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원작 대 영화

영화와 소설, 서로 바꾸어 꿈꾸기

원작 대 영화 - 너의 이름은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원작 대 영화 - 너의 이름은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산골마을 이토모리에 사는 여고생 미츠하가 어느 날 꿈에 도쿄의 남자 고교생 타키가 된다. 타키 역시 그 시간에 미츠하가 되는 꿈을 꾼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은 이렇게 꿈에서 몸이 뒤바뀐 둘의 운명과 사랑, 인연과 만남의 이야기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판타지의 세계를 일본의 전통적
정서와 현실 위에 올려 10대의 순수와 용기, 사랑
과 꿈을 펼친 애니메이션에 일본은 물론 중국과
한국의 청소년들이 흠뻑 빠졌다.

일본 순정만화나 소설 같은 유치한 정서가 분명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인연과 사랑을 뛰어난 색채와 빛 그리고 소리로, 아프고 시리고 벅차고 애잔하게 그린 감독의 솜씨가 놀랍기는 하다.

10대, 시간, 거리, 만남, 인연, 순수, 사랑. 마코토 감독의 작품을 특징짓는 주제어들이다. 이는 <너의 이름은>에 앞서 나온 <초속 5센티미터>와 <언어의 정원>에서 이미 증명됐다. 그의 애니메이션은 10대 청소년의 자리에 머문다. 마치 감독 자신이 거기에서 시간을 멈춰 버린 것처럼, 아니면 그 시간에 대한 집착과 애정을 버리지 못한 것처럼.

어쩌면 어느 시절보다 순수하고 강한 그곳에서의 시간과 인연, 사랑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기억이자 삶이라고 믿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2007년의 <초속 5센티미터>에서 그 인연은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 속도로 살아가는 주인공들에 의해 쓸쓸하게 끊어졌다. 7년 후, <언어의 정원>에서도 열여섯 살의 고교생 다카오과 그보다 열두 살이나 많은 여선생 유키노의 사랑은 망설이다 애잔하게 떠나갔다.

원작 대 영화 - 너의 이름은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원작 대 영화 - 너의 이름은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그러나 마코토 감독은 그 운명의 끈이 언젠가는 반드시 이어지리라는 것을 믿는다. 세월의 간격이 아무리 크고(언어의 정원), 서로 알 수 없는 시간 속을 걷고 있어도(초속 5센티미터), 다카오의 말처럼 더 멀리 걸을 수 있게 되고, 가슴 속 저 깊은 곳에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면.

<너의 이름은>에서는 그 마음이 너무나 간절한 나머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도 뛰어넘고, 죽음까지도 초월한다. 주인공 타카와 미츠하는 <초속 5센티미터>에서 추억으로 넘겨버리는 다카키와 아카리와 다르다. <언어의 정원>의 다카오처럼 먼 훗날을 기약하지 않는다. 온몸을 다해 달려가고, 운명처럼 다시 만나고, 한눈에 인연의 끈을 기억하면서 서로를 확인한다.

<너의 이름은>은 비현실적이다. 설정과 스토리 전개도 새롭지는 않다. 3년의 시간을 건너 인연으로 연결하는 타임슬립은 우리 영화 <시월애>와 흡사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바꾸는 이야기는 프랑스 작가 기욤 뮈소의 동명소설이 원작인 한국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에서도 봤다.

원작 대 영화 - 너의 이름은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없는 10대 소년의 순진한 환상과도 같은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이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이유는 그 색채와 느낌에 있다. 지극히 일본적이면서도 모두의 마음을 울리는 정서, 빛과 소리의 절묘한 배치, 마치 사진처럼 생생한 공간, 풍경과 인물의 섬세한 묘사, 그것이 가진 상징과 비유와 은유가 작품을 한 차원 높은 감성으로 이끈다.

때문에 그의 애니메이션은 상상의 판타지가 아니라 감성의 판타지이다. 소리 없이 내리는 겨울 산속의 눈, 눈처럼 떨어지는 벚꽃, 등나무가지에 맺혔다 호수로 떨어지는 물방울의 모습과 소리가 시간과 마음이 되고, 그 시간과 마음속의 수많은 감정들을 불러낸다.

<언어의 정원>에서는 오랜 세월 일본인들의 가슴을 애잔하게 적신 일본 고전문학인 만요슈의 한 구절 ‘우렛소리 희미하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면 그대 붙잡으련만’이 영화를 삶과 세상 속으로 들어오게 한다. <너의 이름은>에서는 일본 전통공예인 매듭이 시간과 공간, 사람과 신, 만남과 운명을 연결하는 끈(무스비)이 된다.

그 상징과 은유로 마코토의 영화는 ‘인연’을 찾아 나선다. 그 인연은 매듭처럼 꼬이기도 하고, 때론 엉키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고, 다시 이어지기도 한다. 인연을 만드는 시간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서로가 엇갈려 끝내 다른 길을 가기도 하고, 지금은 서로 떨어진 채 미래를 기약하기도 하고, 꿈속에서 서로 몸이 바뀌면서 잠시 만나기도 한다.

<너의 이름은>은 우리 모두 어딘가에 깃든 소중한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삶을 살아간다고 했다. 그것을 위해 타카는 온 힘을 다해 3년의 시공간을 넘어 아믈에 혜성이 충돌하면서 목숨을 잃은 미츠하를 다시 살려내, 끊어진 인연을 다시 이었다.

그 인연과 기억을 마코토 감독은 판타지와 현실의 이질적 무대 위에서 10대의 감수성으로, 그것도 애니메이션이라는 살아있는 배우가 아닌 그림의 움직임으로 고집스럽게 표현한다. 이렇게 섬세한 감성을 타고난 감독은 운명적으로 고통스럽다. 그야말로 운명적으로 바람에 떨리는 작은 잎새의 속삭임도 놓치지 않고 들으니까. 더구나 그 섬세한 감성과 시선이 영화에 머물지 않고, 소설에까지 미친다면.

마코토 감독이 그렇다. 그는 스스로 소설의 ‘언어의 정원’에까지 들어갔다. 이 또한 그가 영화에서 찾는 운명이고, 인연이고, 끈이다. 마치 타카와 미츠하가 몸을 바꾸어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고, 조금씩 상대를 메워주면서, 마침내 사랑하게 되듯.

그의 영화는 소설이 되기를 꿈꾸었고, 그의 소설은 영화가 되기를 꿈꾸었다. 처음 <초속 5센티미터>에서는 영화가 먼저 소설의 꿈을 꾸었지만, <너의 이름은>에 와서는 영화와 소설이 동시에 서로의 꿈을 꾸었다. 그리고 주인공들처럼 꿈속에서 경험한 것들을 서로에게 이야기하면서 각자의 모습을 완성해 갔다.

소설과 영화가 서로에게 ‘원작’이 되고, 상대에게 소중한 ‘영감’을 주는 이런 일이 가능할까.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과 소설은 그렇다고 말한다. 소설에 영화적 상상력을 입혀 새로운 작품으로 만드는 작업은 수없이 있어 왔고, 성공도 많았다. 그러나 영화가 소설의 문장과 상상력으로 태어나는 것은 좀처럼 볼 수 없고, 또 성공한 적도 없다. 영상이 가진 압축적인 이미지와 상징들을 언어로 풀어내고, 문학적 상상력으로 변주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마코토도 처음에는 그랬다. 소설 <초속 5센티미터>는 그야말로 영화의 상상력과 표현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그야말로 영화의 ‘관련 상품’, ‘기념품’에 불과했다. 영화를 그대로 풀었으니, 소설에 묶인 영화보다 더 빈약하고 초라했다. 섬세한 표현과 은유와 상징,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타고난 재능을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원작 대 영화 - 너의 이름은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그러나, 그는 소설 『언어의 정원』에서 보란 듯이 이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는 우선 구성과 시점부터 영화와 달리했고, 영상(그림)으로 도저히 표현 불가능한 풍경이나 표정을 비유와 상징의 언어들로 소설에 표현했다. 주인공 두 사람만이 아닌 등장인물 모두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고전문학으로 스토리를 풍부하면서도 입체적으로 변화시켰다. 45분의 짧고 얇은 영화보다 소설이 ‘원작’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깊고 넓으며 독창적이다.

아마도 그런 느낌은 투명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된 이미지와 상상력의 묘사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물과 꽃이 어우러진 농밀한 냄새가 유키노에게서 나오는 은은한 향기에 섞여 어두운 정자를 메웠다’, ‘비에 까맣게 젖어 오랜 세월 같이 살아온 아내에게서 버림받은 노인처럼 적막해보였다’ 같은 것들이다. 영상이나 그림으로는 표현할 길이 없는 절묘한 은유와 비유이다.

소설을 읽으면 영화가 말하려는 풍경이 사람의 마음을 만들고,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희구하는 마음이 이 세상을 만들어 간다는 것을 명징하게 느낄 수 있다. 이 같은 문장 묘사법을 칼럼니스트인 칸타 노리코는 ‘부유감’이라고 했다. 영화의 카메라나 등장인물과 달리 서술자의 시점이 때때로 두둥실 떠올라 어디든 마음대로 다가가서 보는가 하면, 마지막에는 서로 시점이 빠르게 맞부딪쳐 스토리 라인과 배경과 고전문학으로 어우러진 빛을 난반사시키듯 한다는 것이다.

원작 대 영화 - 너의 이름은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적어도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과 전작인 『언어의 정원』만큼은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꼭 한번 읽기보기를 권한다. 영화에서 미처 느끼지 못한 감성들까지 살아날 것이다. 영화를 다시 한 번, 그리고 더 깊고, 아름답게 ‘기억’하게 할 것이다.

마코토 감독은 처음에 <너의 이름은>을 소설로 쓸 생각이 없었다. 애니메이션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로에게 선물을 주고받듯’ 영화하면서 소설을 썼으며, 소설이 영화보다 몇 달 앞서 나왔다. 『언어의 정원』처럼 아예 틀을 바꾸지도 않았고, 스토리도 다르지 않지만 소설 『너의 이름은』은 단순히 영화를 서술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시점을 두 주인공의 1인칭으로 바꾸고, 영화에서는 들을 수 없는 음악의 리듬과 가사를 주인공의 중요한 감정으로 바꾸었다. 『너의 이름은』의 매력 역시 영화에서 빛과 소리, 그림으로 상징화한 이미지들을 공감각적 언어로 은유하고 묘사한 부분이다. ‘딸깍하는 금속음이 저녁 매미 울음소리에 녹아든다’거나, ‘새어드는 아침햇살은 마치 새것처럼 깨끗하다’든가, ‘젖은 공기가 간신히 목소리가 되어 나왔다’든가. 이런 탁월한 감각과 문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의 애니메이션이 사람들의 마음을 떨리게 할 수 밖에.




이대현_영화평론가. 1959년생저서 ‘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열일곱, 영화로 세상을 보다’ ,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등
  • 본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 본 콘텐츠는 사전 동의 없이 상업적 무단복제와 수정, 캡처 후 배포 도용을 절대 금합니다.
작성일
2017-04-06

소셜 댓글

SNS 로그인후 댓글을 작성하시면 해당 SNS와 동시에 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공유하기

URL 공유시 전체 선택하여 복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