었어요.

기분 좋게 흐흐 웃으며 아저씨가 전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나도 개망초 흙더미를 그 전날 보아둔 지점에 무사히 내려놓았어요.

작은 개울이 흐르는 그늘진 숲 언저리였어요.

아저씨가 보기 전에 나는 얼른 방향을 오른쪽으로 바꾸어 공중에 팔을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아, 무얼 하다가 말았지? 그래, 왼쪽 땅을 파던 중이지, 참. 그런데 넌 왜 그렇게 벌을 서고 있는 것처럼 공중에 팔을 뻗고 있지? 미안 미안. 팔 아프겠다.”
꿩은 이제 내 시야에서 멀어졌어요. 그래도 내 귀에는 꿩의 목소리가 산새들 소리에 묻혀서 들리는 듯했어요.
“고마워! 여기가 더 좋은데? 우리는 무사해. 걱정 마!”
나도 흐흐 했어요.

개망초 풀밭에 또 누가 둥지를 틀고 있다면, 이제는 어떻게 할지 알 것 같아요.

진짜 베테랑이 된 기분이 드는 건 무엇 때문인지…….

오늘 저녁 일을 마치면 아저씨가 예전처럼 “김포인, 수고했어!”라고 말해주실까요? 그러면 이렇게 말해야겠어요.
“아저씨도 수고했어요. 그리고 그런 반가운 전화가 종종 왔으면 좋겠어요.”
채인선(1962년생)_저서 『행복이 행복해지기 위해』 『평화가 평화롭기 위해』 『내 짝꿍 최영대』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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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06-26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