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재소설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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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하게 부서지도록 19부

메아리 같은 함성이 들린다. 전광판의 불빛이 깜빡인다.

투 아웃. 스리 볼, 투 스트라이크. 타석이 보인다. 거기 서 있는 건…… 강세연이다.

음, 자세히 보기 위해 나는 눈을 부릅떴다. 강세연이 타석에 서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애는 팀의 에이스지만 제법 타율 좋은 타자이기도 하니까.

스리 투 풀카운트인데 강세연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전혀 없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밝게 웃고 있다. 왜 여유만만하지. 나는 다시 눈에 힘을 준다. 더그아웃이 보인다.

낯익은 착한 얼굴들, 우리 팀 친구들이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내 눈이 훑고 지나간다.

끝까지, 나는 없다. 소름이 돋는다. 내가 있을 곳을 나는 안다.

마운드, 거기 선 나는 빠르게 공을 던진다.

딱. 배트 한가운데 공이 맞는 소리다. 공은 보이지 않지만 누구나 알 수 있다.

홈런. 강세연이 승리자처럼 두 팔을 브이 자로 높이 치켜든다. 나는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다.

“지유야, 지유야, 지유야……”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점점 가까워져 온다. 뭐가 꿈이고, 뭐가 진짜인지 모르겠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흔들어댔다. 갑자기, 새하얀 빛깔의 천장이 시야 가득 들어찼다.

“아 눈 떴어, 떴어. 하느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유난스러운 목소리는 두말할 것도 없이 솔미의 것이다.

솔미는 유니폼 차림 그대로다.

그 옆에 있는 건 지윤, 그리고 그 뒤에 선생님…… 모두들 아까 그대로다.

여기가 병원이라는 것을 나는 순식간에 깨달았다. 내가 공을 맞고 쓰러졌다는 사실도.

“혹시, 너야?”

내 말에 솔미의 뺨이 흙빛으로 변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죽을죄를 졌어.”

마치 애인의 임종을 맞이하는 영화 주인공처럼 솔미는 매트리스 가장자리에 엎어져 흐느꼈다.

“진짜 네가 친 거 맞아? 잘했어. 너 숨겨진 천재였나 봐.”

예능처럼 말하고 싶었는데 어째 다큐처럼 들렸다.

목소리가 잘 안 나와서 그랬다. 선생님이 내 어깨에 손을 얹고서 괜찮은지를 연거푸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간호사가 수액을 조절했다.

“어딜 맞은 거예요?”

선생님이 자신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대더니 오른쪽 눈 옆과 이마 사이 어딘가를 손으로 짚었다.

나도 내 얼굴을 손바닥으로 만져보았다.

두툼한 거즈의 감촉이 느껴졌다. 비로소 그 부분이, 아니 얼굴과 머리 전체가 욱신거렸다.

내가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선생님과 친구들이 일제히 말렸다. 기다렸다가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괜찮아요, 저는.”

“혹시 몰라서 그래. 뇌를 다쳤을까 봐.”

“그럼 좋죠. 이번 기회에 확 똑똑해질지도 모르고.”

“샘, 얘 진짜 좀 이상해진 것 같은데요?”

지윤이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웃으려고 했는데 캑캑거리는 기침만 나왔다.

내게 괜찮은지 연신 묻고, 전 세계의 모든 신께 감사 기도를 올리는 건 솔미의 몫이었다.

“나 정말 괜찮아. 공에 맞은 게 처음도 아니고.”

“전에도 맞은 적 있단 말이야?”

“응.”

그땐 물론 소프트볼 공이 아니라 야구공이었다. 5학년 때였다.

지금처럼 깊은 봄이었다. 옆 학교와의 연습 경기에서 나는 2루수를 맡고 있었다.

상대 타자의 평범한 내야 플라이를 잡으려다 주춤주춤하는 사이, 공이 그대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내 왼쪽 눈두덩이를 인정사정없이 강타했다. 병원에서는 최악의 경우 왼쪽 시력에 이상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설마 안 보이게 되는 건 아니죠?”

엄마는 흰 가운 입은 사람들을 붙들고 몇 번이나 간절히 반복했다.

내 걱정은, 왼쪽 눈이 안 보이거나 오른쪽 눈이 안 보이거나 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다시는 야구를 못 하게 될까 봐 그것만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눈뼈와 이마가 무지무지 아팠지만 그럼 당장 그만두라고 할까 봐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오만 가지 검사를 다 받았지만 요란하게 든 멍 말고는 큰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땐 내가 대단한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설명할 수가 없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세게 날아오는 공에 맞았는데 그때만큼 아프지 않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그동안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혹시 나라는 아이가 더 단단해진 걸까? 감상에 잠길 틈도 없이 병실 문이 홱 열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미성년자이며, 엄마의 딸이라는 건 똑같았다.

“미쳤어.”

엄마의 첫마디였다. 나직했다. 모든 걸 다 알게 되었다는 말투였다. 가만히 있던 벽이 갑자기 출렁출렁 흔들렸다.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비겁한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하고 나온 거짓말들이 하나하나 분해되어 침대를 휘감았다.

“지유 어머니, 많이 놀라셨죠?”

“네, 솔직히 놀랐습니다.”

어둠 속에서 선생님과 엄마가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가 맥없이 널브러져 있던 내 손을 꾹 잡았다.

따뜻한 손이었다. 살며시 실눈을 떠보았다.

손목을 보니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고 빼빼 마른 손목. 지윤이었다.

나는 그 손에 힘을 주었다. 그것밖에 달리 할 일이 없다는 듯이.

정이현 작가 사진

정이현 작가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상냥한 폭력의 시대』,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사랑의 기초ㅡ연인들』 『안녕, 내 모든 것』, 짧은 소설 『말하자면 좋은 사람』, 산문집 『풍선』 『작별』 등을 펴냈다. 이효석 문학상, 현대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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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05-10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