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 중에 길을 헤매던 남자

1623년 5월, 강화도에서 한 병졸이 밤에 순찰을 돌다가 길을 헤매고 있는 젊은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 도망가는 남자를 붙잡아 수색해 보니 은덩어리와 쌀밥, 그리고 황해도 관찰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나왔다. 심문을 해 보니 그 남자는 바로 광해군의 아들, 이지였다. 세자였던 그는 왜 한밤 중 강화도에서 길을 헤매고 있었던 걸까?

광해군 일가의 비극, 그리고 폐세자의 탈출

임진왜란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은 피난을 간 선조 대신 조정을 이끌어 민심을 얻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국가의 제도를 개편하고, 중립 외교를 펼치며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을 정비해 나갔다. 하지만 무리한 토목공사와 정적과 종친의 처단으로 인해 민심을 잃게 되었고, 결국 서인세력이 일으킨 정변으로 인해 궁에서 쫓겨나게 된다.

광해군 일가는 강화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이런 고립된 삶을 광해군은 견뎠지만 그의 아들인 이지는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결국 이지는 한양으로부터 받은 생활 물품에서 발견한 가위와 인두로 집 주변에 쳐진 울타리 밑으로 땅굴을 파 탈출을 시도하게 된다.

쓸쓸한 최후를 맞이한 아버지와 아들

이지는 26일동안 땅굴을 파서 여비와 식량을 챙기고, 나루터를 통과하기 위해 관찰사의 편지까지 위조하여 준비한다. 그는 결국 몰래 땅굴을 통해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쪽 지리에 밝지 못했던 이지는 결국 길을 잃어버렸고, 순찰을 돌던 병졸에게 잡히면서 그의 탈출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조정에 보고되었고, 인조와 신하들의 긴 논의 끝에 이지에게 자결을 명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이지는 그렇게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 광해군은 왕위와 가족을 모두 잃었지만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자신을 구하러 올 거라 믿으며 17년동안이나 삶을 이어 간 이후 쓸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울타리 밖으로만 나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되었을거라 믿은 이지와 맹목적인 희망을 가졌던 광해군, 우리는 그들의 선택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