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토리

존경 받는 강철 리더, 강수진

허스토리 시즌2 : 존경 받는 강철 리더, 강수진 존경 받는 강철 리더, 강수진

50세, 아직도 완벽은 없다

강수진

지난 6월 글로벌 브랜드 리복은 여성들의 도전을 응원하는 2016년 하반기 우먼스 캠페인 광고를 공개했다. 캠페인 홍보대사는 한국국립발레단의 예술감독이자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 “완벽은 없다”는 슬로건을 앞세운 캠페인은 쉰을 앞둔 나이에도 여전히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영상화시킴으로 완벽에 목표를 두지 않고 자신을 향해 나아가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영상은 유튜브에서 3백만에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했다. 한 달 후 그녀는 또 한번 SNS상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20년이 흘러도 그녀가 변치 않는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의 30년과 은퇴

강수진

오네긴 : 러시아의 시인 푸시킨이 1831년에 완성한 소설로 자유 분방하고 오만한 남자 오네긴과 순진한 소녀 타티아나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을 세계적인 극단으로 만든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상징이자 드라마 발레단의 거장인 천재 안무가 존 크랑코의 안무에 차이코프스키의 서정적인 음악과 주인공의 미묘한 심리변화가 어우러져 ‘말괄량이 길들이기’, ‘로미오와 줄리엣’과 함께 20세기 최고의 드라마 발레로 꼽힌다.

지난 7월 강수진은 은퇴 공연으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오네긴》을 끝내고, 커튼콜을 하기 위해 무대 한가운데 섰다. 객석을 향해 두 팔을 벌려 정중히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드는 순간,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객석 가득 자리에서 일어난 관객들 손에는 하트 그림과 ‘Danke, Sue Jin(고마워요, 수진)’ 이란 글자가 쓰여진 커다란 카드가 들려있었고, 무대 스크린에는 ‘Liebe Suejin(사랑해요 수진)이라는 자막이 올라왔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홈페이지에 이 장면이 담긴 사진이 올라오자 SNS에는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의 은퇴를 아쉬워하는 전세계 팬들의 댓글들이 이어졌다.

이 날의 공연은 세계적인 이슈였다. 3개월 전에 시작한 티켓 판매는 오픈하자마자 바로 매진이 되었고, 공연 날에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극장으로 모였다. 극장 앞에는 취소 티켓을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섰고, 플래카드를 들고 표를 구입하려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마침 이날은 그녀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입단 30년이 되는 해이고, 7월 22일은남편의 생일이라, 그녀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체지방 제로, 두 세 시간만 자도 행복해

강수진

그녀는 작년 10월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해 은퇴와 관련, “오늘 그만두어도 후회 안 한다. 후회없는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자신의 짧은 수면시간에 대해‘2~3시간만 자도 행복하다. 살아있는 게 신기하다’고도 했다. 알려진 대로 그녀는 체지방 제로에 수면 시간이 5시간을 넘지 않기로 유명하다. 한국고전무용에서 발레로 전공을 바꾸면서 혹독하게 연습을 하면서 수면시간은 4시간이하로 더욱 줄었고, 연습량은 10시간 이상으로 늘었다.

발레는 보통 평균 일곱 살 이전에 시작을 하는데 강수진은 열네 살이 되어서야 어머니의 권유로 발레로 전향했다. 선화예중에서 고전무용을 하던 그녀에게 안으로 펴는 동작이 대부분인 고전무용과 밖으로 뻗는 동작 위주인 발레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작이었다.

“밤이면 토슈즈를 안고 잠이 들었다. 새벽이면 어머니보다 먼저 일어나 혼자 찬밥을 먹고 연습하러 갔다.”

모나코로 발레유학을 가서도 하루 4켤레의 토슈즈를 갈아 신으며 하루 15시간 이상 춤을 추었다.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에서 유학할 때 연습실이 내가 쓰러져야 할 마지막 무대라고 생각하고 매일 연습했다.”9시면 불을 끄는 규칙에 따라 밤에 연습할 곳이 없어, 달빛을 조명 삼아 아무도 없는 불 꺼진 작은 연습실에서 2년간 도둑 연습을 했고 지금까지 연습한 시간의 총량만 20만 시간이 넘는다.

그녀는“하루 24시간 밖에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한국, 발레 변방국에서 주역으로

발레는 서양무용으로 1926년에 일본인 석정막이 ‘신무용’을 소개하면서 서양 춤으로 처음 알려지게 되었고, 5년이 지난 1931년 3월 슈하로프라는 무용가의 공연이 ‘발레’ 형태로 최초로 소개됐다. 지금과 같은 발레 공연이 선보이는 것은 1976년 초연된 ‘백조의 호수’를 꼽는다.

10년 후 강수진이 세계 무대에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나라 발레는 발레의 변방국이었다. 국내에서 미국 유학파인 문훈숙과 일본 유학파인 최태지, 두 명의 발레리나에 의해 양대 발레극단인 유니버셜 발레단과 국립 발레단이 1980년대 한국 발레를 주도하며 발레의 중흥기를 이끌던 시기였으나, 국제 발레계에 한국 발레는 변방과 다름없었다. 이후 조기 유학으로 해외에 진출한 발레리라 중에서 스타 발레리나로 강수진이 등장했는데, 이로서 동양인으로 세계적인 발레극단의 주역으로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얼굴보다 발이 더 유명하다?

강수진

발레 하면 지금은 발레리나를 먼저 떠올리지만, 1681년 프랑스 왕립무용학교의 초대 교장이었던 뤼리가 여성 무용수를 《사랑의 승리》 공연에 올리기 전까지 온전히 남자들만의 예술이었다. 여자역은 어린 남자들이 여자 가면을 쓰며 소화했으며, 왕립무용학교를 세운 루이 14세는 직접 춤을 추고 즐길 만큼 발레 마니아였다.

뤼리에 의해 무대에 오른 후에도 70년 동안 발레리나는 치렁치렁한 치마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채 무대를 거니는 장식적인 존재였다. 발레리나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되게 만든 건 마리 카마르고라는 혁명적인 무용수에 의해서였다. 마리 카마르고는 1730년대 발목이 보이면 안 된다는 당시 금기를 깨고 20cm 위로 치마를 자르고 뒤축이 없는 구두를 신고 무대에 올라 앙투르샤 카틀(공중에서 2회 발 부딪히기 기술)을 선보였다.

뒤를 이어 19세기 초 마리 탈리니오가 로맨틱 투투를 입고 발끝으로 서는 토 기법으로 물 위를 걷듯 나풀거리는 동작을 선보였는데, 당시 로맨티시즘의 사조와 맞아떨어지며, 이로써 발레는 여자들의 예술로 변모한다. 앙트르샤(뛰어오르기), 카브리올(하늘에서 뛰어오르면서 무릎 아래를 부딪히기), 비르에트(한쪽 발의 회전), 토(발끝으로 서기) 등 시간이 지나면서 고도화된 발레 기술은 아름다움을 주는 동시에 발레리나에게는 가혹한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강수진 역시 15시간이 넘는 독한 연습을 매일 강행했고 그녀의 발은 성할 리가 없었다.

어느 날 남편은 많이 붓고 아파서 탁자 위에 올려진 그녀의 발을 보았다. 토슈즈 안에 숨겨졌던 발은 발가락뼈 마디마디가 튀어 나오고, 상처투성이에 발톱은 뭉개진 것이 도저히 여자의 발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남편은 피카소의 작품 같다며 사진을 찍고, 액자에 담아 걸어두었다. 이 사진은 그녀의 집을 방문한 MBC 프로그램 ‘성공시대’에서 소개되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아름다운 발레리나의 이미지와 상반된 ‘강수진의 발’은 사람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그때 얻은 별명이 ‘강철 나비’. 무대에서 발이 덧나 생고기를 넣고 공연을 했다는 일화는 신데렐라의 고통이 녹아있는 발 사진과 함께 뜨거운 열정, 끊임없는 노력의 상징이 되었다. 한편, 그녀는 그 사진으로 사람들이 만나면 그녀의 발을 보느라 한동안 샌들을 신지 못했다고 한다.

십만 명 중의 한 명을 알아 본 사람

강수진

그녀에겐 결정적인 순간, 결정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그녀를 발레의 매력에 빠지게 해준 캐서린 베스트 선생님은 물론 마리카 베소브라소바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의 교장선생님은 그녀에게 ‘발레의 어머니’와도 같다. 뒤늦게 시작한 발레에 적응하고 얼마 안되었을 무렵, 선화예중으로 낯선 외국선생님이 방문했다. 마리카 베소브라소바는 당시 열다섯 살이던 눈이 동그랗고 가녀린 몸매의 강수진을 발견하곤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로 초청했다. 그녀에게 있는 ‘it’(발레에서 말하는 끼)을 본 것이다. 망설이는 어머니에게 ‘10만명 중에 1명이 나올만한 재능’으로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될 것이니 믿고 보내달라고 설득한 것도 마리카였다. 선생님은 1982년 고등학교 1학년 때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로 유학 온 그녀에게 숙식과 교육 일체를 제공하며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그녀를 잡아주며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미국 진출 제의가 왔을 때 강수진을 하이데 마르시아 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예술감독에게 소개하여 독일 슈투트가르트 극단에 추천한 것도 그녀였다.

같은 무용수로 만나 7년 연애 끝에 결혼한 남편의 외조 또한 그녀를 지금의 자리에 있게 만든 일등공신이다. 그와는 발레단 선배로 만나 8년만에 연인, 그리고 7년만에 남편으로 발전했고, 10년이 넘는 삶을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선생님처럼 함께 했다.

내게 ‘포기’라는 단어는 없다

강수진

강수진이 성공하기 전까지 서양 예술인 발레가 동양인에게는 불리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지 채 100년이 되지 않았고, 대중이 보는 발레는 친숙하지 않은 ‘서양 춤’이였다. 1926년 일본인 석정막은 ‘신무용’을 소개하면서 발레를 서양 춤으로 소개하였고, 5년이 지난 1931년 3월 슈하로프라는 무용가의 공연이 ‘발레’ 형태로 최초로 선보였다. 지금과 같은 발레 무대는 1976년 초연된 《백조의 호수》로 이때 이후로 발레의 대중화가 시작된다. 강수진이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발레의 변방국가였다. 그녀가 유학을 떠날 1980년대 당시 우리나라 발레는 미국유학파인 문훈숙과 일본유학파인 최태지, 두 명의 발레리나에 의해 유니버셜 발레단과 국립 발레단이 한국 발레를 주도하며 발레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세계의 벽은 여전히 높았다.

그녀가 처한 현실은 더 절망적이었다. 훨씬 좋은 신체 조건을 가진 외국 친구들 사이에서 안 된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고, 아는 영어라고는 ‘아임 수진’ 밖에 없는 상태로 비행기에 올랐다. 친구들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 을 수 없어,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언어를 배웠다. “가장 발레를 못하는 아이”는 밤새 연습을 해서 4개월만에 다른 아이들과 실력이 비슷해졌고, 유학 온지 1년만에는모나코 왕립발레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았다.

유학 길에 오른 지 3년째 되던 1985년, 그녀는 그 해 미국에서 열렸던 스위스 로잔 콩쿨 그랑프리 결승전을 잊지 못한다. 세계 무대에 그녀의 이름을 알리는 첫 우승을 안긴 무대였고, 한국 발레리나가 메이저 세계무대에서 상위권에 오른 첫 사례였다.

우승을 계기로 강수진은 여러 발레단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게 되었는데, 그녀는 고전과 모던 발레가 공존하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의 발레리나로 꼽히는 마르시아 하이데가 있는 독일의 슈트트가르트 발레단으로 마음을 굳힌다. 19세가 되던 1986년에는 동양인 최초, 최연소의 나이로 독일의 발레의 명문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군무로 입단하면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때부터 그녀는 최초와 최고의 기록을 하나씩 쌓아갔다. 그녀는 뛰어난 집중력과 무대 장악 능력으로 슈투트가르트의 드라마 발레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발레리나로 인정받으며, 7년 후에는 솔리스트가 되었다.

최고의 순간에 찾아온 최고의 위기

강수진

그러나, 시작은 어렵고 보잘 것 없었다. 입단 당시 까마득한 군무의 일원, 게다가 순서는 다섯 번 째. 선배들이 무대에 설수 없어야 기회가 오는 자리였다. 게다가 독일어도 할 줄 몰랐다. 반 지하 곰팡이가 핀 집에서 맞는 독일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춤출 일은 없고 열악한 생활을 하다 보니 몸도 마음도 힘들어 폭식증에 몸이 10kg이나 불은 적도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레시필드’라는 작품의 군무 한자리가 돌아왔지만, 무대에서 실수가 이어지자 좌절하고 깊이 반성한다. 이때 이후로 그녀는 무대에 설 가능성이 없어도 늘 준비하는 마음자세로 다시 10대 때처럼 연습에 몰입했다.

가장 큰 위기는 최고의 순간에 찾아왔다.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의 원작 소설을 쇼팽의 멜로디로 풀어낸 ‘카멜리아 레이디’로 그녀는 1999년 발레계의 아카데미 상으로 불리는 ‘브누아드라당스’ 상을 받았다. 전성기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5년째 앓고 있던 금이 간 왼쪽 정강이뼈 조직이 심각하게 곪았다. 정강이뼈 스트레스성 골절로 걸을 수도 없었고, 은퇴를 고려해야 했다. 의사는 ‘연습을 계속 하게 되면 발레를 못할 수도 있다.”고 주의를 주었다.

당시 나이 서른 둘. 심각한 부상을 입은 대부분의 무용수들이 복귀에 실패했기 때문에 1년간의 재활치료와 연습을 번복하는 동안 다시 무대에 설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걷게 되었어도 다리가 45도 이상 올라가지 않았고, 다시 일어날 거라고 말한 사람은 남편이 유일했다. “머리 빼고 다 부러졌다.”고 말할 정도로 가녀린 강수진은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었고 부상은 이후 계속되었지만 마흔이 넘어서도 그녀는 여전히 무대에 있었고, 최고령 현역 발레리나라는 기록도 새로 썼다. 그래서, 그녀는 ‘만약’ ‘내일’, ‘포기’라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

존경 받는 여성 리더 1위

강수진

현역 최고령 발레리나로 활동해온 강수진이 40대 중반을 넘기자, 은퇴 이후 그녀의 행선지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유럽에서 예술 감독 등으로 일할 것이라는 세간의 예상과 달리 그녀는 2014년 제 7대 한국국립발레단의 예술감독 직을 수락했다. 32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여러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나왔다. 한편에서는 한국의 조직생활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박봉으로 궂은 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 데 감당할 수 있을 지, 세계최고의 위치에 선 발레리나가 단체를 잘 이끄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 지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그녀는 취임사에서 "단원들의 기량 향상에 승부를 걸겠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거창한 포부보다는 구체적인 목표,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작은 것에 집중하고, 철저하게 관리하는 노하우는 단원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녀는 매일 기본 훈련을 같이 하고, 리허설에도 빠짐없이 참관하며 단원 한 명 한 명의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했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말 한마디까지도 책임을 지는 리더와3년을 함께 생활하는 동안 단원들의 기량은 향상되었고 헬싱키 등 해외 콩쿠르에서 수상했다. 발레가 재미있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비수기에도 국립 발레단의 공연 티켓은 매진되었다. 2016년에는 여자 단원들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게오르게 발란친의 ‘세레나데’와 마르시아 하이디의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처음 선보였다.

그녀는 2017년 1월이면 예술감독으로서의 임기 종료를 앞두고 있으며20대 여성이 가장 존경하는 리더 1위, CEO가 뽑은 13시간 미국 행 비행기 옆자리에 앉고 싶은 인물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강수진

강수진

강수진은 1967년4월24일서울에서 태어나1979년 선화예술 중학교에 한국고전무용 전공으로 입학하였으나, 1학년 때 발레로 전향한다.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의 교장 마리카 베소브라소바에 의해 발탁되어1982년 선화예술 고등학교 1학년에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로 유학 길에 올랐다. 1985년 스위스 로잔 콩쿨에서 동양인 최초로 1위에 입상하고, 동양인 최초, 최연소로 86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군무로 입단하고, 7년만에1994년 발레단의 솔리스트로 선발되었으며, 1996년 수석 발레리나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의 발레는 섬세한 테크닉에 완벽한 표현력으로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맡는 캐릭터마다 그녀만의 개성과 색깔을 입히며 특유의 카리스마로 무대를 장악하여 관객들을 몰입시키는 힘이 뛰어나다.

강수진은1998년 문화관광부 선정,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하였고, 1999년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라트라비아타’를 발레로 재해석한 ‘카멜리아 레이디’라는 작품으로 동양인 최초로 ‘발레 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드라당스’에서 수여하는 최고여성무용수에 선정되었다. 또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유일한 종신단원이며, 2005년에는 첫 우승을 한 스위스 로잔 콩쿠르의 심사위원이 되어 활약했다. 가장 오래된 최고령 현역 무용수로 2007년에는 최고의 예술가에게 부여하는 장인 칭호인 독일 궁중무용가(캄머탠처린)과 '존크랑코'상을 수상하였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카멜리아 레이디’의 마그리트, ‘오네긴’의 타티아나이며 여기에 '로미오와 줄리엣'을 더하면 그녀의 3대 대표작이 된다.

김미현
일러스트
조영민
사진 협조
연합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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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12-06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