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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연재소설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16화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16부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16부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16부

집에는 운동을 시작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엄마에게는 토요일마다 지윤이네 집에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고 둘러댔다.

“왜?”

엄마의 질문은 간결했다. 그러게, 왜? 나도 모를 땐 솔직하게 말하는 게 최선이다.

“그냥.”
“별일이 다 있네.”

엄마의 떨떠름한 목소리를 듣자, 엄마의 의문은 왜 지윤이네 집에 가는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엄마는 왜 내가 갑자기 주말에 공부를 하는가가 이상했던 것이다. 이상할 만도 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어떤 유혹이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공부에 관한 한 주 5일 체제를 꿋꿋하게 지켜왔던 나였다.

“지윤이가 수학을 되게 잘하는데 내 공부도 도와준대.”
“왜?”

엄마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글쎄 나도 잘 모르지만 공부 잘하는 애들은 남한테 막 가르쳐주면서 자기도 복습 한 번씩 하고 그러는 거 같더라고.”

미리 만들어놓은 것처럼 말이 입에서 술술 나왔다.

“알아서 해. 남의 집에 너무 폐 끼치지만 말고.”

내가 거짓말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나뿐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을 실제보다 정의롭거나 양심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엄마는 이어, 매번 너무 빈손으로 가고 그러지 마,라고 했다.

토요일 아침마다 지윤이네 집에 뭘 사 가야 한다고 말하면 지갑을 열어 만 원짜리 한 장씩은 건네줄 기세였다.

뭐가 좋을까. 그 집 식탁에 꽂을 프리지어 한 다발이라거나, 공부하다 출출할 때 나눠 먹을 붕어빵이라거나, 공부하다 배배 꼬일 때 몸 좀 풀 소프트볼 공 같은 것들?

“자, 여기.”

엄마는 정말로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한 장 꺼내 내밀었다. 매달 정기적으로 받는 용돈 외에 엄마한테서 무언가를, 특히 현금을 받는 건 드문 일이었다. 신나기는커녕 마음이 무거워졌다.

“콘플레이크 사다 놨으니까 챙겨 먹고 가. 엄마는 마감해야 해서”

엄마는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큰딸의 토요일 스케줄에 대해 캐물을 의사도 여력도 없어 보였다.

요사이 엄마는 부쩍 일을 많이 맡고 있었다.

우리에게 일일이 설명하지는 않지만 돈 때문임을 짐작할 만했다.

연락도 안 되는 아빠가 생활비를 꼬박꼬박 챙겨 보내고 있을 것 같진 않으니 말이다. 엄마는 그전에도 종종 자기 작업에 대해 ‘먹고살려고 하는 거야’라고 자조하듯 내뱉고는 했다.

매번 마감에 쫓길 때마다 저승사자의 표정으로 변하는 엄마지만, 그 순간을 싫어하지만은 않는다는 걸, 아니 싫어하지만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사실이었다.

“아직도 못 끝내셨나 보네.”

욕실에서 공들여 립글로스를 바르고 있던 지아가 한마디 던졌다.

“하긴 쪼이는 게 원래 재미있잖아. 조금씩조금씩 조여들다 목이 팍 졸리기 직전의 느낌. 원래 그때가 뭐든지 제일 잘되는 법이니까.”

세상 진리를 다 아는 사람처럼 말하는 지아의 화법이 내겐 아직도 낯설었다.

비비크림을 발랐는지 지아의 얼굴 전체가 뽀얗게 빛났다. 눈가에는 반짝이는 펄 아이섀도까지 바른 듯했다.

몸에 딱 붙는 연하늘색 진 스커트도 예사롭지 않았다.

“근데 너는 아침부터 어디 가?”

지아가 거울 속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친구네 집에 공부하러.”

“뭐?”

“걔는 영어를 잘해서, 같이하기로 했어.”

엄마에게 둘러댄 내 거짓말을 다 듣고 따라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지아가 나를 아래위로 빠르게 훑어보았다.

“언니야, 요즘 뭐, 해?”

‘뭐’와 ‘해’ 사이에 짧고 깊은 틈이 있었다.

“얼굴이 완전 탔어.”
“봄이니까 그렇지.”

나는 손바닥으로 두 뺨을 괜히 매만졌다.

“주근깨도 완전 많이 생기고. 선크림도 안 바르지? 언니처럼 피부 까만 애들은 자외선에 신경을 써야 돼. 운동장에서도 항상 좀 챙겨 발라.”

알듯 모를 듯한 충고를 던져놓고서 지아는 휑하니 나가버렸다.

뒤통수 한가운데에서 꽉 조여 묶은 포니테일 머리칼이 나풀나풀 흔들렸다.

지아에게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한 이유는 내가 떳떳하지 못해서일까?

지아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 내가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지아도 나에 대해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아의 조언대로 자외선 차단 지수가 적혀 있는 비비크림을 얼굴에 듬뿍 처발랐다.

허여멀건 한 게 푹 웃음이 났다. 야구 모자를 찾아 쓰려다 그만두었다. 오늘은 유니폼이 도착하는 날이었다.

지난번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원하는 등 번호를 적어 내라고 했다.

“아무 숫자나 다 되나요?”

누군가가 진지하게 묻자 선생님도 진지하게 대답해주었다.

“4444. 이런 건 안 되겠지. 두 자리 이하로만 해. 아무거나.”

연필 꼭지를 잘근잘근 씹으며 종이가 내 앞에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머뭇거리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휘갈기듯 그 번호를 적어 넣었다.

21. 전설의 투수 박철순도, 송진우도, 오승환도 21번이었다.

가지고 싶었지만, 야구를 할 때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숫자였다.

야구를 시작했을 땐 우리 팀에 그 번호를 쓰는 선배가 있었고, 그 선배가 졸업을 하여 결번이 되었을 땐 차마 번호를 바꾸겠다고 나서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머뭇대는 사이 그 번호는 다른 녀석이 차지해버렸다.

21번의 특별한 의미를 아는 아이도 아니었다. 투수도 아니었다.

“그냥 남는 번호 같아서.”

그게 그 아이가 말한 어이없는 이유였다. 내가 속상해하자 아빠는 말했다.

“네가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간절히 원하지 않았다는 뜻이야.”

아마도 날 위로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빠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위로를 받기는커녕 더욱 절망하게 되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행동에 옮길 만큼 간절히 원하지 않은 나 자신을 미워하게 되었다.

우리 팀의 유니폼은 상의는 빨간색과 녹색이 섞여 있었고, 하의는 녹색이었다.

“신호등 아니야?”

솔미가 중얼거렸다.

“크리스마스트리네.”

내 말에 다들 웃음이 터졌다. 흰색으로 ‘21’이 선명히 새겨진 유니폼은 내 몸에 딱 맞았다.

정이현 작가 사진

정이현 작가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상냥한 폭력의 시대』,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사랑의 기초ㅡ연인들』 『안녕, 내 모든 것』, 짧은 소설 『말하자면 좋은 사람』, 산문집 『풍선』 『작별』 등을 펴냈다. 이효석 문학상, 현대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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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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