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대 영화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만나다

원작 대 영화 - 여자의 일생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원작 대 영화 - 여자의 일생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각색에도 참여한 스테판 브리제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원작을 배반하는 것만이 원작에 충실한 방식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나의 과제는 문학적인 측면을 부수어 영화적인 이야기로 재탄생시키는 것이었다.”

맞는 얘기다.
영화는 소설을 배반해야 한다.
배반하지 않고는 영화가 될 수 없다.

배반하지 않고는 영화가 될 수 없다. 배반함으로써 오히려 소설에 충실할 수 있다는 이 이율배반적인 감독의 말에서 둘 사이의 아득하면서 결국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소설과 영화의 ‘운명’을 예감한다.

문학적인 것을 부수고 뒤섞고 다시 쌓아 영화적인 이야기로 만든다는 것. 원작이 있는 영화가 가야할 길이고, 영원한 숙제이다. 거기에 정답은 없다. 그 답을 찾아가야 할 사람은 오로지 감독이다. 그리고 그것이 맞는 답인지 아닌지의 판단은 독자, 관객의 몫이다.

프랑스 차세대 거장으로 꼽히는 스테판 브리제 감독은 소설의 작가 전지적 시점과 달리 모든 것을 잔느의 시점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다. 선형적 구조를 지닌 원작과 달리 잔느의 회상을 활용, 시간대를 유기적으로 배치시켰다. 인간은 그렇게 선형적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삶은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는 것이다. 뒤섞인 시간구조를 지닌 영화, <여자의 일생>이다.

원작 대 영화 - 너의 이름은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원작 대 영화 - 너의 이름은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우선 두 가지 사실이 의아하다. 이 소설이 이전에 한 번도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이제 와서 영화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모파상의 주옥 같은 단편들에는 못 미친다고는 하지만 그의 대표작이자 고전으로 꼽히는 장편에 영화가 눈을 돌리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어찌 보면 뜬금없는 영화가 됐다.

‘뜬금없는’이라고 한 것은 다름 아닌 소설이 가진 시대적 감성과 감각, 그것까지 부수어 시대를 넘어서지 못한 영화를 두고 하는 말이다. 톨스토이가 ‘아마도 위고의 『레미제라블』이후의 가장 뛰어난 프랑스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극찬을 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은, 그러나 시대 속에 갇힌 소설이 되었다.

그것은 명징한 문체, 간결하고도 섬세한 묘사, 흥미롭고 긴장감 높은 극적 구성을 가진 뛰어난 사실주의 문학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평론가의 불만처럼 “그의 스승인 플로베르나 도데처럼 인물을 자신의 내부에 살게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여주인공의 삶과 운명에 작가의 따스한 연민의 정이 스며있다 해도 그것은 관찰자로서의 묘사일 뿐, 작가 자신의 삶을 투명하거나 삶의 시간 속에 담은 것은 아니다.

원작 대 영화 - 너의 이름은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그것은 모파상이 가진 인생관, 이를테면 지독한 염세주의, 비관주의, 냉정한 시선,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여자의 일생>은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19세기 말, 프랑스 노르망디에 살던 어느 여자의 개인적인 이야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그 현실의 아이러니와 부조리를 드러내면서도, 그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애정과 사상이 그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소설 『여자의 일생』의 주제이자, 작가의 메시지이기도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렇게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것인가 봐요”란 마지막 구절, 그것을 정작 소설 전체의 삶을 관통해온 주인공 잔느가 아닌 하녀 로잘리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마치 세밀한 풍경화를 보는듯한 작가의 이 같은 시선과 마음, 표현은 독자들에게까지 알게 모르게 전달된다. 그래서 『여자의 일생』은 뛰어난 소설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인물에 가진 연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감상에 그치고 만다. 시대를 뛰어넘기는 고사하고, 그 시대의 보편성조차 얻지 못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여자의 일생』을 관통하는 정서는 불행한 삶이 가져온 아픔과 슬픔이다. 여주인공 잔느에게 그 불행과 슬픔을 가져다 주는 것은 사랑이다. 부모를 제외한 그녀의 주변 인물들 모두 그 사랑을 배신한다. 남편 줄리앙, 아들 폴, 하녀 로잘리, 그리고 유일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질베르트 백작 부인까지.

결혼 전에 이미 하녀 로잘리를 임신시키고, 백작 부인과 외도로 자신을 배신한 남편,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모든 희망과 애정을 쏟았지만 창녀와 놀아나면서 재산을 탕진하는 아들에게 상처받으며 27년을 사는 여자에게 ‘사랑’은 삶의 전부이자,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환상이다.

모파상은“삶에 유일하게 좋은 것이 있다면, 바로 사랑”이라고 했지만, 그 때문에 상처투성이가 되는 여자의 일생으로 사랑을 비관하고 있다. 그 여자의 사랑은 순수하고 고결하지만, 무지하고 몽환적이다. 또한 주체적이지 못하고 종속적이면서 회귀적이다. 스스로 사랑의 환상에 빠졌고, 그 사랑이 남편의 불륜으로 배신당하자, 운명의 사악함에 절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깨달은 것은 사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아니다. 오히려 집착이다. 그것이 남편과 잠시 행복했던 순간의 끝없는 추억과 태어난 아들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 둘 역시 자신을 허망하고, 불행의 나락으로 빠뜨리고 말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런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어린 손녀를 안고 무한한 감동으로 미친 듯이 입을 맞춘다. 영화에서 그녀는 이렇게 독백한다. “열매가 맺지 않으면, 꽃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그녀가 생각하는 사랑의 꽃과 열매는 무엇인가.

소설을 완전히 무시하고, 아니면 아예 잊어버리면 영화 <여자의 일생>은 이미지, 그것도 전형적인 프랑스풍의 예술 감각을 살린 작품으로 보인다. 스토리텔링 보다는 다분히 시적인 느낌을 살린, 대사나 사건의 구체적 흐름의 연결보다는 장면 장면 끊어가기로 인물의 심리와 감정을 묘사하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영화는 모파상이 소설에서 차가우리만치 날카롭고 명징한 언어로 묘사한 사랑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아름다운 추억과 비참한 현실을 배우의 연기나 대사가 아닌 빛과 어둠의 대비로 표현했다. 잔느도 독백으로 슬프고 우중충하고 모든 것이 어두울 때 구름 사이로 비치는 한줄기 햇살이 신의 미소이며 희망이라고 했다. 영화는 끝없는 시간이동(플래시백과 플래시 포워드)으로 회상과 현실을 오가고, 그에 따라 빛과 어둠을 반복한다. 마치 전체 시간을 압축하지 않고 순간순간 가장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짧은 영상에 담듯이 한 주인공 잔느(주디스 쳄라) 중심의 영상 이미지들이 인물의 내면을 깊게 드러냈다.

이런 변주야말로 감독의 말처럼 원작에 대한 배반, 문학적 구성 부수기가 분명하다. 소설의 사실주의와 선형적 내러티브를 상징과 영상 이미지의 교차로 대신했으니까. 열 두 살 된 아들 폴의 반항과 남편의 용서 빌기, 하녀 로잘리와의 수프 이야기처럼 때론 소설에서 벗어나 훨씬 강렬한 대사와 행동으로 영화를 꿈틀거리게 했지만.

원작 대 영화 - 너의 이름은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그렇다고 소설보다 더 매력적이고, 소설과 달리 시대의 벽을 넘은 것은 아니다. 영화 <여자의 일생> 역시 세련된 계산과 품격 있는 현대적 예술적 감각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와 상징이 가진 단절과 생략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수도원학교를 나오고, 줄리앙을 만나는 소설의 도입부의 생략은 잔느의 사랑에 대한 설렘과 환상, 섣부른 결혼, 성에 대한 반응, 애잔한 추억 떠올리기에 대한 감정이입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미지 중심의 영화, 원작을 따라가기 싫은 영화라면 더더욱 심리표현을 위한 구체적 에피소드를 집어넣어야 했다.

아무리 영상언어가 소설의 묘사와 설명을 대신한다 하지만, 불가능한 영역도 있다. <여자의 일생>에도 그것들이 가득하다. 이 소설을 명작으로 만든 여주인공의 인물에 대한 시선과 그에 따른 감정표현, 종교에 대한 비판과 비유에는 언어의 힘이 넘치고 정밀하다. 진실 고백에 대한 잔느의 갈등, 불륜을 저지른 아내에 대한 푸르빌 백작의 처연한 복수에도 날카로움과 생동감, 긴장감이 넘친다.

표현방식과 구성이 현대적이라고 과거가 현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무슨 옷을 입었건, 어떻게 말하든 거기에는 일류의 보편적 가치와 이상이 담겨있다. <여자의 일생>에서 그것은 무엇일까. 여주인공 잔느의 수동적이고 운명적인 삶일까. 그녀가 일생 동안 매달린 사랑일까. 아니면 그것을 위한 투쟁과 희생일까.

19세기에 쓴 소설도, 134년 후에 만든 영화도 자신 있게 “그것”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더 아쉽다. 기왕 영화가 소설을 배신할 작정이었다면 시대정서와 가치까지 부수어 <여자의 일생>을 ‘지금, 우리의 이야기’로 멋지게 다시 불러내지 못한 것이.

이대현_영화평론가. 1959년생저서 ‘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열일곱, 영화로 세상을 보다’ ,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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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07-13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