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재소설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13화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13부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13부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13부

“지금은 좋아해도 나중엔 안 좋아질 수도 있잖아.”

나는 궁색했다.

“어차피 다 죽을 텐데 지금 왜 살아?”

지아는 의연했다.
어떤 질문은 답이 아니라 질문을 위해 존재한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서 나는 나에게 다시 물어야 했다.

좋아해? 정말 그래?
나는 되묻는다.
야구를?

모르겠다. 야구는 나를 행복하게 했지만 불행하게도 했다. 나는 다시 묻는다.

그럼 뭘 좋아해?

던지기. 공 던지기.
마운드에 올라가 심호흡을 하고, 입을 쫙 벌린 채 기다리는 포수의 글러브를 노려보고, 와인드업을 하고, 허공을 향해 공을 힘껏 던지는 그 느낌을. 내 손목의 힘으로 지구를 던지는 그 기분을.

그걸 정말 좋아해?

‘응!’이라고 가슴이 터지도록 소리치던 날도 있었다. 지금은 꼭 그렇지는 않다. 지금 내가 외치는 ‘응!’은 깊은 동굴 속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 같다. 먹먹하지만 둥글고 넓게, 아주 넓게 울려 퍼졌다.

다음 날 아침 등교하자마자 지윤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이것 좀 봐.”

지윤이 가방 속에서 꺼낸 것은 한 묶음의 A4 종이 뭉치였다.

“어젯밤에 구글링으로 조사해본 거야.”
“조……사?”
“응. 자료 조사.”

지윤은 한 시간밖에 못 잤다며 눈가를 문질렀다. 그래도 초롱한 눈망울을 반짝였다. 나는 지윤이 건넨 종이 뭉치를 넘겨보았다.

주자는 타격을 마치고 1루에 도달하여 아직 아웃이 되지 않은 공격 팀의 선수이다.

음…… 이건 뭐랄까 너무 당연한 말이었다. 마치 학생은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다,라거나 교사는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같은. 그런데 너무 당연한 말이라서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몇 장을 더 넘겨보았다.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력이다.

가슴속에서 작고 단단한 것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말이야. 야구와 소프트볼은 뿌리는 같다고 할 수도 있지만 엄연히 다르다고 봐야 해. 소프트볼이 야구에서 파생되어 나온 건 맞아. 경기 형태도 비슷하고. 그렇지만 사용하는 볼도 다르고, 이닝 수도 다르고, 구장 크기도 다르고, 피칭법도 다르고, 세부적인 규칙들도 차이가 꽤 나거든.”

지윤은 종알종알 신나게 말했다. 늘 성실하게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곤 하던 지윤에게 이런 의외의 모습이 있었다니.

“어떤 사람들은 소프트볼을 야구에 비해 훨씬 쉽고 단순한 스포츠라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야. 여자들과 애들이 주로 하는 게 아니냐고 하지만.”

음, 어쩐지 찔리지 않을 수 없는 얘기다.

“그렇다고 엄연한 하나의 스포츠 종목을 낮춰 본다는 건 참 어리석은 거야. 하나의 종목을 왜 다른 종목과 비교하는 거지? 비슷하다는 이유로? 소프트볼은 소프트볼일 뿐인데. 그리고 또, 여자들과 애들이 하는 게 왜? 뭐가 어때서? 누구나 할 수 있으면 좋은 거지. 지유야, 안 그래? 내 말이 틀려?”

“아니. 아니. 네 말이 맞아.”

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리고 사실 소프트볼의 최대 장점이 뭔 줄 알아?”

내가 대답할 겨를도 없이 지윤이 말을 이었다.

“바로 그거거든. 누구든 할 수 있다는 거.”
그래. 누구든.
“그러니까 우리도 할 수 있는 거 맞지?”

언제 왔는지 솔미가 끼어들었다.

“솔미 너도 하려고?”
“어제 말했잖아. 나도 같이할 거라고.”

좌 솔미, 우 지윤과 함께 나타난 내 모습을 보고 선생님은 잇몸까지 드러내며 웃었다.
강지유! 큰 결심했다. 잘해보자!”
선생님이 너무 내 얼굴만 보고 얘기해서 다른 애들에게 좀 미안했다. 그러나 그런 문제엔 아랑곳없이 솔미가 씩씩하게 질문했다.

“그럼 연습은 언제부터 시작하나요?”
“빠를수록 좋지. 내일이 토요일이니까 일단 내일 오전에 운동장으로 와.”
선생님의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준비물 및 유니폼에 대해 물은 건 역시 준비성 철저한 지윤이었다.
“준비해올 건 특별히 없어. 유니폼도 아직 없으니까 각자 편한 운동복 입고 와.”

지윤과 솔미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교실로 돌아와서도 그 애들은 학교 체육복이어야 하는지 일반 트레이닝복이어도 되는지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언니의 필라테스용 레깅스를 빌려 입고 오겠다는 솔미의 말에 지윤이 정색을 하며 안 된다고 말했다. 지윤은 아까 그 종이 뭉치에서 유니폼에 관한 부분을 찾아 빨간색으로 밑줄 쳤다.

유니폼은 소프트볼 경기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아이템이다. 소프트볼의 같은 팀 선수들은 모두 같은 경기복을 입어야 한다. 모자도 같은 디자인을 착용해야 한다. 경기복을 입기 전에는 슬라이딩 팬츠를 입고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여 부상을 예방하도록 한다.

“이거 좀 봐. 그렇게 아무거나 입고 오면 부상 입는다잖아.”
“그런가. 근데 부상이라고 하니까 되게 근사해 보인다.”

솔미가 말했다. 우리는 다 같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정이현 작가 사진

정이현 작가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상냥한 폭력의 시대』,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사랑의 기초ㅡ연인들』 『안녕, 내 모든 것』, 짧은 소설 『말하자면 좋은 사람』, 산문집 『풍선』 『작별』 등을 펴냈다. 이효석 문학상, 현대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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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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