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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연재소설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1화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 PROLOGUE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니 알고 보면 인생이란 공평한 것이라고 말해준 사람은 아빠였다. 나는 아빠가 하는 말의 구십 퍼센트는 믿지 않지만 그 말만은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모두가 소중한 한 가지씩을 잃었다면 나는 누가 무엇을 잃었는지 은밀하게 따져보기를 좋아했다. 몇 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기사회생하신 친할아버지의 경우엔 비교적 찾기 쉬웠다. 언어와, 몸의 왼쪽 신경을 잃은 것이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큰이모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 큰이모는 남편뿐만 아니라 평생 맘 편히 욕할 상대를 잃었다. 엄마와의 별거를 선택한 뒤에 아빠는 딸들의 신뢰를 잃었다. 법적 정리에 대해 한사코 외면하는 엄마는 누군가의 아내라는 이름만은 끈질기게 붙잡고 있지만 윤기 있는 표정은 완전히 잃었다.

그리고 나. 열네 살 이후, 내가 잃은 것은 꿈이다.

동정할 필요는 없다. 아무 꿈도 없이 사는 일은 상상만큼 끔찍하지는 않으니까. 겉보기에 달라진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냥 하루하루 살아간다. 이후 나를 알게 된 이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내가 누구였는지. 내가 누구인지.

# EPISODE 1

그 여름은 특별한 구석이라곤 전혀 없었다. 미친 듯이 덥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주 덥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기상 캐스터는, 오늘 기온은 예년과 비슷하다는 말을 가장 많이 했을 것이다. 나에게는 초등학교에서 보내는 마지막 여름방학이었다. 우리(그 무렵의 나에게 ‘우리’란 야구부와 야구부원만을 지칭하는 것이었다)에게 주어진 휴가는 딱 한 주일이었다. 그러고 나면 다시 훈련이 시작되고, 그다음 주에는 일주일 동안의 전지훈련도 예정되어 있었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방학 때마다 반복되어온 스케줄이었다.

운동을 하지 않는 하루는 길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승호와 강이와 나는 별 약속 없이도 경로당 앞 놀이터에 습관처럼 모이곤 했다. 그날 오후 우리는 또 모였다. 플라타너스나무 그늘 아래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딸기 맛 아이스바를 먹었던 것이 기억난다. 절반쯤 먹었을 때 중학교 교복을 입은 남학생 한 명이 놀이터를 가로질러 빠르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중학교는 방학 아닌가?” 승호가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응? 우리 형은 방학했는데.” “근데 저 형은 왜 교복 입고 가?” “모르지.” 하드를 아드득 깨물며 내가 끼어들었다. “방학 안 했다고 집에다 뻥치고 놀러 가나 보지.”

승호와 강이가 쿡쿡 웃었다. 나도 친구들처럼 웃었다. 그때 나는 우리가 삼총사쯤 된다고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말이다.

“근데 너네 형은 학교 갈 때 교복 입어? 유니폼 입어?” 승호가 강이에게 물었다. 일루수이지만 한 번도 주전을 한 적이 없는 강이와 달리, 강이의 형은 명진중학교 야구부의 에이스였다. “교복.” “진짜?”

승호는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응. 입어도 되는 학교도 있는데 명진은 안 되나 봐.”

연습 때마다 교복을 벗고 유니폼으로 갈아입어야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귀찮은 일이었다. 나는 별 의미 없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럼 명진중은 안 가야겠다.” “누구? 너?”

그렇게 물은 건 승호였다.

“응.”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어차피 넌 못 가잖아.” “엉, 왜?”

명진중학교는 우리 구내에서 야구부를 가지고 있는 두 군데 중학교 중 하나였다. 실력이 아주 뛰어나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괜찮은 팀으로 알려져 있었다. 몇 해 전엔 시 대회에서 8강에 오른 적도 있었다. 웬만한 야구부 선배들은 대부분 그리로 진학했다.

“거긴 남자 중학교잖아.” “어?”

그렇게 되묻던 내 어리벙벙한 목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그 물음표는 승호와 강이가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해 갈고리처럼 휘어진 것이었다. 나는 집으로 급히 뛰어 들어와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모든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여자 야구부가 있는 중학교는 이 나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7개월 뒤 이곳을 졸업하고 나면, 나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거였다.

너무 황당하고 충격적이라 믿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기가 막힌 것은 여태껏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거였다. 그걸 내게 알려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대체 왜? 내 머리를 강타한 것은 거대한 배신감이었다. 어른들은 이 중요한 것을 왜 내게 꽁꽁 숨겨왔을까?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정신없이 학교로 뛰어갔다. 텅 빈 학교에, 텅 빈 체육관에 감독님이 있었다.

단단하게 부서지도록

“아니 너 몰랐어?”

그것이 감독님의 첫마디였다.

“나는 당연히 아는 줄 알았지.”

감독님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쓰고 다니는 야구모자의 캡을 한 손으로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중얼거렸다. 곤란할 때면 어김없이 나오는 버릇이었다.

“전 어떡해요? 이제?”

나는 따져 물었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운드에서 스리 볼 노 스트라이크 상황에 몰렸을 때처럼.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다시 던지는 것밖에 나는 다른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감독님, 저 어떻게 하냐고요. 중학교 못 가면요.”

감독님이 느릿느릿 대답했다.

“아 중학굘 왜 못 가. 학교는 가야지.” “그럼요? 그럼 어떻게 해요?” “지유야.”

감독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멈칫했다. 감독님은 나를 늘 “야 강지유”라고 불렀다. 아니면 “야 깡!”이라고 부르거나. 이름만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학교에서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만약 네가 원하면 야구는 계속할 수가 있어.”

그의 말이 더는 귀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체육관을 뛰어나왔다. 교문을 지나 나오는 길을 따라 달리고 또 달렸다. 방향은 정하지 않았다. 눈물이 줄줄 흐르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것이 내가 ‘어떤 것’을 잃은 날의 풀 스토리다.

그게 시작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소중한 걸 한 번 잃은 사람은 자꾸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도. 한 번 마음을 접혀본 적 있는 사람에겐 무언가를 기필코 지켜야 한다는 의지 같은 것이 희미해져 버리는 건지도 몰랐다.

그 뒤로 나는 야구부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계 전지훈련에도 참가하지 않았고, 가을에 열리는 전국 초등학교 야구대회 예선을 위한 어떤 훈련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2학기 개학 날 유니폼 대신 평상복을 입고 등교하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승호와 강이가 어떤 때는 둘이 같이, 어떤 때는 번갈아 가며 집 앞에 찾아왔지만 나는 그 아이들을 만나지 않았다. 야구대회 예선전이 가까워 오자 친구들도 바쁜지 더는 찾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내가 야구를 그만둔 것을 알게 된 엄마아빠의 반응은 예상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왜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느냐는 내 말에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나도 몰랐어!”“어른이라고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라고!”

엄마는 여자이면서도, 여자가 야구부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그걸 계속하려고 했니?”

이제라도 그만두게 되어서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이제 공부를 좀 해. 우리 좀 정상적으로 살자.”

그 무렵만 해도 함께 살고 있던 아빠는, 역시 엄마의 입장과는 정반대였다.

“포기하지 않아도 돼!”

아빠는 여자 야구단에 전화해 문의해보았다고 했다.

“너만 좋다면 실력 한번 보고 들어갈 수 있대.”

아주 잠깐 솔깃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주말에만 나가 훈련을 하고 연습게임도 한다고 했다. 아직 중학생은 없지만 대학생도 직장인도 아주머니도 있다고 했다.

“여자끼리만 한다는 거야?” “그렇지. 여자 야구단이니까.” “싫어. 안 갈래.” “왜?”

왜냐는 아빠의 물음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빠는 두어 번 더 묻다가, 이내 “싫으면 말아라”라며 더는 캐묻지 않았다.

정이현 작가 사진

정이현 작가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상냥한 폭력의 시대』,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사랑의 기초ㅡ연인들』 『안녕, 내 모든 것』, 짧은 소설 『말하자면 좋은 사람』, 산문집 『풍선』 『작별』 등을 펴냈다. 이효석 문학상, 현대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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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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