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재소설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7화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 EPISODE 1

헐렁하고 큰 교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교문에 들어서자 보이는 건 여자들뿐이었다. 여자고등학교에 입학했다는 실감이 났다. 나는 새 교실 쪽으로 느리게 걸어 들어갔다.

새 학교의 첫날, 새 교실에 들어설 때면 머릿속이 차가워지고 심장박동이 빠르게 뛴다. 그 긴장감이 나쁘지 않다. 아니 좋다. 교실 안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나는 빈 의자에 앉아, 안 보는 척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입학식 때 대충 확인했지만 역시 아는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이방인들 속에서, 한 명의 이름 없는 누군가로 남겨져 있는 동안 나는 외롭지만 자유로웠다. 어쩌면 학기 중의 모든 날을 통틀어, 맨 첫날이 가장 편안한지도 모른다. 누구도 나를 속속들이 알기 전이니까. 안다고 판단하기 전이니까.

담임은 배도 좀 나오고 머리도 좀 벗겨진 아저씨였다. 신경질도 좀 있을 것 같아 보였지만, 애들이 좀 잘못해도 꼬치꼬치 지적하면서 달달 볶을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았다. 달달 볶는 것도 성의가 있어야 하는 일이다. 올해로 학생 생활 10년째인데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우리 1년 동안 잘해보자. 그런 의미에서 우리 반 급훈은, 잘해보자.”

담임이 말했다. 아무도 안 웃었다. 담임은 그래도 꿋꿋했다.

“그럼 잘해보는 의미에서 첫 출석을 한번 불러보자. 강지유!”

빼도 박도 못하고, 또 1번인 모양이다.

“네.”
“아침 굶고 왔나. 크게, 다시, 강지유!”
“네!”

담임은 흡족하다는 듯 칙칙한 미소를 날리고는 다시 출석부를 보았다.

“강지윤!”
“네.”

대답한 건 바로 내 옆자리에 앉은 아이였다. 담임이 한마디 했다.

“1번, 2번 어찌 알고 사이좋게 모여 앉아 있네. 다음 3번……”

나는 흘낏 옆을 보았다. 몸피가 거짓말 좀 보태 내 절반밖에 안 돼 보이는 아이였다. 말라도 너무 마른 데다 얼굴도 새하얗고 파리했다. 헤어스타일은 영화에서나 본 옛날 여고생처럼 귀밑 1센티미터가 될까 말까 한 까만 단발이었다. 강지유와 강지윤. 그러니까 저 아이와 나는 ‘ㄴ’ 하나 차이로 1번과 2번으로 갈린 셈이다.

쉬는 시간에 갑자기 누가 등을 탁 쳤다. 놀라서 돌아보니, 동그란 안경을 쓴 아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누구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강지유. 야 넌 똑같다!”
“어, 어. 안녕.”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담임이 출석 부를 때 애들 이름을 유심히 듣고 얼굴과 잘 매치해놓을 걸 그랬다. 안녕이라고 인사까지 했는데도 도무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동그란 안경을 비롯해 얼굴도 이목구비도 몸매도 모두 동글동글한 여자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뺨이 포동포동했다. 누군진 몰라도 성격 하나는 좋은 아이였다.

“이름 듣고 혹시 넌가 했는데 진짜네.”
“으응.”
“아직도 운동해?”

다짜고짜 그렇게 묻는 걸 보니 초등학교 5학년 이전의 동창인 게 분명했다.

“어, 아니.”
“관뒀어? 아깝다. 너 축구 되게 잘했잖아.”

추, 축구라니.

“무슨 대회였는데, 그래 전국대횐가 그거 나갔을 때 우리 반 애들 다 가서 막 응원하고 그랬잖아.”

나는 웃지도 찡그리지도 못한 채 가만히 있었다. 이 아이의 오해일까, 아니면 혹시 나를 다른 축구신동 소녀로 착각하는 걸까. 하긴 축구나 야구나, 이제 나에겐 그게 그거였다.

“너 그때 완전 잘했는데.”

웃는 것처럼 보이게 입매를 살짝 찌그러트리는 거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옆자리의 강지윤이 우리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동그란 안경의 이름은 솔미였다. 이솔미. 솔미는 초등학교 때 줄곧 내 옆 반이었다고 했다. 급식실에서도 옆에 꼭 붙어 앉아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너 그때 인기 완전 많았는데. 너 좋아하는 애들 많은 거 너도 알았지?”

물론, 알았다. 그 좋아하는 애들이라는 게 다 여자애들이었다는 것도. 다 옛날 얘기였다. 같은 반인 적 없었던 솔미가 나를 기억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자기 단짝이었던 아이가 날 짝사랑해서.

“규리. 5학년 때 네 생일에 사물함에 초콜릿 넣어놨던 애. 키 작고 턱 뾰족하고 여기 코 옆에 점 하나 있고.”

솔미는 열심히 설명했지만 나는 누군지 기억도 안 났다.

“걔랑 중2 때까지는 연락됐었는데 지금은 끊겼어. 뉴질랜드로 유학 갔거든. 코알라랑 찍은 사진 한 장 카톡으로 보내더니 그다음엔.”

내가 식판의 밥과 반찬을 반이나 먹을 동안 그 애는 계속 떠들기만 했다.

“안 먹어?”

내가 묻자, 그 애는 느슨하게 쥐고 있던 젓가락을 바르게 잡았다.

응, 먹어야지.”

젓가락으로 밥알을 몇 개 집어 입술 근처로 가져가다가 내려놓고는 곧바로 물컵을 입가로 가져갔다. 먹기 싫어 깨작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많이 해본 솜씨였다. 조금 더 친했다면 “다이어트 해?”라고 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솔미의 밥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강지윤은 대각선 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 애는 체격과는 달리 먹성이 좋았다. 아무와도 말하지 않고 오로지 밥 먹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듯했다. 음식을 씹는 턱의 움직임은 신속하고 정확했고, 음식을 음미하는 그 애의 표정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느새 식판 바닥이 보였다.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서는 모르는 존재다.

“그럼 걔는 기억나? 학교 앞 문방구집 딸. 얼굴 네모나고 머리 짧던 애. 걔도 너 좋아했는데 규리가 좋아하지 말라고 해서 둘이 막 싸웠잖아. 너 서울시 축구대횐가 거기서 이겼던 날.”

나는 대꾸했다.

“야구거든.”
“응?”
“축구 아니고 야구라고.”

야구,라는 단어가 내 귀에 낯설게 울렸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단어를 고르라고 한다면, ‘야구’라는 답밖에 떠올리지 못할 거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이젠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알았다. 내가 기특하고 좀 불쌍해졌다. 이젠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이다.

정이현 작가 사진

정이현 작가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상냥한 폭력의 시대』,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사랑의 기초ㅡ연인들』 『안녕, 내 모든 것』, 짧은 소설 『말하자면 좋은 사람』, 산문집 『풍선』 『작별』 등을 펴냈다. 이효석 문학상, 현대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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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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