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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연재소설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15화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15부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15부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15부

‘소프트볼’과 ‘일본’을 함께 검색하면서 알게 된 건, 이 세상엔 뜻밖에 소프트볼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거였다.

일본에는 소프트볼 협회에 등록된 팀만 1만 개가 넘는다고 했다. 대충 세어봐도 선수만 10만 명이 넘었다.

아홉 명을 채우기까지 아직 멀고 먼 우리 팀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많은 숫자였다.

장비가 도착했어도 선생님은 줄곧 기초체력 훈련만 시켰다. 운동장을 달리고, 달리고, 조금 쉬었다가 다시 달리기를 반복했다. 나가떨어질 놈들은 여기서 나가떨어지라고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나는 매번 처음 두 바퀴는 맨 앞에 섰고, 세 바퀴째부터는 맨 뒤에 섰다.

세 바퀴를 돌면 거의 모두가 몸속에서 피와 얼이 동시에 빠져나간 얼굴이 된다.

“토할 거 같아.”

솔미가 운동장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이, 다리를 질질 끌며 달리던 아이들이 풀썩풀썩 바닥에 널브러졌다.

“지……유…… 넌…… 괜……찮……아?”

지윤이 숨을 헉헉거리며 한 음절씩 뱉어냈다.

그 와중에 내 걱정이었다. 저러다 토하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운 찰나 지윤이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나…… 아무……래……도…… 큰……일……난 거 같……”
“지윤아? 지윤아?”
“피…… 피가…… 올……라……와. 목구멍에서…… 피……토할 거…… 같아.”

그러곤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선생님이 뛰어왔다.

선생님은 지윤의 맥을 짚고 눈꺼풀을 뒤집어보더니 일단 쉬게 해야겠다고 말했다.

하긴 보건실도 문을 열지 않은 토요일이니 구급차에 실어 보내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도 없었다.

아이들이 지윤을 에워쌌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니냐, 이미 죽은 거 아니냐, 냉찜질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아니다 온찜질을 해야 한다, 이럴 게 아니라 119에 전화해보는 게 좋겠다, 같은 소리들을 한마디씩 보태며 웅성댔다. 선생님은 상황을 한마디로 종료시켰다.

“두 바퀴 남았다. 가서 마저 뛰어라.”

부드럽지만 단호함이 숨겨진 말투였다.

다들 입 한 번 내밀지 못하고 다시 달렸다. 하나 둘, 하나 둘, 속으로 구호를 외치며 이 사람의 진짜 속내가 무엇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우리를 전국 소프트볼 대회 우승이라도 시키고 싶은 걸까. 선생님은 눈을 완전히 가리는 스포츠 고글을 꺼내 쓰곤 무표정하게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볕도 별로 안 나는데 순전히 폼 잡는 용이 분명했다.

지유야, 나 괜찮아. 너도 얼른 가.”

?

지윤이 실눈을 뜨고 속삭였다. 나는 손바닥으로 지윤의 이마를 한 번 쓸어주곤 성큼성큼 뛰어가 아이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수비하기와 공격하기. 소프트볼이나 야구나 결국 이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 운동이다.”

선생님이 말했다. 간신히 달리기 미션을 다 마치고 얼굴빛이 누렇게 뜬 아이들을 한 줄로 모아놓고서. 아이들은 그나마 땅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양반 다리로 앉아도 된다고 허락해준 것이 감지덕지하다는 표정들이었다. 진즉 도망가고도 남았을 텐데 지윤도 집에 가지 않고 남아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음…… 공이요?”

누군가 대답했다. 선생님이 검지를 들어 까딱 흔들었다.

“오 노노노. 그건 삼위일체, 필수 불가결의 구성 요소 중 하나지. 공, 배트, 글러브. 내가 원하는 답은 어떤 동작이야. 아는 사람 없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역시 선생님이 턱짓으로 나를 딱 지목했다.

“……달리기입니다.”
“빙고!”

나는 그다음에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올 말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소프트볼을 잘하는 지름길 같은 건 아무 데도 없어. 반복해서 연습하는 것 말고는. 그렇다고 한 번에 확 잘하게 되나. 아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조금씩조금씩, 남들 눈에는 티도 잘 안 나게, 그렇게 앞으로 가는 거야.”

무서운 말이었다.

“화려하게 홈런 치고 안타 치고, 그것만 할 수는 없어. 배트 정중앙에 딱 잘 맞았어도, 일단 냅다 달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돼. 그러니까 마지막 기회를 줄게. 너무 힘든 사람은 여기서 그만둬라.”

두 가지 감정이 나를 강타했다. 누구보다 먼저 손을 번쩍 들고 싶은 욕망과, 간신히 애들 모아놨더니 저 선생님이 어쩌려고 저런 소리를 막 하나 싶은 걱정이었다.

선생님은 눈을 감으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그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상상하며 숫자를 열까지 셌다. 움찔거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꾹 눌렀다. 시간이 느리게 갔다.

눈을 떴을 때, 그만두겠다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 이제 번복은 없다. 모두 일어서!”

선생님이 스포츠 고글을 벗었다. 어쩌면 저 선생님도 떨리는 눈빛을 감추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아이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차렷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다. 쭉 내민 아래턱을 당기고, 구부린 등뼈는 곧게 펴도록 했다. 그리고 둘씩 짝을 지으라고 했다. 솔미가 얼른 내 팔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지유야, 나랑 해.”

선생님이 글러브를 높게 쳐들어 보였다.

“이게 뭔지 알지? 글러브다. 자, 따라 해봐. 글러브.”
“글,러,브.”

나는 혀를 천천히 움직거렸다.

입안에서 부서지는 그 발음은 내가 모르는 단어를 지칭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한때 내 피부처럼 왼손에 밀착되어 있었다.

진한 갈색으로 된, 부들부들한 감촉의 글러브에 손을 쑥 집어넣을 때면 고릿한 가죽 냄새가 코에 훅 끼쳐오곤 했다.

몸 안의 여러 감각들이 동시에 활짝 열렸다. 이것은 야구 글러브가 아니었다.

내가 쓰던 글러브보다 더 컸다. 소프트볼 글러브는 아주 많은 손들을 거쳐 여기까지 온 듯했다.

나는 낡은 글러브의 입수부에 왼손을 집어넣었다. 집어넣는 순간 글러브의 내피가 손을 꽉 잡아주었다.

“자, 이건 뭐다? 공이다, 공.”

선생님이 형광색 소프트볼 공을 들었다. 손가락을 브이v 자로 만들었다. 검지와 중지 위에 공이 놓였다.

“엄지는 받칠 뿐이다. 잊지 마.”

내 브이 위에 얹힌 공은 제법 무거웠다. 오랫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볼 새도 없이 캐치볼이 시작되었다.

정이현 작가 사진

정이현 작가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상냥한 폭력의 시대』,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사랑의 기초ㅡ연인들』 『안녕, 내 모든 것』, 짧은 소설 『말하자면 좋은 사람』, 산문집 『풍선』 『작별』 등을 펴냈다. 이효석 문학상, 현대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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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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