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의 전후사정

조선 판 왕자와 거지, 광해

그 영화의 전후사정 - [광해, 왕이 된 남자]조선 판 왕자와 거지
그 영화의 전후사정 - [광해, 왕이 된 남자]조선 판 왕자와 거지

시간의 한 부분을 떼어 내 보여주는 영화는 시간의 기록인 역사 속에서 소재를 찾곤 합니다. [그 영화의 전후사정] 에서는 영화의 소재가 되는 주요 사건의 원인과 그 후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전후 맥락으로 이해하고 역사를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보게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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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으로

조선 판 왕자와 거지

  • 영화[광해, 왕이 된 남자]
  • 2012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흥행에 대성공해서 1,23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이병헌의 탁월한 연기력을 크게 손꼽았습니다. 주연 배우의 연기력 외에 영화의 어떤 점이 흥행에 성공하게 만들었는지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영화는 우아한 음악과 함께 광해군(이병헌)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막이 올라갑니다. 하지만 곧 거친 파열음이 들리고 맙니다. 허겁지겁 달려온 도승지 허균(류승룡)에게 광해군은 누군가 자신이 먹는 음식에 독을 넣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광해군과 허균 모두 이것이 신하들의 소행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방도를 찾습니다. 바로 자신을 대신할 가짜를 찾으라는 것이었죠.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허균은 한양을 돌아다니면서 가짜 광해군을 물색합니다. 그런 허균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광대 ‘하선’이었습니다. 광해군을 곁에서 모시고 있던 자신 조차 헷갈릴 정도로 똑같이 생긴 광대 하선을 본 허균은 무릎을 칩니다.

술자리에서 걸쭉하게 임금 욕을 하면서 분위기를 돋우던 광대 하선은 하루 아침에 궁궐로 끌려 가서 가짜 광해군 노릇을 할 처지에 놓입니다.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은 도승지 허균과 조 내관(장광)뿐이었습니다.

# 프롤로그. 변화를 꿈꾸는 왕과 현상 유지를 원하는 신하들

  • 영화[광해, 왕이 된 남자]

왜 임금이었던 광해군은 신하들의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고, 신하들은 임금을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것도 모자라서 목숨까지 노렸던 것일까요? 그것은 광해군이 가고자 했던 길과 신하들이 가고 싶었던 길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분조(分朝: 전쟁이 발발하면서 임시로 세운 조정)를 이끌면서 전쟁의 참상과 피해를 고스란히 지켜봤던 광해군은 1608년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피폐해진 조선을 재건하는 정책들을 펼치려고 합니다. 하지만 신하들은 광해군의 정책에 반기를 듭니다. 결국 광해군의 개혁은 기득권자인 자신들의 이익을 해치려고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하들은 광해군의 처남이 역모를 꾸몄다면서 처형할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압박을 가합니다. 그런 와중에 광해군이 먹은 음식에 독이 들어간 일이 발각된 것입니다. 결국 목숨의 위협을 느낀 광해군은 자신을 대신할 가짜를 찾으라고 지시하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됩니다.

# 줄거리. 광대가 왕이 된 이유

  • 영화[광해, 왕이 된 남자]

광대 하선을 용상에 앉혀 놓은 광해군은 궁 밖으로 나가서 안 개시(이엘)를 만납니다. 실제로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여인 김 개시를 모델로 한 영화 속의 안 개시는 변복을 하고 궁궐을 빠져 나온 그를 따뜻하게 위로해줍니다. 암투와 음모로 가득한 궁궐에서 얻지 못한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서였죠. 그 사이, 뜻하지 않게 임금 노릇을 하게 된 하선은 이것 저것 음식들을 시켜 먹거나 유일하게 정체를 아는 허균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어차피 시간만 때우다가 돌아가면 되기 때문에 광대 하선은 마음 편하게 지내기로 합니다. 하지만 궁 밖으로 나갔던 광해군이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서 상황이 급변합니다. 도승지 허균은 진범을 잡고 광해군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광대 하선에게 임금 노릇을 하라고 얘기합니다. 거리를 누비던 광대 하선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얘기였지만 허균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계속 곤룡포를 입게 됩니다. 처음에는 예, 아니오만 대답하면서 충실하게 가짜 노릇을 하던 광대 하선은 궁녀 사월이(심은경)를 통해 가혹한 수탈과 세금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거기에 명분에 얽매인 신하들이 명나라에 막대한 조공을 바치는 것도 모자라서 2만 명의 병사까지 파병한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맙니다. 결국 광대 하선은 명분을 외치는 대신들에게 일갈합니다.

“부끄러운 줄 아시오!”

그리고는 금 나라에 서찰을 보내서 파병의 자신의 뜻이 아니고 명나라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해명합니다. 사대보다 백성들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고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말입니다. 이 부분이 관객들에게 영화의 가장 클라이맥스이자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부분입니다. 그 밖에도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공납을 없애고 쌀로 세금을 바치는 대동법을 전격적으로 시행하라고 지시합니다.

# 에필로그. 한여름 밤의 꿈

  • 영화[광해, 왕이 된 남자]

광해군이 거듭 자신들을 압박해오자 신하들은 결국 초 강수를 두게 됩니다. 사월이를 통해서 광해군이 먹는 음식에 독약을 넣으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월이는 자신이 독약을 대신 먹는 것으로 이에 저항합니다.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펴는 광해군, 아니 광대 하선을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분노한 광대 하선은 연루자들을 잡아다가 혹독하게 고문하면서 배후를 밝히려고 합니다. 신하들 역시 광대 하선의 정체에 의심을 품게 되는 와중에 의식을 잃었던 광해군이 깨어나게 됩니다. 정신을 차린 광해군은 그 동안 광대 하선이 자신을 대신했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은폐하기 위해 그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진정한 백성들의 왕이 되고자 했던 광대 하선의 꿈은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질 위기에 처합니다. 한편, 광대 하선의 정체를 깨달은 신하들은 군대를 동원해서 궁궐로 쳐들어옵니다. 하지만 텅 빈 궁궐에서 군대를 맞이한 것은 진짜 광해군이었습니다. 궁궐을 벗어난 광대 하선은 그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자객의 추격을 받습니다.

前後事情

영웅으로 기억되다

병자호란, 광해군을 기억하다

  • 영화[광해, 왕이 된 남자]
  •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의 요구로 세운 삼전도비. 비석에는 청나라의 출병 이유, 조선의 항복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정식명은 ‘대청황제공덕비’ [출처 : 문화재청]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인조와 서인세력들은 역설적으로 광해군에 대한 기억들을 선명하게 떠올리게 만듭니다. 집권 세력 내부의 다툼으로 인해 1624년 벌어진 이괄의 난을 시작으로 혼란이 지속되었고, 명분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외교 정책 때문에 청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된 것입니다. 결국 광해군의 실리적이고 신중한 외교정책과는 달리 명나라에 지나치게 치우치는 조선을 못 마땅하게 생각한 청나라가 침략을 하게 됩니다. 1636년의 병자호란은 임진왜란 못지않은 큰 피해를 입혔는데 남한산성으로 대피한 인조가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중국 다음의 문명국을 자처하던 조선이 야만족이라고 멸시하던 여진족에게 굴복하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현재진행형?

  • 영화[광해, 왕이 된 남자]
  • 허준이 저술한 의서, 동의보감. 목판본 [출처 : 국립민속박물관]

만약 광해군이 계속 신중한 외교정책을 폈다면 병자호란의 비극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바로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기억의 출발점입니다. 거기에다 인조와 서인 세력의 무능함은 광해군의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임진왜란을 겪었으면서도 병자호란을 대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그 사이에 존재했던 광해군을 기억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대동법을 시행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고를 탄탄하게 하는 한편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 편찬을 마무리 하게 하는 등의 업적이 ‘개혁군주’라는 이미지를 만들어준 것입니다. 앞서 얘기한대로 광해군을 개혁군주나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편 임금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런 점에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광대 하선을 통해 이런 저런 의문점과 여러 가지 해석을 남긴 군주 광해군을, 우리가 바라는 모습의 ‘이상적인’ 광해군으로 그렸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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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정

영화가 시작되면 지난 역사도 함께 시작된다

임진왜란과 광해군

  • 광해군과 광해군 부인, 류씨의 묘. [출처 : 문화재청]
  • 광해군과 광해군 부인, 류씨의 묘. [출처 : 문화재청]

1592년 벌어진 임진왜란은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 큰 영향을 끼친 미증유의 대 재난이었습니다. 유례가 없는 대규모 침략에 조선의 영토는 쑥대밭이 되었고, 백성들은 죽거나 포로로 끌려가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7년 간의 기나긴 전쟁 끝에 조선은 겨우 왜군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상처뿐인 승리였습니다. 전쟁을 직접 겪었던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뒤에 국가를 재건할 계획을 세웁니다. 열쇠는 ‘대동법’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공납제’라는 세금제도를 유지했습니다. 각 지역의 특산품을 바치는 것이었는데 보관과 운반의 어려움 때문에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습니다. 아울러 중간에서 부패한 관리들이 가로채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더욱 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대동법이었습니다. 공납제를 없애고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고 보관이 쉬운 쌀로 통일해서 세금을 거두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되면 중간에서 관리들이 농간을 부릴 일도 없었죠. 하지만 이런 방식은 그 동안 세금을 빼돌렸던 기득권층에게는 불이익을 가져오는 일이었습니다.

영창대군의 등장

  • (좌)영창대군 묘 [출처 : 문화재청] (우)영창대군 묘지명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 (좌)영창대군 묘 [출처 : 문화재청] (우)영창대군 묘지명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광해군에게도 고민거리는 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 선조가 뒤 늦게 낳은 이복 형제 영창대군의 존재였습니다. 원래 광해군은 왕후가 아닌 공빈 김씨의 소생으로 정식으로 왕세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터지고 세자를 서둘러 책봉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자 급하게 왕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기간 동안 분조를 이끌고 활동하면서 나름 입지를 굳힙니다. 하지만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출산하자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갑니다. 선조는 후궁의 소생인 광해군 대신에 정비인 인목왕후에게서 태어난 영창대군을 총애하여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살얼음판 같던 시간을 지내던 광해군은1608년, 선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아직 어린 영창대군을 제치고 드디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영창대군은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결국 대북파의 우두머리이자 광해군의 측근인 이이첨 등의 계략으로 인해서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귀양을 갔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이 죽음을 비롯해 광해군은 형제를 죽이고 어머니 격인 인목대비를 폐위한 ‘폭군’이라는 오명을 갖게 됩니다.

명분론과 여진족의 강세

영화[광해, 왕이 된 남자]

나라 바깥에도 걱정거리는 있었습니다. 바로 만주 지역의 여진족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래 부족 별로 나눠져서 살아가던 여진족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명나라와 조선이 신경을 쓰지 못하는 틈에 급속도로 통합을 이루게 됩니다. 그 중심에는 누르하치가 있었습니다. 본래 건주여진의 작은 부족 출신이었던 그는 특유의 통솔력과 용맹함을 바탕으로 다른 여진족들을 굴복시켜갑니다. ‘여진족 1만이 모이면 천하가 이를 감당할 수 없다(女眞一萬卽天下不堪當)’라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 통합된 여진족의 힘은 어마어마했습니다.

뒤늦게 여진족의 움직임을 알아챈 명나라는 서둘러 원정군을 보내서 정벌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에도 힘을 보태라고 요구합니다. 임진왜란의 상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던 조선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였습니다. 거기다 여진족과 명나라의 싸움에 잘못 끼어들었다가 불똥이 튈 수도 있었죠. 하지만 사대주의에 빠진 신하들은 재조지은(再造之恩), 즉 나라가 망할 뻔 했던 것을 구원해 준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합니다. 출병을 반대하는 가짜 광해군인 광대 하선과 대신들의 입씨름은 영화에서도 비중 있게 다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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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사정

영화는 끝나고 역사는 계속된다

광해군은 과연 개혁군주였을까

  • 경희궁 숭정전의 전경 [출처 : 문화재청]
  • 경희궁 숭정전의 전경 [출처 : 문화재청]

이번 영화에서도 그렇고 다른 영상매체에서 광해군을 바라보는 시선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다가 기득권층인 신하들과 대립했다가 결국 쿠데타로 인해 몰락하고 마는 비운의 개혁군주로 말입니다. 영화에서도 영창대군의 존재는 감추고, 대동법을 전면적으로 시행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식으로 그런 이미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학계의 연구 동향은 조금 다른 얘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선 대동법은 광해군 때 오히려 퇴보했으며, 경희궁과 인왕궁 등의 궁궐 증축으로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아울러 재위 기간 내내 영창대군을 비롯한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무리한 옥사를 일으켰다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남겨진 기록들의 상당수 역시 개혁군주로서의 광해군의 모습을 흐릿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조선 최악의 시기를 물려받다

  • 선조어서사송언신밀찰첩. 선조가 직접 써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송언신에게 보낸 서찰 7건. 서찰에는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면서, 자녀 3인을 찾아 보호해달라는 내용과 그 공을 높이 사서 물품을 하사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출처 : 문화재청]
  • 선조어서사송언신밀찰첩. 선조가 직접 써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송언신에게 보낸 서찰 7건.
    서찰에는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면서, 자녀 3인을 찾아 보호해달라는 내용과 그 공을 높이 사서 물품을 하사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출처 : 문화재청]

앞서 설명한대로 광해군의 재위기간은 외부적으로는 명나라와 청나라가 다툼을 벌이는 혼란기였고, 내부적으로는 임진왜란의 상처를 극복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남겨놓은 상처는 어마어마했는데 특히 토지 장부가 사라지고 국토가 쑥대밭이 되면서 조세 수입이 크게 줄어들게 됩니다. 전후의 재건에 막대한 재정이 필요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악의 상황이었던 셈이죠. 거기다 일본군의 재침이나 여진족의 침략에도 대비해야 했기 때문에 국방비는 지속적으로 지출되었습니다. 결국 이 과정에서 백성들이 가장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거기다 제일 심각했던 것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통치자인 임금의 권위에 상처를 입었다는 점입니다. 선조는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가 명나라로 넘어가려고 했고, 아들인 임해군과 순화군은 왜군이 포로로 잡히기까지 합니다. 선조는 손상된 권위를 명나라의 도움으로 조선이 살아났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으로 빠져나갑니다. 덕분에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던 의병들은 찬밥 대접을 받거나 역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광해군은 이런 상처투성이 나라를 물려받았던 것입니다.

인조반정과 광해군의 몰락

  • (좌)창의문. 조선시대 4소문의 서북문이다. 현재 종로구 세검정 근처 위치. (우)세검정. 인조반정 때,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날을 세웠다고 해서 ‘세검(洗劍)’이란 이름 유래. [출처 : 문화재청]
  • (좌)창의문. 조선시대 4소문의 서북문이다. 현재 종로구 세검정 근처 위치. (우)세검정. 인조반정 때,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날을 세웠다고 해서 ‘세검(洗劍)’이란 이름 유래. [출처 : 문화재청]

서기 1623년 3월 12일 저녁, 일단의 군사들이 창의문을 부수고 도성 안으로 침입합니다. 이들은 곧장 창덕궁으로 향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궁궐의 담장을 넘어서 도망쳤다가 붙잡히고 맙니다. 도성을 침입한 것은 광해군의 재위기간 내내 소외되었던 서인 세력이었습니다. 이들은 광해군을 체포하고,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를 풀어줍니다. 그리고 광해군의 측근이었던 대북파의 핵심 세력인 이이첨과 정인홍 등을 처형합니다. 이들이 내세운 반정의 명분은 바로 폐모살제(廢母殺第)였습니다.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하고 형제인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죄목을 내세운 것입니다. 이들의 반정이 성공한 이유는 재위기간 동안 소수의 대북파를 제외한 나머지 세력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던 광해군의 약한 지지기반 때문이었습니다. 폐위된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떠났다가 제주도로 옮겨졌고, 1641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반정으로 폐위되었기 때문에 시호조차 받지 못한 광해군은 조선시대 내내 폐위된 군주, 즉 폐주나 폭군으로 지칭되었습니다. 숙종 때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한 신필청이라는 선비가 인조를 모욕하고 광해군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된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광해군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이 생겼습니다.



정명섭
사진
CJ 엔터테인먼트 (포스터 및 스틸컷)
자료 협조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 위키피디아, BH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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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11-04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