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토리

조선시대 뇌섹녀, 신사임당

허스토리 시즌2 : 조선시대 뇌섹녀, 신사임당조선시대 뇌섹녀, 신사임당

이영애가 12년 만에 선택한 그녀

작년 11월 30일 강릉시 씨마크 호텔에서는 국내외 3천여명의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12년만에 배우 이영애의 드라마 복귀를 알리는 자리로 그녀가 무대에 등장하자 순식간에 수백 대의 카메라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작품 선택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그녀가 심사숙고하여 타이틀 롤을 맡기로 결정한 인물은 현모양처의 대표이자 조선시대 천재 여류 예술가인 신사임당. 2007년 이후 꼭 10년만에 신사임당이 다시금 화제의 중심에 선 것이다. 하지만 불과 10년전 만해도 5만원권 화폐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신사임당이 선정된다는 소식을 한국은행이 발표했을 때 일부 여성단체들이 강하게 반발하여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었다.

10년 전과는 대조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사임당.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는 이미 11개국에 판권이 판매되었고 중국에서 동시 개봉할 예정이라고 한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현모양처로 알려져 온 사임당 신씨에게는 어떤 진실이 숨어 있을까.

현모양처라서 화폐 주인공이 못 될 뻔 하다

신사임당

신사임당이 현모양처의 이미지로 부각된 것은 그녀의 아들이자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 율곡 이이의 사상을 계승한 후대 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우암 송시열이 ‘사임당이 그린 난초에 반하다’는 글에서 사임당과 율곡 모자를 중국 송대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정호와 모친 후씨에 비유하면서 현모양처 이미지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노론 계열의 유학자들이 사임당 예찬에 가담하면서 이 이미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일제시대 일본이 군대 징집에 신사임당을 활용하면서 ‘현모양처=신사임당’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졌고, 해방 후에도 이어졌다.

하지만 현모양처로 굳어진 이미지 때문에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5만원권 화폐 도안 인물 선정 반대운동이 대표적이다. 2007년 10월 한국은행이 2009년부터 신규 발행되는 5만원권 화폐 인물 후보로 장영실과 함께 신사임당을 발표하자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일부 여성단체가 즉각 반발한 것이다. “새 화폐 인물로 여성의 선택이 유력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나 신사임당은 부계 혈통을 성공적으로 계승한 현모양처로 지지되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 여성단체는 현대 여성에게 긍정적인 역할모델이 되어 줄 수 있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여성상으로 선덕여왕, 소서노, 허난설헌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이번 화폐 인물 선정이 신사임당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대두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신사임당이 5만원권 화폐의 인물로 선정되면서 아들인 율곡 이이(5천원권) 더불어 세계 최초로 모자가 화폐의 주인공이 되는 기록을 갖게 되었다.

신사임당

“어허, 이것이 어찌 7살 여자아이가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조선시대 재야의 학자 어숙권은 학자 신명화의 딸이 그린 작품을 보고 감탄을 하였다. 주변 지인들이 ‘천재 소녀가 나왔다.’는 말에 헛헛한 웃음으로 대꾸하였으나,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떠 그렸다는 산수도는 묘사가 세밀하고 절묘하며, 색감이 뛰어났다. 이후 어숙원은 자신의 저서 [패관잡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

한번은 사임당이 잔칫집에 초대를 받아 여러 부녀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하인이 한 부인의 치마에 걸려 넘어지며 국을 치마에 부어 크게 얼룩이 졌다. 가난한 집이라 옷을 빌려 입고 온 터라 그 부인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고, 근심이 컸다.

“제가 수습을 해볼 테니 제게 치마를 벗어주십시오. 이 치마를 가지고 장에 나가 파시면 새 치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임당은 얼룩진 치마에 그림을 그려 주었고, 그녀의 말대로 그 부인은 그림이 그려진 치마를 팔아 새로운 치마를 구입했다. 그녀는 당대에는 산수화로 이름이 높았고, 특히 풀벌레, 포도, 화조, 오죽, 매화 등을 주제로 치밀한 탐구가 기반이 되어야 하는 초충도 분야에서는 사후 우암 송시열이 높이 평가하면서 이 분야의 대가로 추앙을 받기도 했다. 현재 사임당의 그림은 채색화, 묵화 등 40여 점이 전해지고 있다.

글씨와 시에도 능한 조선시대 조기 영재

신사임당

사임당은 어머니 용인 이씨와 학자인 아버지 신명화의 다섯 딸 중 둘째로 태어났으며 아명은 인선이었다. 아버지 신명화는 고려의 개국 공신인 신숭겸의 후손으로, 세종대왕 시절에 고조부 신개는 좌의정을 지냈고, 조부 신숙권은 영월 군수를 지냈다. 신명화는 오랜 공부 끝에 마흔 한 살에 소과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다.
조광조 등 젊은 선비들과 교류하다가 중종 때 벌어진 기묘사화로 옥고를 치룬 이후로 정치에 뜻을 버리고 처가가 있는 강릉으로 내려와 딸들과 조카들에게 성리학과 글씨와 그림을 가르치며 살았다. 당대 선비들 사이에서 진사 신명화의 둘째 딸 인선(사임당)의 재능은 이미 소문이 자자했다.

인선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일찍이 소학과 천자문을 깨쳤고, 어린 나이로 한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림뿐 아니라 성리학적 지식과 문장, 고전, 역사 지식에 해박하여, 아버지나 남편 친구들을 탄복시키는 일이 많았고 글씨에도 능했다고 한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을 남겼는데 초서는 고요하면서 정갈하고 고상하며, 선 굵은 전서는 거침없으면서 섬세하다.

시에도 조예가 깊었으나 아쉽게도 전해지는 것은 세 편 뿐이다. 친정 노모에 대한 그리움을 주제로 서울 시댁으로 가면서 지은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_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나 친정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지은 ‘어머니를 그리며_ 사친(思親)’ 등이 대표작이다. 딸이라도 편견을 두지 않고 교육에 힘을 쏟은 아버지와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서 우수한 조기 교육을 받은 인선은 열 여섯 살에 자신의 롤 모델을 찾았다.

동양 최초로 태교를 했다고 알려진 주 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 부인이 그녀의 롤 모델로, 태임을 본받아 가장 현숙한 부인이 된다는 의미로 스승 사(師), 태임의 임(任), 집 당(堂) 등의 세 글자로 이루어진 사임당이 그녀의 아호가 된 것이다.

부모와 외가의 열린 사고와 교육열

신사임당초서병풍 전폭

신사임당초서병풍 전폭 [출처 : 문화재청]

그녀가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열린 사고를 가진 부모와 외조부의 영향이 컸다. 외조부 이사온은 어린 인선이 어머니가 놓는 자수를 곧잘 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일곱 살 때부터 정식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했고, 아버지 신명화는 딸들에게도 어려서부터 천자문과 동몽선습 등의 사서육경과 글씨와 그림을 가르쳤다.

신사임당초서병풍 전폭

신사임당초충도병 전폭 [출처 : 문화재청]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여인이 예술 활동을 한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로, 시대와 편견을 뛰어넘는 가족들의 교육열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아버지는 특히 둘째 딸인 인선을 아꼈는데, 율곡 이이뿐 아니라 당시 문인들이 남긴 기록에서도 부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진사 신명화가 딸 하나를 특히 사랑하였는데, 총명이 뛰어나고, 고금의 서적에 통달하며 글을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다. “ – 백사 이항복

“신씨는 기묘명현 명화의 따님으로 자품이 매우 특출하여 예에 익숙하고, 시에 밝아서 옛 여범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었다. ” – 김장생

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여, 신명화는 사위를 맞을 때도 딸의 재능을 살려줄 수 있는 사위를 맞고자 했다. 영특한 둘째 딸을 위해 잘 난 사위보다 외조 할 수 있는 인물로 선택했다. 그렇게 해서 편모 슬하에서 독자로 자란 이원수를 골랐는데, 신사임당이 열아홉 살 되던 해 둘은 부부가 되었고,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남편보다 공부 잘하는 아내?

신사임당

조선 중기까지 결혼하면 사위가 처가 댁에 머무는 전통이 이어졌고, 이에 따라 신사임당과 남편 이원수도 자연스럽게 사임당의 친정인 강릉에서 살게 되었다. 형제가 없는 사임당은 아들 잡이로 남편의 동의 하에 오랫동안 친정을 돌보았다. 이러한 가정 환경과 남편의 용인, 시댁 문제에서 해방된 것은 그녀가 결혼 후에도 예술 작품에 몰입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남편 이원수는 온화한 품성에 도량이 넓어, 사임당의 그림을 친구들에게 자랑할 만큼 아내를 이해하고 재능을 인정했다. 반면 학문에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는데, 그런 남편을 학문에 정진시키기 위해 신사임당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과거 시험 전까지10년간 떨어져 지내기로 하고 산으로 남편을 떠나 보낸 것. 그러나, 남편 이원수는 아내가 보고 싶다며 3년만에 공부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신사임당은 이런 남편을 결단력 없다고 나무라고 가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비구니가 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자의식이 강하고, 주체적인 삶을 산 그녀는 늘 마음 속 깊이 이 말을 새겼다.

“기품을 지키되 사치하지 말 것이고, 지성을 갖추되 자랑하지 말라!“

조언을 서슴지 않고 자기 주장도 당당히

신사임당과 그녀의 남편 이원수 묘소

신사임당과 그녀의 남편 이원수 묘소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불리지만, 결코 고분고분한 성격은 순종적인 여인은 아니었다. 학식뿐 아니라 정치적인 안목과 식견도 갖추고 있었다. 남편 이원수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당숙이면서 세도가인 영의정 이기를 찾아 다니는 모습을 보고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권세만을 탐하는 당숙의 영광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을 예견하였는데, 이기는 향후 윤형원과 결탁하여 을사 사회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였는데, 이원수가 아내의 말을 들어 화를 면했으니 그녀의 선견지명이 통한 셈이다. 또한 결혼 말년에는 남편이 외도를 하여 주막집 여인 권씨를 첩으로 들이자 그녀는 크게 반발하여 금강산에 잠시 칩거하기도 했다. 이 때, 그녀가 불교에 귀의해 승려가 되려 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심장병이 발병하여 48세가 되던1551년 죽음을 앞둔 신사임당은 임종 시 남편에게 예법과 자녀 교육을 들어 재혼 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러나, 신사임당이 죽은 후 남편 이원수는 아내의 충고를 무시하고 권씨를 아내로 맞아 이후 이이를 비롯한 자녀들은 크게 고통을 겪었다.

아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다

신사임당과 이이의 생가, 오죽헌

신사임당과 이이의 생가, 오죽헌 [출처 : 공유마당_김순식님]

사임당은 이이라는 걸출한 아들 덕분에 뛰어난 어머니가 될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녀의 꿈에 흑룡이 바다에서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었는데, 이 아이가 셋째 아들인 이이였다. 오죽헌 몽룡실에서 아이를 낳고, 이름을 현룡이라 지었다. 학문과 예술에 조예가 깊은 사임당은 아들에게 직접 글과 학문을 가르쳤다. 신동으로 불렸던 현룡은 세 살에 이미 글을 깨우치고 어머니의 글과 그림을 흉내 냈으며, 네 살이 되던 해 중국의 역사책 사략을 배우고, 열 세 살에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사임당은 자주 병석에 누웠는데, 그는 몸이 약한 어머니에 대한 효심도 지극하였다. 하루는 다섯 살 된 현룡이 사라져 가족들이 한참을 찾아 나섰는데, 외조부의 사당에서 어머니를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사임당이 죽은 후에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무덤 옆에 묘막을 짓고 명복을 빌며 3년간 시묘살이를 하기도 했다. 신사임당은 아들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는 당시로는 드물게 기존 유교나 성리학에서 주장하는 남녀 차별에 반대하였다. 여성에게도 유교와 성리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여성도 하나의 인격체로 간주하였다. 또한 외조부가 그러했듯 이이 역시 집안의 여성들에게 사서삼경을 직접 가르쳤다.

신사임당

신사임당

신사임당은 연산군 10년, 1504년에 음력10월 29일 강원도 강릉 북평촌의 오죽헌에서 신명화와 용인 이씨의 다섯 딸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신인선.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로, 당시 여성에 대한 차별과 한계를 뛰어 넘어 시, 글씨, 그림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예민한 감수성과 함께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 예술가로서도 위대한 족적을 남긴 그녀는 율곡 이이가 사임당의 행장기 [선비행장]을 저술하여 예술적 재능과 우아한 성품들을 상세히 밝히면서 더욱 널리 알려졌다. 19세가 되던 해 이원수와 결혼하고 21세에 맏아들 선을 시작으로 4남 3녀를 낳아 훌륭하게 교육시켰으며 한편으로 양가의 노모도 극진히 모셨다. 셋째 아들인 율곡 이이는 대학자이자 조선 중후기의 뛰어난 사상가가 되었고, 장녀 이매창은 작은 신사임당으로 불리며 시와 그림에도 능하였다. 넷째 아들 이우는 시와 서화로 이름을 날렸다. 사후 아들 이이가 대학자로 이름을 날리자 정경 부인으로 승급되었다.

김미현
일러스트
조영민
사진 협조
공유마당-김순식,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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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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