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한 부분을 떼어 내 보여주는 영화는 시간의 기록인 역사 속에서 소재를 찾곤 합니다. [그 영화의 전후사정] 에서는 영화의 소재가 되는 주요 사건의 원인과 그 후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전후 맥락으로 이해하고 역사를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보게 도와줍니다.
의열단 미션: 경성으로 폭탄을 반입하라!
# 프롤로그. 외교정책으로 독립은 불가능하기에…
아나키스트들은 흔히 무정부주의자로 일컬어집니다. 말 그대로 모든 국가 권력을 부정한다는 뜻으로 국가가 없는 사회, 즉 조직과 제도가 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사람들에게 퍼져나갑니다. 제국주의에 신음하던 피 지배민족들과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으며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와는 또 다른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이념으로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던 독립운동가들 중 일부가 이러한 무정부주의를 받아 들였습니다. 가장 열정적으로 받아들인 이와 단체가 바로 김원봉과 의열단이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적의 심장부를 타격한다는 의열단의 투쟁 방식은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김원봉은 상해 임시정부가 추진하고 있던 ‘외교 정책을 통한 독립’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오직 무력 투쟁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만주에서의 무장 독립 투쟁이 사실상 막을 내린 상태에서 이제 남은 것은 단원 개개인이 목숨을 걸고 적의 심장부를 타격하는 방법 뿐이었습니다. 이 방식은 굳은 신념을 필요로 했고, 의열단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하면서 투쟁을 감행하기로 합니다. 의열단의 투쟁은 이렇게 압제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에게는 희망을 주었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는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를 안겼습니다.
# 줄거리.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가
1920년대, 무장독립단체인 의열단은 경성에 폭탄을 반입해서 대규모 거사를 일으키려고 합니다. 의열단의 움직임을 눈치 챈 총독부 경무국장 히가시는 한때 독립군이었다가 일본 경찰로 변절한 이정출(송강호 분)에게 의열단에 잠입해서 정보를 캐내고 거사를 막으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이정출은 상해로 건너가 의열단의 새로운 리더 김우진(공유 분)과 접촉해 정보를 캐내려고 하지만 김우진은 반대로 이정출을 이용해 경성에 폭탄을 반입할 계획을 세웁니다. 한편 경무국장 히가시는 이정출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하시모토(엄태구 분)에게 감시 임무를 맡긴 상태였습니다. 하시모토는 이정출과는 다른 루트로 정보를 캐내면서 두 사람을 압박해 나갑니다. 김우진의 동료이자 자금책인 조회령은 비밀 정보들이 계속 새어 나가면서 의열단 동지들이 희생당하자, 밀정(간첩)을 찾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됩니다. ‘밀정’은 남몰래 상황이나 사정을 살피는 사람을 뜻하는 단어로, 이 영화의 분위기를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서로 속고 속이는 치열한 두뇌 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폭탄을 실은 열차는 경성을 향해 질주합니다. 과연 의열단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 에필로그. 혼돈의 시대 우리들의 자화상 : 김시현, 황옥, 김원봉
영화 밀정의 주요 등장인물은 김우진과 이정출은 실존 인물 김시현과 황옥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1883년 태어난 김시현은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엘리트였지만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망명해서 의열단에 입단합니다. 1923년 조선에 잠입해서 일본 경찰이었던 황옥과 손잡고 거사를 일으키려고 계획하다가 실패하고 일본 경찰에 체포됩니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계속하며 투옥과 석방을 반복하다가 광복을 맞이합니다. 황옥 은 일본 경찰로 근무하던 중 수사를 위해 상해로 건너갔다가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만나게 됩니다. 김원봉의 뜻에 설득된 그는 독립 운동을 돕기로 하고 의열단원들과 함께 무기와 권총을 가지고 국내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의열단원 중 한명이 배신하면서 황옥은 경찰에 체포되고 맙니다. 오늘날까지 황옥이 진짜로 독립운동을 한 것인지 아니면 일본의 밀정 노릇을 한 것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혼돈의 시대를 나름대로 살아가야만 했던 그들의 모습은 영화 보다 더 극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前後事情
조국은 광복이 되었건만…
해방과 친일파의 득세
1945년 8월 15일, 김원봉은 꿈에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맞이합니다. 조국에 돌아온 김원봉은 남북이 분단될 위기에 처하자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펼칩니다. 하지만 1947년, 어처구니 없게도 공산주의자라는 명목으로 체포 당하고 맙니다. 김원봉을 체포해서 고문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들을 혹독하게 고문했던 친일파 경찰 노덕술이었습니다. 해방된 조국에서 그것도 친일파의 손에 체포된 김원봉은 크게 상심하고 맙니다. 얼마 후에 석방되긴 하지만 1948년 김구와 함께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북한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나키스트였던 그가 북한을 선택한 것은 이념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친일파가 득세한 현실 때문으로 보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좌우합작운동을 함께 주도했던 여운형이 암살당한 것도 월북한 이유로 손꼽힙니다. 북한에 머문 김원봉은 북한 정권에서 고위 관직에 오르지만 1958년 김일성에 의해 간첩이라는 명목으로 숙청당하고 맙니다.
남과 북 모두에게 잊혀지다
오늘날 김원봉과 의열단이 남과 북 모두에게 잊혀진 이유는 이념문제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자진해서 월북하고 북한 내각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혔습니다. 반대로 북한에서는 간첩이라는 이유로 숙청당한 반역자입니다.
따라서 남과 북 모두에게 기억될 수 없는 저주스러운 운명이 됩니다. 의열단이 사라진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내세운 이념이 바로 모든 권력에 저항하는 아나키즘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한다.”
모든 권력과 이념은 부당하며, 그 부당함에 저항하기 위해서 투쟁해야 한다는 의열단의 신념은 남과 북 모두에게 환영 받지 못했고, 결국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지난 역사도 함께 시작된다
저항의 물리적 실체와 자존감을 보여주다
모 포털 사이트와 한국 언론재단의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일제 강점기에 언론에 의열단이 다뤄진 기사들의 숫자를 확인해보면 각 330여 건과 250여 건이 나옵니다. 대략 1920년부터 일제에 의해 신문들이 폐간되는 1939년까지 약 20년 동안 600번에 가깝게 언급이 된 셈입니다. 이것은 일본이 얼마나 의열단을 두려워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의열단은 폭탄과 총기류를 이용해서 일본의 관공서와 동양척식주식회사 같은 수탈 기관들을 공격했고, 심지어 총독부도 공격목표가 되었습니다. 총독을 비롯한 고위관료들을 암살 대상으로 삼았고, 실제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일찍이 일본이 겪지 못했던 강력한 저항이었으며, 직접적인 공포를 안겼습니다. 특히 체포된 의열단원들은 재판 과정에서 전혀 주눅들지 않고 의연한 모습으로 맞서 일본인들을 경악시켰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자신들이 경작한 밭으로 생각했고, 독립운동가들을 그 밭의 돌멩이로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그 돌멩이가 자신을 아프게 했으니까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특히 1920년대의 불꽃 같은 독립투쟁의 상당수는 의열단의 손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민족주의자 신채호, 의열단의 정신적 지주
신채호(1880-1936)는 구한말의 격동기를 고스란히 겪은 역사의 산 증인이자 저명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대한매일신보 주필로서 일제의 침략을 비판했고, 1910년 만주로 망명해서 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를 창립하고 대한청년독립단 단장을 역임했습니다. 삼일운동 이후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창립위원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는 독립운동에 열중하면서도 붓을 놓지 않고 <조선상고사>등의 역사서를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1928년 일본경찰에게 체포돼 1936년 여순 감옥 안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다양한 독립 활동을 했지만 그의 활동 중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바로 그 역시 ‘무정부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한학을 배운 유생이자 민족주의자인 신채호의 이미지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북경에서 머물 때 북경대학 교수를 비롯한 일련의 무정부주의자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접한 것으로 보입니다.
1920년대 초, 상해 임시정부가 분열과 대립을 반복하자 이에 실망하면서 차츰 무정부주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부탁을 받고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게 됩니다. 5개항으로 된 조선혁명선언문은 의열단원들이 거사를 일으킬 때 무기와 함께 반드시 휴대했던 것으로 의열단의 지향점과 목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선혁명선언에서는 당시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주장하는 외교활동을 통한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피력하면서 무장 투쟁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김원봉은 총독부를 폭파시켰던 김익상에게 조선이 독립하려면 2천만 민중의 십 분의 팔이 피를 흘려야만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의열단은 그때 선두에 서서 희생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의열단의 이런 주장과 행동은 절망에 차 있던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이 최고의 현상금을 걸었던 김원봉 의열단장
작년 여름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이 등장하는 장면이 나와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임시정부 주석인 김구와 만나서 작전 수행을 협의하는 장면이 짧게 나오지만 배역을 맡은 배우 조승우의 무게감도 그렇고 상당히 비중 있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의열단과 김원봉은 독립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겨놨지만 광복 후에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기억 속에서 사라집니다. 하지만 의열단, 특히 김원봉은 그렇게 잊혀질 사람이 아닙니다.
1898년 밀양에서 태어난 그는 1918년 중국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그리고 다음해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가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합니다. 1919년 독립 투쟁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윤세주 등과 함께 의열단을 세우고 단장의 자리에 오릅니다. 김원봉의 지시를 받은 의열단원들은 다음해부터 조선과 일본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합니다.
조선총독부를 비롯해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종로 경찰서에 잇따라 폭탄이 터지고 고관들에 대한 암살 시도가 이어지면서 의열단장 김원봉은 최고의 현상금을 걸고 잡으려고 할만큼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는 독립운동가가 됩니다. 192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단원 개개인의 용기에 기댄 활동에 한계를 느낀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해서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받습니다.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된 1930년대 후반에는 조선의용군을 조직해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입니다.
영화 「암살」의 흥행 이후 김원봉의 서훈 운동이 다시 추진되기도 했습니다.
영화는 끝나고 역사는 계속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의열단의 투쟁
의열단의 투쟁은 영화보다 더 극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 사례들이 있지만 비행사가 되기 위해서 중국으로 떠났던 김익상의 사례가 가장 대표적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군의 세력 다툼으로 인해 비행 학교가 폐교되자, 상해로 건너가 그곳에서 일하다가 김원봉을 만나서 의열단에 가입합니다. 1921년 폭탄과 권총을 가지고 조선에 들어온 그는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해서 남산 왜성대에 있는 총독부에 잠입, 사무실에 폭탄을 던집니다. 그리고 태연하게 빠져나와서 중국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합니다. 대부분의 의열단원들이 의거를 벌이고 나서 현장에서 체포된 것에 비하면 엄청난 능력이자 행운이었습니다. 김익상은 다음 해 상해를 방문하는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하고 체포당합니다. 일본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재판과정에서도 얼굴에 웃음을 띈 채 앞으로 제2, 제3의 김익상이 나올 것이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김익상은 감형을 받고 석방되지만 고향에 돌아온 직후 일본경찰에게 끌려가 그대로 실종되고 맙니다.
테러인가 투쟁인가
최근 서구를 겨냥한 이슬람 무장세력의 테러가 잇따르면서 종종 의열단을 비롯한 조선 독립운동단체의 무력 투쟁을 이와 비교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의열단의 의거를 테러라고 무분별하게 지칭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의열단의 투쟁과 이슬람의 테러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슬람의 테러가 불특정 다수와 민간인들을 겨냥했다면 의열단의 목표는 일제의 식민 수탈 기관과 친일파, 그리고 일본인 고관들이었습니다. 일반인을 공격하거나 목표로 삼지 않았습니다. 앞서 언급한 김익상도 상해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에 실패하고 도주할 때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추격해오는 중국 경찰에게 발포하지 않고 체포됩니다. 재판정에서 왜 권총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은 김익상은 ‘투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중국 경찰을 죽일 이유가 없다’고 대답합니다. 의열단은 목숨을 건 투쟁을 벌였지만 단 한번도 민간인들을 목표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의열단의 투쟁과 이슬람의 테러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잊혀진 그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영화 「암살」에 잠깐 등장하는 것이 큰 화제가 될 정도로 김원봉은 베일에 가려졌던 인물입니다. 목숨을 걸고 조국 독립을 위해 싸웠던 의열단원들 역시 대부분 역사 속에서 잊혀진 상태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틀린 얘기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현재도 없으니까요.
영화 「밀정」은 잊혀졌던 의열단과 김원봉에 대한 기억을 일깨워주는 영화입니다. 역사책이 아닌 영화에서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게 조금 서글프지만 그들을 잊지 않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