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재소설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4화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 EPISODE 1

강세연의 인생에 새로운 내용이 생겼나 해서 순간 긴장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여자 야구선수로 유명한 강세연이, 남녀공학 고등학교 야구부에 진학했다는 내용의 재탕 기사였다. 진작부터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몇 달 전에 이미 몇몇 언론에서, 강세연의 고교 진학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때 내 기분은 여름 소낙비가 쏟아지기 직전의 하늘처럼 급격히 꾸물꾸물해졌다. 어쩌면 모든 기자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천재 야구소녀’라는 표현 때문인지도 몰랐다. 천재라니. 그것은 까마득히 잊은 줄 알았던 지난 일들을 떠오르게 했다.

강세연은 천재 야구소녀가 아니었다. 그건 나였다.

나는 기억한다. 우리는 둘 다 5학년이었고, 전국대회 조별리그 예선전이었다. 나는 3회부터 구원투수로 마운드에 섰다. 첫 타석의 타자를 내야 플라이로 처리했다. 두 번째 타자가 강세연이었다. 강세연이란 이름은 들은 적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그 애의 존재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강세연과 마주 서자 경기 시작 전 더그아웃에서 6학년 선배가 툭 던진 말이 되살아났다.

“야 저 팀에도 너처럼 여자애가 있네.”

그 말에 솔깃하기는커녕 기분이 확 상했다. 야구를 하는 데 여자와 남자 같은 게 무슨 상관이람. 평소 평범하게 나를 대하던 사람들이 사실은 내가 여자라는 것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배신감이 들었다. 나의 착각일까. 나와 강세연이 마운드와 타석에 마주 서자 그라운드를 둘러싼 공기의 결이 미세하게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더 크게 들렸다. 나에게만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싫었다. 여자애와 여자애가 맞붙는다고 다 쳐다보는 것이. 여자라는 이유로 동물원 원숭이가 되는 것이. 불쾌했다. 1초라도 빨리 상황을 종결시켜야 했다. 빨리 끝내려면 타자를 아웃시키는 방법뿐이었다.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나는 힘껏 공을 던졌다. 강세연이 첫 구를 받아쳤다.

딱, 야구공이 배트에 맞는 소리를 듣자마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공은 높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멀리 날아갔다. 강세연의 방망이는 초등학생치고는 힘이 좋은 편이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높이 뜬 공은 우익수가 잡았다. 강세연의 타석은 외야 플라이 아웃으로 처리되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모자를 살짝 고쳐 썼다. 그것이 나와 강세연의 첫 번째 승부였다. 내가 이겼다. 마지막 승부일 것이다. 내가 다시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지는 날은 오지 않을 테니까.

강세연이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강세연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아는지 모르는지, 나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강세연 양은 편견을 넘어……”

또 하나 마나 한 소리였다. 창을 닫으려다 흘낏 보니, 마지막에 실린 강세연과의 짧은 인터뷰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 야구선수로서 지금까지 남모르는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은데?’
‘힘들수록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했어요. 다른 선수들이 한 시간 훈련할 때 두 시간 한다는 각오로 임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더니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되었어요.’

강세연이 정말로 포기, 라고 말했을까. 강세연은 포기가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 걸까.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건 나쁘다. 아니 어리석다. 나중에 그게 정말 뭔지 알고 나면, 아무렇게나 말한 걸 후회하게 될 테니까. 너는 내가 가졌던 걸 빼앗아갔지만, 그건 네가 잘나서가 아니야, 그걸 모르다니 넌 불쌍해, 라고 중얼거리고 싶었지만 내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게 어깨가 오그라들었다. 아무튼 나는 끝까지 검색해볼 것이다. 강세연이 야구를 그만두는 날까지. 그 애가 나처럼 포기라는 말의 진짜 뜻을 알게 되는 그날까지.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엄마의 귀가 시간이었다. 나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곤 방문을 열었다. 엄마는 자기가 돌아왔을 때 우리가 집에 있는데도 부리나케 달려 나오지 않으면 무척 언짢아했다. 뭔가 무시당했다고 여기는지도 몰랐다. 싫어하는 것 앞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태도를 보인다. 싫은 일이 생기면 아빠는 끝없이 잔소리를 늘어놓고, 엄마는 입을 딱 다문다. 그러니 두 사람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엄마! 다녀오셨어요!”

지아가 나보다 한발 빨랐다. 지아는 익숙한 동작으로 엄마의 큼지막한 에코백을 받아들었다.

“너 학원 안 갔어?”

엄마가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물었다.

“내일부터라고 했잖아.”
“아 그랬나. 참 많이도 쉰다.”

엄마가 무성의하게 대꾸하곤 이내 지아 쪽을 봤다.

“너희도?”
“응.”

지아가 고개까지 까딱이며 대답했다.

“양심들이 없어. 그 돈을 받고서. 휴강일은 제외하고 받아가든지.”

어릴 적부터 엄마는 우리에게 드는 ‘돈’에 대해 강조하곤 했다. 예를 들어 옷이나 운동화 등을 함께 사러 가서도 우리가 집어든 물건의 가격표를 먼저 보곤 “이건 안 돼”라고 가차 없이 내려놓았다. ‘비싸서’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어도 우리는 당연히 이유를 알았다. 아빠와 같이 살 때도 그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엄마가 우리에게 돈을 쓰지 않는 건 아니었다. 엄마는 우리의 학원비나 공부하는 데 드는 돈은 여간해서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고 강조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수업 한 번에 얼마 꼴인 줄 알아? 그거면 엄마가 몇 장을 그려야 되는 줄 알아?”

얘기가 여기에까지 이르면 알아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일러스트레이터였다. 결혼하기 전에는 꽤 잘나갔다는데 진짜인지 아닌지는 확인된 바 없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는 어쩔 수 없이 일을 거의 못하다가 초등학교 고학년께가 되면서부터 슬슬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일을 쉬었고, 나이도 많이 들어버린 엄마에게 일을 선뜻 맡기려는 곳은 별로 없었다. 엄마는 일을 가리지 않고 들어오는 대로 다 했다. 지유가 중학생이 된 뒤부터는 아예 비슷한 일을 하는 몇 사람과 공동 작업실을 얻어 출퇴근을 하며 일하고 있었다.

그래도 마감이 급하면 자주 집에까지 일을 싸 들고 와 작업했다. 엄마는 자기 작업을 우리가 보는 걸 왠지 꽤나 싫어했지만 나는 슬쩍슬쩍 들여다보고는 했다. 엄마의 그림들은 세련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선이나 색감이 소박하고 따듯했다. 작업물이 작가와 저리도 다를 수 있는 건지 나는 번번이 웃음이 나왔다.

“이 망할 놈의 마감.”

엄마는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실은 자기 일을 꽤 좋아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이 엄마를 안도하게 하는 것 같았다.

“아유 우리 엄마. 오늘 되게 피곤해 보인다. 얼른 옷 갈아입으세용.”

지아가 엄마 팔을 감으며 말했다. 엄마는 팽팽히 돋우었던 이마의 주름을 거뒀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지아는 엄마 아빠 모두에게 다정한 딸이었다. 가끔은 억울하기도 했다. 내가 특별히 무뚝뚝하다거나 뚱한 것도 아닌데 언제나 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무뚝뚝하고 뚱한 아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던 것이다.

저녁 식탁에서 나는 그동안 무수히 해오던 상상을 반복했다. 만약 부모에게 우리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엄청난 시련이 닥친다면, 엄마도 아빠도 결국 지아를 선택하겠지. 물론 그 앞에서는 어마어마하게 고심하는 척하겠지만 선택지는 결국 같을 것이다.

내가 부모라면?

당연히 마찬가지다. 고심하는 척도 하지 않고 나를 가져다 버릴 것이다.

정이현 작가 사진

정이현 작가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상냥한 폭력의 시대』,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사랑의 기초ㅡ연인들』 『안녕, 내 모든 것』, 짧은 소설 『말하자면 좋은 사람』, 산문집 『풍선』 『작별』 등을 펴냈다. 이효석 문학상, 현대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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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01-05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