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년만에 탄생한 올림픽 골프 금메달 리스트
지난 8월 21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골프 코스에서는 여자 최종 라운드가 벌어지고 있었다. 파 71, 6245야드에 이르는 코스에는 수시로 리우의 강한 바람이 불었다. 세계적인 스타들이 빠진 남자부에 비해 여자부는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총출동했다. 그 가운데 세계 랭킹 1위인 리디어 고와 대한민국의 박인비가 금메달을 두고 마지막 라운드를 치르고 있었다. 마지막 4라운드 결과 버디 7개, 보기 2개, 최종 합계 16언더파로 박인비의 금메달이 확정되자 박인비는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116년만에 올림픽 정식 코스로 부활한 골프에서 새로운 금메달 리스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한 달 전만해도 그녀를 믿는 이는 없었다
경기 내내 표정에 변화가 없던 그녀의 얼굴에 모처럼 웃음꽃이 피었다. 그녀의 머리 속에는 한 달 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2016 리우 올림픽에서 골프가 116년만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자 우리나라도 국가대표 선발이 화두에 올랐다. 티켓은 총 4장. 박인비를 포함 정인지, 김세영, 장하나 등 세계 15위권 내에 드는 쟁쟁한 후보들만 8명이였다. 순위는 박인비가 가장 높았지만, 올해 그녀의 성적은 최악이었다. 시즌 초반에는 허리 부상에 시달렸고, 4월 이후엔 엄지 손가락 부상으로 대부분의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게다가 올림픽 전초전으로 출전한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투어 삼다수 마스터스에서는 탈락하기까지 했다. 주변의 우려와 달리 박인비가 올림픽 출전을 발표하자, ‘올림픽에 나가도 되는 것이냐‘는 댓글부터 ‘양보가 필요하다’, ‘무모한 도전이다’, ‘무리하게 대회에 나가는 것’이라는 경고 등 인터넷에는 악성 댓글이 이어졌다.
부상도 극복한 카리스마 - 돌부처, 침묵의 암살자
박인비는 출전 결정 후 이어지는 비난에 “제가 가는 길이 맞는 걸까요?”라며 마음 고생이 심했음을 토로했다. 하지만 본 경기에 들어서자 그녀는 위기 상황에도 차분히 플레이를 이어갔다. 박인비에게 붙은 별명은 ‘돌부처’. 그녀는 타고난 집중력에서 오는 냉정함으로 표정 변화가 없기로 유명하다. 그 흔한 세리모니도 좀체 보여주는 법이 없다. 함께 경기하는 선수들을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그녀의 설명과 달리 특유의 무표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는 경쟁자들을 위축시키곤 한다.
그래서 붙은 또 하나의 별명이 ‘침묵의 암살자’. 뉴욕 타임즈는 박인비의 경기를 보고 ‘평온의 여왕(Queen of Serene)’, 높낮이가 심한 서보낵 그린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으로 버디 찬스를 놓치지 않는다’고 평했다. 비난 여론과 최악의 컨디션 속에서도 남편의 선배까지 찾아가 스윙을 교정하고 올림픽 경기 마지막 날도 얼음 찜질로 부상을 견디며 5언더까지 몰아친 그녀다.
경기 후 병원으로 직행한 박인비는 3주 간의 깁스 진단을 받았고, 귀국 후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붕대를 감고 참석해, 부상의 정도가 심상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지독한 악플과 부상을 딛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그녀의 뚝심이야말로 금메달 감이 아닐까.
열 아홉 살, 외조의 왕을 만나다
경기장 밖에서의 박인비는 분위기 메이커로 통할만큼 사람을 좋아하고 긍정적인 성격을 가진 반전 매력의 소유자라는 것이 주변의 평. 무뚝뚝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연애와 사랑도 금메달 감이다. 지금의 남편인 남지협 코치를 만난 건 미국 유학 중이던 열아홉 살 되던 해. 두 사람은 박인비의 코치였던 백종석 코치가 운영하는 LA의 골프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났다. 선수로서 국내 경기에서 주로 활약하던 남편은 당시 LA에서 전지 훈련 중이었다. 그의 첫 인상에 대해 박인비는 “그저 나이 들어 보이는 아저씨였다.” 고 말했지만 어쨌거나 말이 없던 그를 오빠라고 부르며 따라 다녔고, 성인이 된 2006년부터 둘은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둘은 2007년 경주에서 열린 하나은행 챔피언십 경기 후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남지협 코치가 자신의 운동을 포기하고 박인비 선수의 코치로 전환하는 결심을 하게 된다. 박인비의 아버지도 “골프를 시킨 것은 가족이지만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한 것은 남편”이라고 말할 만큼 남편은 박인비에게 든든한 버팀목 같은 존재다.
국민 골퍼는 남편도 ‘국민 남서방’
박인비는 두 번의 큰 슬럼프 뒤에 놀랄 만 한 반전을 보여 주었는데, 여기에는 그의 적확한 기술적 조언이 있었다. 그녀는 여타 골프 선수들에 비해 손이 작다. 선천적으로 손목뼈가 짧고, 오른쪽 손목이 거의 꺾이지 않아 공을 치면 공이 날아가는 거리, 즉 비거리에서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 첫 슬럼프가 찾아온2008년. 박인비는 첫 우승 이후 3년간 큰 대회에서 톱 10에 한번 올라간 것을 제외하고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거기에 허리 부상에 이어 드라이버 공포증까지 생기며 심한 슬럼프에 빠졌다. 상황이 절박해지자, 한 번은 골프를 그만두고 미국에서 좋아하는 비디오나 실컷 볼 수 있는 비디오 가게를 차려볼까 하는 마음을 먹기도 했다.
그 때 남기협 코치는 기존의 스윙법이 가지고 있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녀의 자세를 바꿔볼 것을 권했다. 슬럼프 후 가진 경기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윙법을 선보였다. 정반대 스타일의 스윙법을 택한 결과 자신감을 회복한 그녀는 2012년 3승, 2013년 3개 메이저대회 연속 우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했다. 2013년 7년간의 열애 끝에 두 사람을 결혼에 골인했다. 박인비는 언론 인터뷰에서 “남편은 내 자신을 안주하지 않고 성장시키는 버팀목인 것 같다. 그런 남편이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말로 남편바라기임을 숨기지 않았다. 이에 질 세라 팬들은 그를 ‘국민 남서방’으로 부른다.
‘3대가 골프 치는 가족’의 꿈을 이루다
박인비는 박세리 키즈의 대표주자이다. 그녀는 1998년 7월에 열린 박세리의 US여자 오픈 경기를 보고 골프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18홀 마지막 홀에서 물에 빠진 볼을 치기 위해 양말을 벗고 들어가 샷을 한 끝에 극적으로 우승한 박세리의 맨발 투혼은 초등학교 4학년인 박인비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박인비는 그로부터 이틀 만에 골프 채를 잡고, 골프선수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골프 마니아인 가족들은 그녀의 꿈을 지지했다. 박인비의 할아버지는 3대가 골프 치는 것이 꿈이었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임신한 후에도 7개월 동안이나 골프를 쳤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 또한 딸을 위해 회사 경영을 잠시 미루고 골프 대디를 자처했다. 그녀는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을 업고 일찍이 미국으로 골프 유학을 떠났다. 중학교에 재학 중일 때 이미 박세리와 미셸 위의 코치를 맡았던 미국 플로리다의 유명한 데이비드 레드베터 스쿨을 다녔고, 3년 후에는 라스베가스로 옮겨 타이거 우즈 전 코치였던 부치 하먼의 지도를 받았다.
2002년 US여자주니어선수권 대회 우승 등 수많은 주니어 대회에서 우승하며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고 메이저대회 첫 우승도 빨리 찾아왔다. 메이저대회 데뷔 이듬해인 2008년에는 US여자오픈 최연소 우승을 거머쥐었다. 첫 우승의 성공이 너무 빨라서였을까? 우승 후 그녀는 슬럼프에 빠지며 성적이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 적도 있었다.
억대 연봉 억대 기부
슬럼프 탈출 후 박인비는 역대 최대, 역대 최소의 기록들을 만들어갔다. 마침내LPGA 17승을 비롯해 메이저 대회에 모두 우승하고 올림픽에서 금메달까지 거머쥐면서 ‘커리어골든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막대한 우승 상금으로 연 20억에 가까운 연봉을 비롯해 재산 규모로도 주목을 받는 그녀는 데뷔 후 지금까지 꾸준히 기부를 실천해왔다. 첫 우승 후 3800만원을 기부한 것을 시작으로 버디 할 때마다 2만원씩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는 등 4억 5천만원이 넘는 기부금을 꾸준히 내놓았다.
올림픽이 끝난 지난 9월 2일에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원을 기부하여 고액 기부자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했다. 현재 그녀는 손가락 부상이 완쾌되지 않아, 예정된 에비앙 대회 출전을 포기하고 메이저 대회를 목표로 다작보다는 선택과 집중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박인비 프로파일
박인비는 1988년 7월 12일 생으로, 초등학교 4학년부터 클럽을 잡았다.
2007년 18살의 나이로LPGA 투어에 데뷔하였고 2008년 첫 우승을 시작으로 2012년 LPGA 상금왕, 2013년 올해의 선수상, LPGA상금왕, 2014년 유럽여자프로골프투어 월드레이스 챔피언십 우승 등 화려한 기록을 써 내려갔다. 정교한 샷과 컴퓨터 퍼팅으로 불리는 정확한 퍼팅을 무기로 아시아인 최초로 LPGA 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 LPGA 투어 역대 7번째 기록을 세웠다.
2016년 까다롭다는LPGA 명예의 전당에 가입함으로 박세리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역대 최연소 선수라는 타이틀도 갖고 있다. 또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4개 메이저 대회를 제패하고 그랜드슬램과 올림픽까지 우승을 거둔 남녀골프 선수로는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