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여로

윤동주의 자취를 따라서

주인공의 여로 - 교토와 후쿠오카, 윤동주의 여로 교토와 후쿠오카, 윤동주의 여로

흔히 문학기행이라 하면, 남아 있는 생가나 문학비 앞에서 사진 몇 장 찍는 여행쯤으로 생각한다. 윤동주의 경우는 다르다. 죽어 박제된 윤동주가 아니라, 윤동주 정신을 공부하고 윤동주처럼 살려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에는 윤동주를 읽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일본인들이 있다.

일본 정부의 우경화를 염려하고 있지만, 윤동주 시를 공부하는 일본인 중에는 일본의 우경화에 반대하며 풀뿌리 민주주의를 행하는 일본인들이 적지 않다. 일본에서 윤동주를 체험하려면 이분들을 만나야 한다. 그분들 가슴 속에 윤동주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윤동주를 만나는 문학기행은 그래서 다짐의 여행이 된다.

교토, 죽어 만난 두 시인

1942년 10월 1일 윤동주는 도시샤대학에 입학한다. 사립 미션계이지만 그가 좋아하는 형 송몽규를 가까이서 만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시인 정지용이 졸업한 학교라는 사실이 윤동주의 마음을 끌었을 것이다. 윤동주는 도시샤 대학 이마데가와(今出川) 캠퍼스로 갔다.

도시샤대학의 붉은 벽돌 건물들은 붉은 낙엽이 떨어질 만한 가을이면 게다가 황혼녘에는 정말 아름답다. 교문으로 들어가 10분쯤 걷다가 오른쪽 길로 가면 바로 정지용과 윤동주의 시비가 있다.

2014년 12월 13일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에서 정지용 연구 심포지엄이 있었다. 교토 도시샤대학 캠퍼스에 있는 정지용(1902~1950)과 윤동주의 시비는 여행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사실 ‘윤동주’라는 세계를 만든 빼놓을 수 없는 종요로운 인물은 시인 정지용이다.

1948년 1월에 출간된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에 정지용이 쓴 서문을 보면 윤동주를 전혀 몰랐던 것으로 써 있다. 이 청년이 자신의 집에 왔었던 젊은이라는 사실을 강처중에게 들었을 때 정지용의 충격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해방 후 경향신문이 창간되었을 때 주필로 있던 정지용은 윤동주 시 「쉽게 쓰여진 시」를 1947년 2월 13일 경향신문 지면에 소개한다.

이날도 몇 개의 꽃다발이며 노트가 놓여 있었다. 겨울에도 따뜻한 교토지만 이날은 조금 쌀쌀했다. 시비 앞 공간이 전보다 넓어졌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두 시인의 시비 앞을 조금 넓게 만들어 놓았단다. 예년에 없던 연못이 조성되어 있었다. 연못 안에는 어른 팔뚝만할까. 잉어들은 팔뚝보다도 커 보였다. 얼지는 않았지만 차갑게 보이는 연못에서 큰 잉어들이 느릿느릿 헤엄치고 있었다. 연못 앞 벤치에 앉아 있다가 문득 정지용이 남긴 글귀가 떠올랐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적도 없이! … (중략) … 일제 헌병은 동(冬)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鯉魚)와 같은 조선 청년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 정지용, 「서문」, 윤동주 시집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 정음사, 1948

이 서문은 위대한 만남을 알리는 증언이다. 정지용은 윤동주가 “동(冬) 섣달의 꽃,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라는 사실을 처음 알린 시인이었다.

이날 나는 발표(김응교, 「윤동주와 『정지용시집』의 만남」, 『국제한인문학회』, 2015)하면서 연못 속의 잉어에 얽힌 이야기를 말했다. 도시샤대학 교수 몇 분에게, 정지용이 쓴 저 글을 알고 연못을 만들어 잉어를 넣었냐고 물으니 그렇지 않다고 했다.

정지용 윤동주 시인의 시비 앞에 작은 공간을 만들면서 오른쪽에 빈 공간이 생겨, 특별한 이유없이 연못을 만들고 잉어를 풀었다고 한다. 한 일본인 교수는 연못 앞에 이러한 이야기를 써놓은 안내문이라도 세워둬야겠다고 했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한집에서 지내지 않았다. 윤동주는 ‘사코쿠(左京區) 다나카다카하라초(田中高原町) 27번지 다케다(武田) 아파트’, 송몽규는 ‘기타시라카와(北白川) 히가시히라이초(東平井町) 소스이도리(疎水通) 60번지, 시미즈 에이치(淸水榮一)의 이층집’에서 하숙했다. 둘의 집은 걸어서 4, 5분 걸리는 가까운 거리로 교토제국대학과 은각사의 중간쯤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살게 된 송몽규와 윤동주는 자주 만나 민족의 장래와 독립에 대해 대화했다.

오랫동안 이들의 공부 과정을 감시해온 일본 경찰은 결국 두 사람을 체포한다. 두 사람이 일본에 온 지 일 년 조금 넘은 시기였다. 송몽규는 1943년 7월 10일, 윤동주는 7월 14일에 각각 체포된다. 다섯 명이 더 체포되어 모두 일곱 명이 되었고,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된다. 일곱 명에게 씌워진 죄명은 ‘재경도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 책동’이었다. 윤동주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당숙 윤영춘은 도쿄에서 교토로 달려가 면회한다.

취조실로 들어가 본즉 형사는 자기 책상 앞에 동주를 앉히우고 동주가 쓴 조선말 시와 산문을 일어로 번역시키는 것이다. 이보다 훨씬 몇 달 전에 내게 보여준 시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되어진 시들은 거의 번역한 모양이다. 이 시를 고르케라는 형사가 취조하여 일건 서류와 함께 후쿠오카(福岡) 형무소로 넘긴 것이다.

- 윤영춘, 「명동촌에서 후쿠오카까지」, 같은 책, 110쪽

후쿠오카에는 윤동주가 잡혀 있던 구치소가 있다. 흡사 고층빌딩을 옆으로 뉘여 놓은 듯한 교토역에서 후쿠오카로 나도 떠난다.

후쿠오카, 최후의 장소

2011년 한여름에 왔을 때, 위도가 제주도와 비슷한 후쿠오카(福岡)는 푹푹 찌듯 더웠다. 교토에서 15분 정도 가서 신오사카에서 환승하고 신칸센을 타고 3시간 정도 달리면 후쿠오카에 도착한다. 교토에서 후쿠오카까지 신칸센 요금은 자유석이 14700엔, 히카리와 코다마 열차의 지정석은 15200엔, 노조미 열차의 지정석은 15600엔(현재 우리돈 17만 5천원 정도)이다. 후쿠오카 하카다역 건물에는 다양한 식당이 있어 요기를 할 수 있다.

2012년 12월 13일 후쿠오카 대학에서 윤동주 강연을 부탁받아 한겨울에 갈 수 있었다. 서울에서 비행기로 두 시간 걸려 도착한 후쿠오카는 12월이지만 서울보다 한참 따스하여, 마치 늦여름 같은 기분이었다. 금요일에 후쿠오카 대학에서 윤동주 강연을 했다. 학생 70여명과 일본 시민들이 앉아 있었다. 1994년 이후 지금까지 20여 년간 매달 한 번씩 만나 윤동주 시를 공부하는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의 회원도 함께 자리하였다.

강연을 끝내고 윤동주와 그의 시대가 밤새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심야 어둠을 보다가 가슴에서 욱하고 무언가 치밀었다. 윤동주가 다녔던 명동학교는 그냥 학교가 아니다. 용정 일본영사관을 학생들이 불태우기도 했다. 일본군 돈을 강탈한 ‘15만원 탈취사건’(1920.1.4.) 주동자들도 명동학교 선배들이었고, 몇 명은 사형 당했다. 이런 이들이 윤동주 문익환 송몽규의 선배들이다.

윤동주가 경성 연희전문으로, 일본으로 유학 간 것은 전혀 다른 환경에 간 것이다. 38학번 윤동주는 숨 막히는 충격을 느꼈을 것이다. 4학년 때부터 시가 완전히 달라진다. 일본에서 송몽규와 함께 책을 읽다가, 1년 동안 옆방 벽에서 도청하던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히고 이상한 주사를 계속 맞은 후 죽는다. 후쿠오카에서 그 생각을 하니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혼자 침대에 엎드려 소리 없이 울었다. 마구 엉키고 엉킨 너절한 역사들이 목을 죄었다.

조선인 죄수를 모아놓았던 후쿠오카 형무소 자리에 처음 갔을 때 느끼지 못했는데, 1년 만에 다시 간 지난 토요일, 밤새 윤동주와 송몽규의 신음소리를 환청으로 들었다. 후쿠오카에 눈물처럼 겨울비가 내렸다.

현재 후쿠오카 구치소 정문
  • 현재 후쿠오카 구치소 정문

지금 있는 구치소는 윤동주가 수감되어 있던 자리에서 서쪽으로 다시 신축된 현대식 건물이다. 윤동주가 수감되어 있던 자리에는 지금 문화센터가 들어서 있다.

아파트 등 주거지 사이에 있는 새로운 구치소 뒤 공터에서는 매년 2월 16일에 윤동주 추도식이 열린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윤동주의 시신이 태워졌으리라 추정되는 장소도 있다. 하카타 포트 타워에 올라가면 윤동주가 구속되어 있던 구치소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후쿠오카 타워 아래로 해변가가 보인다. 윤동주가 해변가까지 와서 힘겹고 지루한 노역을 하지 않았을까.

기타하라 하쿠슈와 윤동주

매년 2월 16일 윤동주 추도식이 열리는 구치소 뒤 공터
  • 매년 2월 16일 윤동주 추도식이 열리는 구치소 뒤 공터

후쿠오카에 가면 빼놓지 말고 가봐야 할 곳은 텐진(天神) 지하철역에 있는 거대한 지하상가이다. 밤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야간 포장마차 거리를 다녀도 좋겠다만, 윤동주가 좋아했었던 일본 시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1885~1942)의 생가는 꼭 가봐야 한다. 후쿠오카 구치소에서 대략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기타하라 하쿠슈 문학관’이 있다. 두 시인이 머물던 곳은 우연이라 하기엔 신기할 만치 가깝게 위치해 있었다.

시인이자 단카 작가인 기타하라 하쿠슈의 생가 근처에는 운하가 흐르고 있어 중세 시대의 일본 풍경을 자아낸다. 생가인 양조장 건물에는 배를 띄우는 작은 부두가 있어 곧바로 운하를 통해 술과 해산물을 나를 수 있다. 지금도 생가 주변을 보면 그가 얼마나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아름다운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볼 수 있다.

윤동주의 사촌인 윤일주의 회고담에 의하면 기타하라 하쿠슈의 �이 길(この道)�(1926.6.)을 윤동주가 매우 좋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기타하라가 1925년 여름에 홋카이도를 여행할 때 그 인상을 담아 지은 동시인데, 노래로도 작곡되어 널리 알려져 있다.

  • 이 길은 언젠가 왔던 길
    아 그래
    아카시아꽃 피어 있네

    저 언덕 언젠가 봤던 언덕
    아 그래
    봐, 흰 시계탑이야

‘길’이라는 공간을 보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자아성찰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4연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 각 연의 2행에서 “아 그래”가 반복되면서 미묘한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다.

윤동주 시에서 ‘길’이 주요한 상징으로 부각된 시는, 연희전문에 입학하고 ‘한 달 후’인 1938년 5월 10일 쓴 �새로운 길�이다. 이 시에는 매일 매일을 새롭게 보고자 하는 윤동주의 자아성찰이 드러나 있다. 윤동주 시에서 자아성찰의 공간으로 ‘거울’, ‘고향’, ‘방’, ‘별’, ‘우물’, ‘길’ 등의 이미지가 나타난다.

  •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윤동주, �새로운 길�(1938.5.10.)에서

�새로운 길�에는 한자가 나오지 않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연희전문의 한글운동가 최현배 교수를 존경하여, 그의 수업을 들었던 영향을 추론할 수 있다. 생경한 한자를 간혹 쓰던 앞서의 시와 달리, 순한글로 쓴 이 시는 연희전문 1학년생의 싱싱한 열정이 차분하게 느껴진다.

- 김응교, 「기타하라 하쿠슈 「이 길(この道)」과 윤동주 「새로운 길」」, 『한국근대문학연구』, 2016

현재 후쿠오카의 구치소 모습

기타하라 하쿠슈 생가 앞에는 일본의 전통적인 운하가 있고, 노 저어 주는 사람이 옛날 거룻배를 태워준다.

7천 원 정도 뱃삯에 40여 분 동안 노를 젓고 일본 민요를 불러주는데, 낸 돈의 액수에 비해 얼마나 열심히 노를 젓고 노래를 불러주는지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저녁에는 그 운하에서 잡은 장어구이를 운하 옆에 늘어선 식당에서 먹을 수 있다. 먹다가 70년 전에 자기가 좋아했던 기타하라 하쿠슈의 생가를 목전에 두고 감옥에서 죽어간 윤동주를 생각하면, 또 목이 멘다.

후쿠오카 해변에서 서쪽으로 가면 반도의 나라가 나온다. 조국 땅으로 가지 못했던 윤동주가 자주 불렀다는 민요 「내 고향으로 날 불러주」를 불러본다.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던 윤동주의 시혼(詩魂)에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꽁꽁 언 연못 안에 한 마리 잉어를 생각해 본다.

(사진)시인 윤동주와 현재 후쿠오카 구치소의 모습

김응교 시인, 평론가 - 1962년생
평전 『처럼 - 시로 만나는 윤동주』, 시집 『씨앗/통조림』 등
  • 본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입니다.
  • 본 콘텐츠는 사전 동의 없이 상업적 무단복제와 수정, 캡처 후 배포 도용을 절대 금합니다.
작성일
2016-10-07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