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재소설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12화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11부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11부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11부

투구를 할 때 손은 중지부터 시작이다. 중지를 실밥 위에 잘 얹는 것이 중요하다. 그다음은 엄지다. 엄지로 중지의 반대쪽을 잡는다. 나머지 세 개의 손가락들은 가볍게 받쳐주는 느낌으로 올리면 된다. 공과 글러브를 어깨높이로 들면서, 손목에 스냅을 넣어 뿌리듯이 던진다. 내가 던진 공은 눈을 부릅뜨고 끝까지 바라봐야 한다. 포수의 글러브에 빨려들어 갈 때까지. 그리고 발은……

“그래. 인심 썼다.”

선생님이 말했다.

“하루 더 시간을 줄게. 생각해봐. 내일 그 시간에 아까 거기서 보자.”

그녀는 역시 자기 할 말만 다다다 하고서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지유야.”

지윤과 솔미가 교실에 들어서는 나를 둘러쌌다.

“어쩜 좋아. 어쩜 좋아. 영화 같아. 완전.”

솔미가 호들갑을 떨었다.

“뭐가.”

나는 약간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좀 쑥스럽기도 하고, 또 이런 복잡한 마음을 누군가와 공유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지윤이 내 교복 재킷 소매를 슬그머니 잡아당겼다.

“그거, 선수였던 애들만 할 수 있는 거야?”
“아니야. 그냥 방과후 같은 거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입단하려면 테스트 같은 걸 봐야 할까?”
“딱히 없을걸. 그냥 동아리 같은 건데.”

사실 나도 잘 몰랐다. 지윤이 손바닥으로 내 손등을 꼭 잡았다.

“그러면 나도 같이할까?”
“야구, 아니 소프트볼을?”
“응. 나 정말 소원이었어. 어렸을 때부터.”
“소프트볼이?”
“야구지만. 그게 그거잖아. 소프트볼이 여자 야구니까.”
“아니야. 야구랑 소프트볼은 전혀 달라.”

나는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네가 해야 돼.”
‘해볼래’도 아니고 ‘같이하자’도 아니고 ‘해라’도 아니었다.
“제가요? 왜……”
“그럼 이 학교에서 마운드에 서본 애가 너 말고 또 있을 것 같아?”
이 선생님은 대체 어디서 내 이야기를 들었단 말인가.
“야구하고는 다르다면서요.”
“그거는, 메커니즘이, 그러니까, 아 다르긴 다른데, 비슷한 건 또 비슷하지. 일단 투수, 포수, 타자는 있잖니.”

좀 전에 그 선생님이 했던 말을 내 입으로 고스란히 따라 하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아. 나 꼭 데려가 줘. 부탁이야.”

옆에서 손톱 거스러미를 뜯고 있던 솔미가 끼어들었다.

“나도.”

점입가경인가 하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졌나 보다.

정류장에서 넋 놓고 있다가 버스를 놓쳤다. 그 바람에 시간이 없어 삼각김밥 하나 못 먹고 바로 학원 수업에 들어가야 했다. 위장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란했지만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뒷머리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 선생님은 우격다짐으로 나를 몰아갈 작정인 듯했지만 내가 끝까지 거부하면 결국엔 포기할 터였다. 소코뚜레 끼우듯 질질 끌고 가서 내 몸에 강제로 유니게 걸으면 집까지 5분 정도가 걸린다. 그러나 그냥 들어가기는 싫었다. 아파트 단지 앞 편의점에 들렀다. 사발면 하 나를 뜯어 뜨거운 물을 부었다. 아직 10시 반이 안 됐지만 규리에게 카톡을 보냈다.

-오늘 하루 잘 지냈어?

늘, 규리가 먼저 물어주던 인사였다.

-응응. 너는?
-난 별로.

나는 규리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규리의 첫 번째 답은 이거였다.

-야구할 때 네가 좀 멋있기는 했어.
-정말?
-응응. 근데 생각해보니까 꼭 야구여서 그랬다기보다는.

규리의 톡은 거기서 끊겼다. 나는 나무젓가락을 쪼개며 규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걸 하고 있어서 그렇게 보였던 것 같아.

사발면을 한 젓가락 막 떠 입에 가져가려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난 한 번도 그래 본 적 없어서, 그런 네 모습이 무지 대단해 보였어.

빈 젓가락을 어금니로 씹었다.

-네가 부러워서 더 좋았던 것 같아.

입 속에서 비릿한 나무 맛이 났다.

-너 아직도 야구 좋아해?

기습의 물음표였다. 나는 천천히 입력했다.

-모르겠어, 나도.
-그럼 한번 물어봐. 너한테.

밤의 아파트 단지를 터덜터덜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지아가 마루 소파에 엎드려 티브이를 보고 있다가 탁 끄고 일어섰다.

“결정했어?”
“뭘?”

지아는 처음 듣는 얘기라는 표정으로 내 시선을 외면했다.

“그거, 한다고 했느냐고.”
“하지 말라며?”

지아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야. 넌 그거 정말 좋아해?”

내 물음에 지아는 대답 대신 픽 웃었다.

“당연한 거 아니야?”

정이현 작가 사진

정이현 작가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상냥한 폭력의 시대』,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사랑의 기초ㅡ연인들』 『안녕, 내 모든 것』, 짧은 소설 『말하자면 좋은 사람』, 산문집 『풍선』 『작별』 등을 펴냈다. 이효석 문학상, 현대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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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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