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의 전후사정

실제 김정호는 어떤 인물이었나

그 영화의 전후사정 - [고산자]대동여지도를 둘러 싼 권력과 일본 제국주의
그 영화의 전후사정 - [고산자]대동여지도를 둘러 싼 권력과 일본 제국주의

시간의 한 부분을 떼어 내 보여주는 영화는 시간의 기록인 역사 속에서 소재를 찾곤 합니다. [그 영화의 전후사정] 에서는 영화의 소재가 되는 주요 사건의 원인과 그 후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전후 맥락으로 이해하고 역사를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보게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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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으로

제대로 된 지도를 만들테다

  • 영화[고산자]
  • 영화는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행차에서 시작됩니다.
  • 행차에는 거리를 재는 기리고차(記里鼓車)가 따라가면서 지나온 거리를 알려주는 중입니다. 행차를 따라가던 김정호(차승원 분)는 지도의 거리가 엉터리로 표시되어 있다면서 혀를 찹니다. 행차 도중 공식적인 수행원이 아니었던 김정호의 정체가 발각되고 맙니다. 김정호는 정밀한 지도를 만들 욕심에 임금의 행차에 허가 없이 끼어드는 무리수를 둔 것입니다. 자객으로 오해 받아 처벌을 받을 위기에 처하지만 다행히 흥선대원군의 측근이자 후원자였던 신원(공형진 분)의 도움으로 누명을 벗게 됩니다. 신원은 지도에 대한 끝없는 욕심으로 온갖 고난을 겪는 김정호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김정호는 그런 고난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길을 걷습니다. 백두산부터 한라산까지 정처 없이 걸으면서 정성껏 지도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죠.

# 프롤로그. 종이 한 장이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

  • 영화[고산자]

영화는 중간에 과거로 돌아가서 김정호가 왜 지도 제작에 광적으로 미쳐있는지를 보여줍니다.

18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가 주축이 되어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반란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황해도 토사현의 현감은 조정의 명령을 받고 지원군을 보냅니다. 이때 조선시대 관청의 하급 관리인 ‘아전’으로 봉직 중이던 김정호의 아버지가 지원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하게 되고, 한 겨울의 추위 속에서 엉터리 지도를 따라 길을 나섰던 김정호의 아버지와 일행은 그만 길을 잃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맙니다. 그 때의 아픔이 심장 깊숙하게 남아있던 김정호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의 얼굴도 못 알아볼 만큼 오랜 기간 전국을 떠돌면서 지도 제작에 열중합니다. 잘못 만들어진 지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던 김정호는 백성들을 도와주기 위해 애를 씁니다. 누군가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종이 조각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김정호는 지도가 사람의 목숨을 죽이고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가 만든 대동여지도는 나라에서 만든 지도보다 월등하게 정확했습니다. 그런 김정호의 곁에는 늘 투닥거리면서도 일을 도와주는 바우(김인권 분)와 은근히 그를 사모하는 여주댁, 그리고 항상 아버지를 걱정하는 딸 순실이가 있었습니다.

# 줄거리.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 속에 놓인 지도

  • 영화[고산자]

온 정성을 기울여서 대동여지도를 만드는 김정호는 뜻밖의 상황을 겪게 됩니다. 당시 어린 임금을 대신해서 국정을 운영하던 흥선대원군이 지도에 눈독을 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김정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흥선대원군의 요구를 딱 잘라 거절합니다. 자신의 지도는 길을 걷는 백성들을 위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나라에서 독점할 수 없다면서 말이죠. 흥선대원군은 나라의 중요한 정보들이 담긴 지도를 손에 넣은 백성이 외국에 팔아 넘겨버리면 어찌하느냐고 질타합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고개를 숙인 채 굽실거리던 김정호가 고개를 들고 대답합니다.

“백성들을 믿지 못하면 누구를 믿는다는 말입니까?”

한편, 세도 정치를 폈다가 흥선대원군의 탄압에 전전긍긍하던 안동 김씨 집안 역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손에 넣으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의 손에 지도가 넘어가게 되면 자신들의 권력이 무너질까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안동 김씨 집안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빼앗기 위해 엉터리 누명을 씌워서 고발합니다. 하지만 김정호는 탁월한 기억력과 자신이 만든 지도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는데 성공합니다. 지도를 탐내는 세력들이 늘어나자 김정호는 서둘러서 대동여지도를 완성시키기로 하고 마지막 남은 답사지인 독도로 향합니다.

# 에필로그. ‘백성’들의 지도가 되기를 염원하다

  • 영화[고산자]

영화에서는 김정호가 왜 완벽한 지도를 만들려고 애를 쓰는지, 그리고 그가 왜 역사 속에서 기억되지 못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완성된 대동여지도가 우리에게 무슨 뜻을 지니고 있는지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권력가는 늘 지도를 독점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 비극으로 인해서 김정호는 아버지를 잃어야만 했던 것이고 말이죠. 지도를 향한 김정호의 집착과 열정은 흥선대원군에게 저자 거리의 모든 백성들에게 지도를 한 장씩 쥐어주는 것이 소원이라고 얘기하는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김정호는 지도를 백성들에게 널리 퍼트려서 권력가들이 지도를 독점했던 상황을 바꾸려고 합니다. 지도의 위험성을 역설하는 그들에게 맞서서 말입니다. 목판으로 만들어서 인쇄하기가 쉽고, 분첩 형태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보관과 휴대가 가능했던 점은 대동여지도가 권력가의 지도가 아니라 백성들의 지도가 되기를 원했던 김정호의 꿈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前後事情

고산자 김정호와 조선의 지도들

지도는 곧 세계를 보는 창이다

  • 영화[고산자]
  • 청동 지구의. 최한기 제작으로 추측.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보관. [출처 : 문화재청]

문헌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우리나라 지도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 영토를 구석구석 알아야 하고 국경선의 정확한 위치도 알아야 하지만 왕이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 만든 지도는 중요했을 것입니다. 한말의 대표적인 실학자 박규수가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젊은이들에게 지구의를 보여주면서 한 얘기는 지도의 중요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고, 또 반대로 돌리면 조선이 중국의 자리에 있게 된다.”

박규수는 둥근 지구의를 통해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가치관에 도전했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개화파 젊은이들은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서 자주 독립국을 세우려고 시도했습니다.

인간 김정호, 지도와 그의 열정

영화[고산자]
  • 다 펼친 대동여지도의 모습 [출처 : 문화재청]
  • 대동여지도와 함께 김정호는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의 삶이 훗날 누군가의 욕심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점입니다. 그의 삶을 비틀고 왜곡시켜 버리는 바람에 오히려 인간 김정호를 지워버린 셈이죠. 그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지도를 사랑했고, 그것을 위해서 인생 전체를 바쳤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위해 하나 밖에 없는 인생을 고스란히 투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김정호는 그런 삶을 살았고, 따라서 우리는 그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가 중인이건, 평민이건, 어디에서 죽었든지 말입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김정호의 삶은 사라졌기 때문에 더 아름다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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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사정

    영화가 시작되면 지난 역사도 함께 시작된다

    고산자 김정호는 누구인가

    실제 고산자 김정호의 삶과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삶은 많은 부분에서 다릅니다. 이렇게 그의 삶이 잘못 알려진 것은 역설적으로 그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끝에 자막으로도 나오는 것처럼, 대동여지도라는 전무후무한 지도를 완성시킨 인물의 진짜 삶이 어떠했는지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고산자’라는 호를 사용했고, 지도를 제작했을 정도의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볼 때 기술직에 종사하는 중인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할 뿐입니다. 조선 후기 독특한 삶을 살았던 중인과 평민들의 삶을 정리한 「이향견문록」에 그의 이름이 오른 것도 이런 추측에 힘을 더해줍니다. 그가 왜 지도 제작에 일생을 바쳤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덕분에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의 상당 부분도 상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져야만 했습니다. 김정호의 최후에 대해서도 어떤 문헌 기록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치 세종의 지지와 기대 속에서 혼천의와 앙부일구 같은 것들을 만들었다가 가마를 잘못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처벌 받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장영실처럼 말이죠.

    지도에 미친 중인인가 관청 소속 기술자인가

    • 청구도
    • 청구도 [출처 : 문화재청]

    그렇다면 고산자 김정호는 왜 지도를 만드는 일에 일평생을 바쳤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지도에 대한 신념과 기술이 결합된 덕분이었을 겁니다.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지도 제작에 큰 도움을 줬던 실학자 최한기는 ‘청구도’의 머리말에서 김정호가 어린 시절부터 지리에 관심이 많아서 줄곧 지도를 들여다봤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 관심이 실제로 지도제작으로 이어진 것은 그가 가진 어떤 기술 덕분이 아닌가 추측하게 해줍니다.

    실제로 그의 신분을 중인이 아니라 평민 기술자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그가 직접 나무를 깎아서 대동여지도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제한된 정보를 종합해 볼 때, 그가 지리에 관심이 많았고 지도를 만들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김정호가 왜 일생 동안 지도 제작에 몰두했는지를 알 수는 없습니다. 지도 제작으로 돈을 벌지 못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분명 누군가의 후원이나 도움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단순히 생활비나 제작비 문제뿐 아니라 지도 제작에 필요한 각종 자료들을 확보하는 것은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를 지도 제작에 미친 중인이 아니라 교서관(책의 교정과 인쇄를 담당하던 관청)에 소속된 평민 기술자로 보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특별히 손재주가 좋았던 그에게 누군가 지도 제작을 의뢰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그가 지도 제작을 평생을 바쳐서 해야 할 일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대동여지도 제작에 걸렸던 30년이라는 시간은 김정호가 지도에 바친 열정과 신념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도를 가진 자가 권력도 가진다

    • 대동여지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 대동여지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어린 시절 제가 봤던 고산자 김정호의 위인전에서는 흥선대원군이 대동여지도를 펼쳐 놓고 강화도에 쳐 들어온 프랑스군을 물리치는 부분이 나옵니다. 아마 위인전을 쓴 작가가 대동여지도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서 창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 그 일을 통해 지도의 위험성을 깨달은 흥선대원군이 대동여지도를 불태우고 김정호를 처벌합니다. 둘 다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지만 지도가 가지는 힘과 위험성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선이 달라지면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면 다른 길이 보인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저는 최근 답사에서 드론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눈 높이에서 바라보는 것과 다른 것들이 보였습니다. 이 길이 왜 여기로 났는지, 이곳에서 보면 어떤 지점이 잘 보일지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부분들이 늘어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좀 더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고, 능률도 올랐습니다. 19세기에 지도를 가지고 있고 볼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 드론을 띄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어했던 권력가들에게는 지도는 나만이 가져야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이슈가 되었던 구글의 지도 반출 문제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지도를 가진다는 의미는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진 시기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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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사정

    영화는 끝나고 역사는 계속된다

    김정호의 최후

    • 조선총독부가 1937년에 발간한 조선어독본 5권.
    • 조선총독부가 1937년에 발간한 조선어독본 5권. 4단원에서 김정호를 소개하고 있다. [출처 : 국립민속박물관]

    문헌으로서 김정호의 최후를 처음 밝힌 것은 1925년 최남선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동아 일보 사설입니다. 2회에 걸쳐 연재된 기사에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김정호에 대한 얘기들이 나와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지도에 관심이 있었지만 남겨진 지도들이 하나같이 엉터리라는 것을 알고는 직접 지도를 만들 것을 결심했고, 딸과 함께 전국을 누비면서 온갖 고생 끝에 정교한 지도를 만들었다고 소개합니다. 김정호는 나라에 보탬이 되도록 흥선대원군에게 지도를 바치지만 허락도 받지 않고 지도를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김정호와 딸은 감옥 속에서 눈을 감았고, 지도 역시 흥선대원군의 지시에 의해서 모조리 압수되어서 불태워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어 교과서에 실리면서 이 기사는 오랫동안 사실처럼 인식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기사 출처를 밝히지 않아 신빙성에 물음표가 붙습니다.

    대동여지도를 둘러싼 가설과 미스터리

    • 대동여지도 목판본 일부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 대동여지도 목판본 일부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대동여지도를 둘러싼 가장 큰 쟁점은 실제로 김정호가 백두산부터 한라산까지 전국을 누비면서 지도를 제작했는가와 흥선대원군에게 위험한 물건으로 지목되면서 불태워졌는가 입니다. 영화에서도 김정호가 전국을 다니는 모습을 담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당시 조선의 교통사정을 감안하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거기에 이동에 따르는 위험성과 막대한 비용까지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오히려 김정호가 이전 지도들을 면밀하게 비교 분석해서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명확한 문헌이나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가설이 나온 것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일본의 지리학자 이노 다다타카와 비교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다다타카는 상인 출신으로, 당시 일본을 통치하던 도쿠가와 막부의 지원을 받아서 지도 제작에 나섭니다. 다다타카는 일본 전국을 누비면서 직접 측량을 했습니다. 1818년, 그가 사망한 이후에도 제자들에 의해 지도 제작은 계속 이어져서 1821년 「대일본연해여지전도」가 완성되었습니다. 사설을 통해 김정호를 대중에게 처음 소개한 최남선이 이노 다다타카와 비교하기 위해서 전국을 직접 돌며 지도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첨가한 것이 시작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또한 대동여지도 목판본 일부가 1995년에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따라서 흥선대원군이 모조리 불태웠다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닙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와 김정호의 관계는?

    김정호의 삶이 다소 과장된 이유는 일본의 식민 지배 정당화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탄압했으니, 나라를 유지할 자격이 없다고 우리나라를 폄하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물론 사설을 쓴 최남선은 우리에게도 위대한 조상이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점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확인되지 않은 점들을 마치 사실인양 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하는 조선어 교과서에 고스란히 실리면서 오늘날까지 김정호의 삶이 잘못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정명섭
    사진
    CJ 엔터테인먼트 (스틸컷)
    자료 협조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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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16-10-07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