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동화

사물놀이

김포인과 꿩의 약속 김포인과 꿩의 약속
안경이는 안경을 쓰지 않았지만 안경이고, 거울이는 안경을 쓴 거울이고, 종이는 연필보다 지우개를 좋아하고, 연필이는 거울이를 좋아한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기로 했다.
“거울아. 나 거울 좀.”
거울이는 항상 거울을 보고 있다. 손바닥만 한 손거울은 거울이가 항상 들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거울이 없으면 하루 온종일 힘도 없고 우울하다고 했다. 그래서 거울이의 곁에는 항상 거울이 있었다. 

우리는 거울이의 책가방 안에 거울이 열 개나 들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거울이가 가장 아끼는 거울은 늘 거울이와 붙어있다. 

거울이는 종이의 말에 가방에서 거울을 하나 꺼내 종이에게 건넸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너희 뭐 하는 거야?”
우리는 쉬는 시간마다 모여 앉아 수다를 떨었다. 목적은 딱 하나였다. 서로에게 붙여진 새로운 이름을 듣기 위해서였다. 

이 다섯 명이 아니면 각자가 선택한 새로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많이 새로운 이름이 듣고 싶었다. 

원래는 서로 친하지도 않았던 우리가 서로를 자신들만 아는 이름으로 부르고, 쉬는 시간마다 모여 앉아 있으니까 궁금했던 모양이다. 

우리는 서로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
우리 중 아무도 이 놀이의 이름을 몰랐다. 누군가 가르쳐준 놀이도 아니었고, 어디선가 들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놀이에는 이름이 없었다.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그러게’라니. 너희는 너희가 뭐 하고 있는지도 몰라?”
“아. 우리가 하는 건 사물놀이야.”
지우개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사물놀이. 듣고 보니 딱 맞는 말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사물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러니 사물놀이가 맞았다.
“사물놀이는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거잖아. 너희가 하는 건 사물놀이가 아니야.”
“아니면 뭔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너희가 알겠지!”
우리에게 말을 건 아이는 이제 버럭 화까지 냈다. 

우리는 ‘사물놀이’라는 이름이 우리가 하는 놀이에 딱 맞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아이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물놀이를 하고 있는 거라고. 우리가 그렇다는데 왜 네가 아니라고 해?”
거울이의 눈초리가 유독 뾰족해 보였다. 위로 삐죽 솟은 눈매 때문에 거울이를 처음 본 아이들은 거울이의 성격이 나쁠 거라고 생각하기 일쑤였다.

실제로 성격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우리도 거울이와 친해지기 전까지는 몰랐던 사실이다. 말을 건 아이는 거울이의 기세에 우물쭈물 하더니 물었다.
“그게 뭐 하는 놀이인데?”
“물건의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는 거야.”
“그게 다야? 뭐야, 그게. 그런 게 재미있어?”
재미있냐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다. 재미있나? 누구도 선뜻 재미있다고 말하지 못했다.

딱히 재미있지도, 재미없지도 않았다. 그저 남들이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각자가 정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좋았다.
“잘 모르겠어. 처음 해보는 거거든.”
“그럼 그런 놀이를 왜 하는 거야? 재미도 없는데.”
재미가 없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 아이는 재미있지 않으면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물놀이가 딱히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재미가 없지는 않은데.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었다. 

직접 해보지 않으면 이런 느낌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왜 하냐고? 그거야…….”
지우개는 말문이 막힌 듯 말꼬리를 끌었다. 요리조리 눈동자를 굴리는 지우개를 보던 연필이가 나섰다.
“거울이가 나를 연필이라고 놀렸거든. 그래서 내가 ‘그럼 너는 만날 거울만 보니까 거울이냐?’라고 했더니 지우개가 자기는 지우개똥처럼 긴 똥을 쌀 수 있다고 지우개를 한다고 했어.”
이 놀이의 시작이 그거였구나……. 우리는 새삼 깨달았다는 듯이 연필이를 바라봤다. 자신에게 시선이 모이자 연필이의 얼굴은 금세 빨개졌다. 

그러고 보니 연필이와 친해진 것도 사물놀이를 하게 된 후부터였다. 

그 전까지만 해도 연필이는 우리 반에서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지, 친구는 아니었다. 

조금만 잘못해도 똑똑 뼈가 부러지는 연필이와 친구가 되고 싶은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연필이가 연필이가 된 이유이기도 했다. 

연필이는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못 견뎌했다. 그래서 화장실에 가겠다며 빨개진 얼굴로 전동휠체어를 타고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들 자리에 앉아요. 벌써 수업 시작했어요.”
연필이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연필이의 자리는 항상 맨 뒷자리였다. 

그래서인지 가끔 연필이가 돌아오지 않아도 선생님들은 연필이가 자리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연필이 어디 갔지?”
지우개가 뒤를 돌아보며 소곤소곤 물었다.
“필통에 있겠지.”
키득. 웃음이 터졌다. 이 놀이가 재미있는 건 바로 이런 때였다.
“그 연필 말고 연필이.”
연필이는 가끔 교실로 돌아오지 못할 때가 있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지만 움직이는 것이 불편하거나, 짓궂은 아이들이 괴롭히거나 할 때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래서 우리 반 아이들은 학기 초부터 연필이를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필이는 연필심처럼 톡톡 잘 부러졌다. 

번쩍 손을 들어올렸다.
“선생님. 연필이가 없어졌어요.”
“어디 떨어진 거 아닐까?”
지우개와 시선이 마주쳤다. 역시 그런 것 같았다.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시잖아?
“그럼 어떡하죠?”
“주워야지?”
선생님이 이상한 것을 묻는다는 듯이 말했다.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요?”
“그럼 찾아야지.”
“찾아도 되나요?”
선생님은 어리둥절해 하며 대답했다.
“그럼!”
우리는 늘 하던 대로 각자 맡은 곳을 수색하기로 했다.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가려고 하자 선생님이 다급하게 외쳤다.
“얘들아, 수업시간에는 수업을 해야지. 쉬는 시간에 찾으렴.”
“선생님. 쟤네 지금 사물놀이 하는 거예요. 쟤네가 말하는 연필이는 세호에요.”
선생님은 그제야 연필이가 자리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빨리 찾아보라며 호들갑이었다. 

연필이는 화장실에 넘어져 있었다. 

전동휠체어에 벨트까지 매져 있었는데 어쩌다 넘어졌느냐고 물어도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연필이는 넘어지면서 또 팔이 부러지고 말았다. 연필이는 바로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우리는 교무실로 갔다.
“사물놀이인지 뭔지 때문에 세호를 발견하는 게 늦어졌잖니. 그런 위험한 놀이는 하면 안 돼. 처음부터 선생님한테 세호가 사라졌다고 말했으면 세호 팔이 안 부러졌을 수도 있잖니? 게다가 더 위험한 상황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서로를 정해진 이름으로 부르는 건 모두와의 약속이야. 좀 전의 일처럼 혼란스럽지 않도록 말이야.”
어른들은 재미있는 일을 하면 혼낸다. 그 약속이 세호를 연필로 만들었다는 것도 모르고. 

우리에게 약속을 지키라고만 한다. 

만약 연필이 이름이 정말 연필이어서, 선생님이 ‘연필을 쥐세요’하면 사람인 연필이의 손을 꽉 쥔다면, 연필이는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연필로 쓰세요’ 하면 연필이의 손을 쓰다듬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다. 왜 꼭 연필만 연필이어야 할까? 

세상에 연필이가 많아지면 재미있는 일이 훨씬 많아질 텐데. 

그럼 연필이는 사람들에게 주목받아도 금방 얼굴이 빨개지거나 창피해하지 않을 것이다.
“사물놀이는 위험하지 않아요. 그저 이름만 달라질 뿐인 걸요?”
“오늘만 해도 세호가 더 위험해졌을 수도 있어. 함부로 이름을 바꾸는 건 그만큼 위험한 거야. 사람이 살아가는 데 혼란스럽지 않도록 그렇게 부르기로 한 약속이니까. 함부로 약속을 깨면 안 되는 거야.”
“전 약속한 적 없는데요?”
“사회 안에서 살아간다는 건 원래 그런 거란다.”
우리는 사회 안에서 살아가겠다고 한 적이 없다. 

우리는 ‘원래’부터 사회 안에 있었다. 

그래서 ‘원래’ 있던 약속을 지켜야만 하고, 사물놀이는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에 ‘원래’ 위험한 놀이가 되어버렸다.

교무실을 나오는 우리는 시무룩해져 있었다. 

정말 우리 때문에 연필이가 더 위험해졌을까? 지우개가 물었다. 

그럴 리가 있어? 아마 다른 반 애들이 놀려서 넘어진 걸걸? 저번에도 그랬잖아. 거울이가 뾰족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정말 우리 때문에 더 위험해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무서워진 것이다. 

우리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말처럼, 우린 위험한 장난을 하고 있었던 걸까?

우린 그저 서로를 각자의 이름으로 불러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을 뿐이다. 

세호가 세호여야 할 이유, 지우개가 성오여야 하는 이유, 종이가 재희여야 하는 이유, 거울이가 민영이어야 하는 이유, 내가 나이어야 하는 이유 말이다. 

이 학교에서 우리가 아닌 ‘나’는 없다. 

연필처럼 뼈가 잘 부러지는 세호나, 세호를 괴롭히는 아이들이나 우리는 이 학교 안에서 모두 똑같았다. 

어쩌면 그건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평등하다’는 말과도 닮아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평등하게 학교를 다니고, 공부하는 것은 모두가 똑같아지기 위해서는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사물놀이뿐인데. 선생님은 그마저도 하지 말라고 한다. 

그것이 우리는 한 적 없는 ‘약속’이기 때문에.

내가 없는 이유가 ‘약속’ 때문이고, ‘원래’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건 이름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나에 대해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데 이름만 있는 건 너무 슬플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물건이 되기로 했다.
양그림(1993년생)_동화작가 , 제15회 대산대학문학상 동화 부문 수상, 『머리에 꽃』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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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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