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롭게 감춰진 땅, 은비령(隱秘嶺)
하필이면 길을 바꾸어 떠난 곳이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은비령이었을까. 바다로 가는 길을 눈을 보러 가는 길로 바꾸고, 눈을 보러 가선 또 별을 가슴에 담고 돌아온 그 여행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별처럼 여자는 2천5백만 년 후 다시 내게로 오겠다고 했다. 나도 같은 약속을 여자에게 했다. 벗어나면 아득해도 은비령에서 그것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 은비령 너머의 세상은 깜깜하게 멈추어 서고, 나는 2천5백만 년보다 더 긴 시간을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이제 겨우 다섯 달이 지난 2천5백만 년 후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소설 『은비령』의 앞부분이다. 이 소설을 발표한 지 벌써 20년이 지났다. 1996년 겨울과 봄 사이에 나는 이 작품을 썼다. 그때 내 나이는 서른아홉에서 막 마흔이 되었다. 지금은 인터넷이 이 세상 모든 정보의 그물처럼 펼쳐져 있지만 그때는, 아직 이 땅에 인터넷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휴대폰도 일반화되기 전이어서 바쁜 연락은 ‘삐삐’라는 이름의 호출기를 사용하거나 유선전화에 내장되어 있는 녹음장치를 사용했다. 소설 속의 인물들 역시 유선전화의 녹음장치를 이용한다. 다만 지금의 인터넷과 비슷한 PC통신이 있었다.
돌아보면 그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별로 ‘하쿠타케’라는 이름의 혜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으로 혜성 소식을 듣던 날 나는 일부러 그랬던 것이 아닌데 책장에서 무심히 뽑은 어떤 책의 서문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북쪽 끝에 높이와 너비가 각각 1마일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 인간의 시간으로 천년에 한 번씩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날카롭게 부리를 다듬고 가는데, 그렇게 해서 바위가 닳아 없어질 때 영원의 하루가 지나간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 사람은 살고 있는 세상도 수명도 참 작고 짧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 인간의 인연과 사랑도 저런 불멸의 시간과도 같은 우주의 한 질서로 파악하고 그런 운명과 인연과 사랑의 연속성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 소설이 바로 『은비령』이었다. 그 무렵 내가 서울에서 강릉이나 강릉 주변의 동해바다로 가는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영동고속도를 이용해 대관령을 넘어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홍천과 인제를 거쳐 우리나라에서 가장 구불구불한 길로 알려진 한계령의 산허리를 넘어가는 것이다. 한계령 동쪽 아래에 그 유명한 오색약수가 있고, 가을이면 연어가 올라오는 양양 남대천과 낙산사가 있다.
화전민 마을이 있던 필레고개
소설 『은비령』의 무대는 홍천과 인제를 거쳐 한계령 꼭대기에서 동쪽으로 500미터쯤 가다가 만나는 샛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다시 한계령의 다른 허리 중간을 되넘는 길이다. 애초 『은비령』이라는 지명이 있었던 건 아니다. 아주 예전에 그 고개 너머에 화전민 마을이 있었다. 행정지명으로는 정확하게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귀둔리다. 그곳에 필례약수가 있어서 필례령, 필레고개라고 불리던, 사람이 그리 많이 다니지 않는 샛길이었다.
그 샛길과 같은 고개를 ‘신비롭게 감춰진 땅’이라는 이름으로 ‘은비령(隱秘嶺)’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나였다. 내가 소설을 쓰며 처음 그곳을 은비령이라고 이름 지은 것인데 지금은 마을 주민들도, 또 그곳을 찾는 사람들도 소설 속의 이름 그대로 길도 마을도 은비령이라고 부르고 있다.
앞에서 말한 하쿠타케 혜성이 지구 가까이 다가올 때였다. 나는 우리 곁으로 오는 혜성과 같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멀리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는 뜻으로 혜성이 아니라, 우주의 어떤 질서처럼 미리 정해진 주기를 가지고 우리 운명의 어떤 약속으로 다가오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남자 주인공은 아내와 별거 중인 소설가로 설정했다. 아내는 그가 세속적인 욕망을 가진 사람이길 바라고, 그는 아내가 자신의 문학적 세계만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그런 밀고 당기기의 과정 속에 이미 오래전 두 사람은 별거를 하고 있다. 남자 주인공이 새로 만나게 된 사람은 예전 어느 한때 은비령에서 함께 고시공부를 했던 친구의 아내이다. 그 친구는 수년 전 바다낚시를 갔다가 해상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남자 입장에서 본다면 ‘죽은 친구의 아내’를 만난 것이고, 여자 입장에서 본다면 ‘죽은 남편의 친구’를 만난 것이다. 유독 사랑에 금기가 많은 우리에게 이런 관계는 참 불편하다. 앞에 ‘죽은’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해도 ‘친구의 아내’와 ‘남편의 친구’라는 그 관계는 왠지 사랑의 금기적 상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두 사람에게 은비령은 남자 주인공이 예전에 그 친구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하지만, 이제 두 사람이 조금씩 사랑하게 되는 동안 여자도 남자도 저마다 살아온 날들에 대한 어떤 기억의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곳,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자에겐 죽은 친구이고, 여자에겐 죽은 남편인 한 사내의 영혼이 쳐 놓은 모든 기억과 의식의 그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여도 마음 안에 남아 있는 친구의, 혹은 남편의 영혼에 대해 더 이상 어떤 소금 짐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곳을 찾다가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처음엔 주인공이 친구가 목숨을 잃은 변산반도를 향해 길을 떠나다가 중간에 라디오에서 대관령에 눈이 내린다는 말을 듣고 진로를 바꾼다. 대관령에 눈이 내리면 한계령에도 내릴 것이고, 한계령에 내리면 은비령에도 내릴 것이다. 그를 만나러 마음 가득 소금 짐을 안고 격포로 향해 나선 길이긴 하지만, 눈이 내린다면 정반대 방향으로 은비령으로 가는 길도 격포로 가는 길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을 써나가는 동안 혜성과 별을 관측하러 가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는 천문학이나 혜성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그때 나를 도와준 사람이 있었다. 그 시절 PC통신이야말로 우주의 바다와도 같았다. 우주의 먼별에 있는 친구와 교신하듯 며칠 밤을 새워 가며 PC통신으로 우주와 별과 천문에 관해 책에서는 들을 수 없는 여러 일화를 얘기해 준 젊은 친구가 있었다.
“별에겐 별의 시간이 있듯이 인간에겐 또 인간의 시간이라는 게 있습니다. 대부분의 행성이 자기가 지나간 자리를 다시 돌아오는 공전 주기를 가지고 있듯 우리 인간의 일도 그런 우주적 질서와 정해진 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2500만 년이 될 때마다 다시 원상의 주기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2500만 년이 지나면 그때 우리는 다시 지금과 똑같이 이런 모습으로 여기에 모여 우리 곁으로 오는 저 혜성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길에서 우리가 만났던 사람들을 다 다시 만나게 되고, 겪었던 일을 다 다시 겪게 되고, 앞으로 겪어야 할 일들을 다시 겪게 되는 거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꿈을 꾸는 듯했고,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2500만 년의 시간이 되돌아오는 장소로 『은비령』을 썼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치는 느닷없는 슬픔과 이별, 불안과 공포도 그렇게 무섭거나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헤어져 마음 아프고 안타까운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 역시 2500만 년 후 다시 다가올 것 같았다.
그 작품으로 1997년 현대문학상을 받게 되었을 때 수상소감에 나는 그 친구를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그 친구는 한 번 비껴가면 다시 오지 않는 혜성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20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그에게 여러 번 공개편지를 썼다. 이제는 강원도 인제군에 가면 소설 속의 지명이 아니라 실제 지명으로 은비령이라는 마을도 있고, 은비령이라는 고갯길도 있다고. 인터넷에서 은비령을 검색하면 내 소설에 대한 얘기만큼이나 많은 정보로 은비령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여러 산장과 타운과 지도가 나오고, 길도 이젠 완전히 은비령 길이 되었다고.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친구의 도움을 받아 쓴 소설 『은비령』이 나온 다음 그런 일이 생긴 것이다. 『은비령』을 읽은 독자들이 버스노선도 없는 그곳 오지 마을을 찾아가 이곳이 은비령이냐고 묻기 시작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 아니라고 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 묻고, 그곳에 묵고 가기를 원하자 그곳에 그런 사람들을 위한 펜션과 식당과 카페 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마을과 고갯길이 정식 지명처럼 은비령으로 불리기 시작하고, 소설 속의 고개 이름과 마을 이름이 그곳을 찾는 독자들과 마을주민들에 의해 실제 지명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은비령』을 한 편의 소설로 완성하기 전까지, 한계령 꼭대기에서 동쪽으로 500미터쯤 내려오다가 인제 쪽으로 되넘어 가는 갈림길 지점에 이를 때마다 저 너머엔 어떤 마을이 있을까, 늘 머릿속으로만 생각했지 작품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실제 가 보지 않았다. 그곳이 천리만리 떨어져 있는 곳도 아니고, 아무리 멀어야 한나절이면 다 가 볼 수 있는 거리다. 가면 마음속에 궁금했던 의문 같은 것들이 금방 풀리지만 그러나 실제 작품 속의 무대를 미리 눈으로 보고 나면 나는 이상하게 그 무대에 대한 상상력이 차단되고 만다. 『은비령』 안에 나오는 ‘은비팔경’ 역시 가 보지 않고 머릿속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풍경들이다. 그런데 작품을 다 쓰고 가 보았을 때, 그곳은 정말 내가 작품 속에 묘사한 그대로의 세계 같았다.
은비령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문학작품 속의 지명이 마을 이름을 바꾸고 실제 지명이 된 곳이다. 이런저런 일로 해외에 나갔을 때 그곳 작가들에게 그 나라에도 작품이 이렇게 뒤늦게 먼저 있던 지명을 바꾼 경우가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일본도 어떤 작품의 무대가 어디다, 하는 곳은 많지만 작품 때문에 실제 지명이 바뀐 경우는 없고, 독일과 프랑스도 언뜻 생각하기엔 그런 사례가 더러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정말 그런 곳이 있나 찾아보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땅의 독자들에게 남다른 선물과 남다른 빚을 동시에 받은 작가이기도 하다. 작가로서 행운과 작가로서의 의무가 함께 느껴지는 부분이다.
소설 속에서도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그곳에서 2천5백만 년 후에 올 다음 생애에 대한 약속을 한다.
그날 밤, 은비령엔 아직 녹다 남은 눈이 날리고 나는 2천5백만 년 전의 생애에도 그랬고 이 생애에도 다시 비껴 지나가는 별을 내 가슴에 묻었다. 서로의 가슴에 별이 되어 묻고 묻히는 동안 은비령의 칼바람처럼 거친 숨결 속에서도 우리는 이 생애가 길지 않듯 이제 우리가 앞으로 기다려야 할 다음 생애까지의 시간도 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꿈속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북쪽으로 부리를 벼리러 스비스조드로 날아갈 때,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은 여자가 잠든 내 입술에 입을 맞추고 나가는 소리를 들었던 같기도 하다. 별은 그렇게 어느 봄날 바람꽃처럼 내 곁으로 왔다가 이 세상에 없는 또 한 축을 따라 우주 속으로 고요히 흘러갔다.
나는 이 땅에서 작가로서 내게 주어진 삶을 다하면 그곳 은비령으로 갈 것이다. 가족에게도 미리 말해 두었다. 가서 묻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뿌려져 그곳의 바람을 타고 이동하며 또 밤하늘을 바라보며 하쿠타케 혜성처럼 한번 떠난 다음 영원히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별을 기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