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의 전후사정

인천상륙작전, 영화 관람 전 알아두면 좋을 이야기

그 영화의 전후사정 - [인천상륙작전]한국전쟁의 전세를 뒤엎은 역대급 작전
그 영화의 전후사정 - [인천상륙작전]한국전쟁의 전세를 뒤엎은 역대급 작전

시간의 한 부분을 떼어 내 보여주는 영화는 시간의 기록인 역사 속에서 소재를 찾곤 합니다. [그 영화의 전후사정] 에서는 영화의 소재가 되는 주요 사건의 원인과 그 후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전후 맥락으로 이해하고 역사를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보게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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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상륙 작전

  • 영화[인천상륙작전]
  • 1950년 9월 15일 새벽, 인천 앞바다는 수 많은 배들로 가득 찼습니다.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구상한 상륙작전을 위해 모인 유엔군 소속의 함선들이었습니다. 같은 해 6월 25일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은 미군을 중심으로 편성된 유엔군이 투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세는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미국은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면 한반도를 포기할 계획까지 새우고 있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그런 불리함을 한번에 뒤집는 역대급 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천 앞바다는 우리나라 서해 특유의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서 맥아더 장군을 제외한 모든 미군 수뇌부들이 반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반대 속에서 맥아더 장군은 상륙작전은 적의 의표를 찌르는 게 중요하다면서 인천상륙작전을 강행했습니다.
  • 2016년 7월 개봉한 ‘인천상륙작전’(영어 제목 : Operation Chromite)은 긴박했던 당시의 상황들을 보여주는 영화로, 리암 니슨을 비롯해서 이정재, 이범수 등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합니다.

# 프롤로그. 성공확률 불과 5천분의 1

  • 영화[인천상륙작전]

서울과 가까운 인천은 예로부터 배들이 많이 드나든 곳입니다. 하지만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커서 큰 배를 접안 하기가 몹시 어려웠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갑문을 설치하고 내항을 축조하는 대규모 공사를 한 후에야 겨우 큰 배들을 접안 할 수 있었습니다. 적진의 배후를 공격하는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대규모 물자와 인원을 내릴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 노르망디를 상륙 지역으로 지정한 것도 넓은 모래사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천항은 조수간만의 차는 물론이고 해안지형도 복잡해 상륙하기가 어려웠던 곳입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불리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적들이 예상치 못하는 지역을 공격해야 한다면서 오히려 성공확률이 낮은 인천을 상륙작전의 최적지로 꼽았습니다. 그리고 반대하는 미군 수뇌부들을 설득하는데 드디어 성공합니다. 한편 북한군은 총력을 기울여서 유엔군의 마지막 방어선인 낙동강 일대를 공격하는 중이었습니다.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기 전에 상륙작전을 성공시켜야만 하는 절대 절명의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 줄거리. 작전을 위해선 임무를 감행해야 한다

  • 영화[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남하하는 북한군에 맞서 싸우던 대한민국 해군 첩보부대 소속 장학수 대위는 인천 상륙작전을 준비 중인 맥아더 장군의 호출을 받게 됩니다. 맥아더 장군은 장학수 대위에게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비밀 작전을 지시합니다. 부하들을 이끌고 북한군 점령 하에 있는 인천에 잠입해서 켈로 부대와 연합해 상륙 부대를 유도하라는 임무였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구상한 인천상륙작전은 불리한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작전이긴 하지만 상륙 예정지인 인천의 조수간만과 복잡한 해안지형 때문에 실패할 위험성을 안고 있었습니다. 특히 새벽 또는 아침에 감행될 작전이 순조롭게 이뤄지기 위해서는 상륙 부대에게 위치를 안내해 줄 수 있는 등대의 불빛을 밝혀줘야만 했습니다. 북한군으로 위장한 장학수 대위는 인천으로 잠입해서 켈로 부대와 접선 후, 임무를 수행할 준비를 합니다. 하지만 예전에 악연이 있던 북한군 림계진과 마주치면서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북한군으로 위장한 장학수 대위와 부하들이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림계진에게 의심을 사게 된 것입니다. 치열한 시가전 끝에 장학수 대위는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등대로 향하게 됩니다.

# 에필로그. 등대의 불은 켜질 것이다

  • 영화[인천상륙작전]

엄청난 피해를 무릅쓰고 등대에 도착한 장학수 대위는 서둘러 불을 밝힐 준비를 합니다. 상륙 예정시간이 다가오자 인천 앞바다에서 대기 중이던 맥아더 장군은 아직 등대의 불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부하들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작전 개시를 명령합니다. 장학수 대위가 어떻게든 임무를 완수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채 말입니다. 북한군의 빗발치는 총격에 부하들과 켈로 부대원들이 잇달아 쓰러지는 와중에도 장학수 대위는 끝끝내 등대의 불을 밝히는데 성공합니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상륙 부대는 환하게 켜진 등대의 불빛을 이정표 삼아서 진격하게 됩니다. 결국 5,000분의 1이라는 희박한 성공확률을 뚫고 인천 상륙작전은 성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인해서 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에 성공해서 북진을 개시하게 됩니다.

前後事情

인천 뒤에 가려졌던 또 하나의 상륙작전

  • 좌초된 문산호.  출처 : 장사상륙작전 기념사업회 및 국가보훈처
  • 좌초된 문산호.

인천 상륙작전이 벌어지기 하루 전인 1950년 9월 14일 새벽, 경상북도 영덕의 장사리 해안가에 국군 LST 문산호가 접근합니다. 문산호에는 중학생과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학도병 7백여 명이 탑승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임무는 동해안의 7번 국도를 차단해서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는 것이었습니다.

  • 당시,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한 국군 제 1유격대대(명부대) 소속 학도병.
  • 당시,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한 국군 제 1유격대대(명부대) 소속 학도병.

아울러 다음 날 벌어질 인천 상륙작전을 기만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적진의 배후에 상륙하는 위험한 임무였지만 전황이 급박했기 때문에 나이 어린 학도병을 동원해야만 했습니다. 거센 폭풍으로 인해 문산호는 해안가에 좌초하고 말았지만 학도병들은 폭풍을 뚫고 상륙에 성공해서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북한군이 전차를 앞세워서 반격에 나서면서 큰 피해를 입고 겨우 탈출에 성공합니다. 이 과정에서 139명의 전사자와 92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40여명이 포로로 잡히는 피해를 입게 됩니다. 학도병들의 희생과 활약 덕분에 북한군은 큰 혼란에 빠졌고, 인천 상륙작전을 막는데 실패합니다.

위의 사진 출처 : 장사상륙작전 기념사업회 및 국가보훈처

한국에 인천이 있다면 프랑스엔 노르망디가?

  •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은 인천보다 6년 먼저 벌어진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여러 모로 비교되고 있습니다. 동원된 병력과 함선 규모는 차이가 있지만 적진의 후방에 상륙해서 전세를 역전시켰다는 점이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1944년 6월 6일 감행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미군과 영국군이 주축이 되었습니다. 1940년, 프랑스가 항복하고, 영국군이 덩케르트에서 겨우 탈출에 성공한지 4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위기를 넘긴 영국과 미국은 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독일군을 물리치면서 전세를 역전시킵니다. 하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유럽대륙에 상륙해서 베를린을 공격해야만 했습니다. 연합군은 신중하게 상륙지역을 골랐고, 마침내 노르망디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독일군에게 노르망디가 아니라 칼레가 상륙지역이라고 속이기 위해서 각종 기만작전을 펼칩니다. 영국에 집결한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했고, 미처 대비하지 못한 독일군은 물러나고 맙니다. 상륙에 성공한 연합군은 독일군의 반격을 물리치고, 8월 26일에는 파리에 입성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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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정

영화가 시작되면 지난 역사도 함께 시작된다

전세를 뒤엎은 신의 한 수

  • 영화[인천상륙작전]

1948년 북한은 단독 정부를 수립하고 곧이어 남침을 통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계획을 세웁니다. 소련으로부터 항공기와 전차를 지원 받고, 국공내전을 끝낸 중국으로부터는 조선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넘겨받습니다. 그렇게 북한이 전력을 확충하는 사이, 대한민국은 미국의 견제로 인해서 제대로 된 전차나 항공기를 보유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압도적인 전력을 구축한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적으로 남침을 감행하게 됩니다.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계속해서 남하합니다. 미국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이 참전하지만 마지막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상황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합니다. 맥아더 장군은 이런 고착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적진의 후방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심하지만 그가 점 찍은 인천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이유로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꺾지 않은 맥아더 장군은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했고, 대성공을 거둡니다. 순식간에 인천을 점령한 한국군과 미군은 서울을 탈환했고,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전력을 집중하던 북한군은 순식간에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한 마디로 인천 상륙작전은 바람 앞의 등불 같던 대한민국의 운명을 극적으로 바꾼 신의 한 수였던 셈입니다.

실패를 성공으로 이끈 팔미도의 등대

  • 영화[인천상륙작전]

영화에서 장학수 대위가 등대의 불을 밝혀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는 내용은 실제 역사를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팔미도 등대의 불을 밝혀서 상륙 함대를 인도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미 해군 소속 유진 클라크 대위였습니다. 그는 동료인 계인주 대령, 연정 대위와 함께 한국 해군의 협조를 받아서 인천 앞바다에 있는 섬과 수로를 탐색했습니다. 그러다가 팔미도의 등대가 고장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고하게 됩니다. 사령부는 인천 상륙작전이 벌어지는 9월 15일 자정 등대의 불을 밝히려는 명령을 내립니다. 클라크 대위는 자신을 추적하는 북한군을 피해 팔미도에 도착하여 등대의 불을 밝히는데 성공합니다. 팔미도 등대의 불빛이 길잡이가 되어 상륙 부대는 짙은 어둠을 뚫고 인천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증명하듯 관련자들의 증언이 엇갈리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팔미도 등대의 불빛은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희망의 불빛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도 클라크 해군 대위는 켈로 부대를 이끌고 계속해서 전쟁에 참가했고, 휴전 이후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남겨놨습니다. 그가 남긴 글은 사후 유족들이 발견하여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아메리칸 시저’라 불린 사나이

  • 영화[인천상륙작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전통 있는 군인 집안 출신의 베테랑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서 맥아더는 남북 전쟁에 북군으로 참전해서 전공을 세웠고, 아버지인 아서 맥아더 2세 역시 스페인과 의 전쟁에서 활약했고, 필리핀 반군을 진압했습니다. 집안의 영향으로 받은 일찌감치 군인의 길을 걷게 된 맥아도 장군은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종전 후 미국으로 돌아와 웨스트포인트의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장군이 됩니다. 필리핀 주둔 미군 사령관을 거쳐 1930년 마침내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그는 재직 중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군인들이 참전 수당을 요구하면서 벌인 시위를 군대를 동원해서 진압했습니다. 이 때 백여 명이나 되는 퇴역 군인들과 그 가족들이 사망하면서 군인으로서의 평판은 바닥에 떨어지게 됩니다. 흥미로운 건 육군참모총장 맥아더의 진압 명령을 실제로 수행했던 장본인이 제2차 세계대전의 명장으로 알려진 조지 패튼 장군이었다는 점입니다. 육군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고 이후 퇴역을 한 맥아더는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 필리핀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거센 공격에 밀려서 필리핀을 잃고 호주로 탈출합니다. 맥아더는 호주를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반격에 나서 결국 일본의 무조건적 항복을 받아내고 미주리 호 함상에서 열린 항복 조인식에 미군 대표로 참석합니다. 가문의 내력과 더불어 자신의 화려한 군 경력으로 인해 스타로 대접받았고, 미국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두 차례나 지명되기도 했습니다.

‘아메리칸 시저’라는 그의 별명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후 한국전쟁의 전략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지만, 그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한편 맥아더는 주변과 타협하지 않는 완고한 군인이기도 했습니다. ‘군대에는 민주주의가 필요 없다.’라는 말은 그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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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사정

영화는 끝나고 역사는 계속된다

한국전쟁 66년, 방위조약과 미군

  • 1953년 8월 8일, 서울에서 진행된 한미상호방위조약 최종안 가조인식. 변영태 외무부 장관과 존 포스터 델레스 미국 국무장관.
  • 1953년 8월 8일, 서울에서 진행된 한미상호방위조약 최종안 가조인식. 변영태 외무부 장관과 존 포스터 델레스 미국 국무장관.

사진 출처 : 국가기록원

1953년 10월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한국과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합니다. 이 조약은 미국이 한국의 방위를 도와주겠다는 내용으로 주한 미군의 주둔을 명문화합니다. 미국으로서는 냉전의 최전선이 되어버린 한국을 방어할 필요가 있었고, 한국으로서는 북한과 중국의 재침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조약에 따라 휴전 이후에도 미군은 완전히 철수하지 않고 일부 부대를 주둔시켰으며, 미국은 주한미군과 함께 막대한 차관을 제공함으로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이 재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불평등한 주한 미군 주둔 협상으로 인해 미군의 범죄를 제대로 처벌할 수 없게 되면서 비난 여론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작전 훈련은 계속된다

  • 1993년 ‘팀 스피릿’ 훈련 모습
  • 1993년 ‘팀 스피릿’ 훈련 모습

미군과 한국군은 정기적으로 한미 연합 훈련을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1976년에 시작된 한미 합동 군사훈련 '팀 스피릿'이 1994년 북한과 핵 협상의 와중에 취소되자 이를 대체하여 ‘RSOI’ 라는 한미연합전시증원연습이 시작되었습니다. 2008년부터는 미군이 작전을 주도하기 보다 한국군을 지원 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결의'라는 뜻의 ‘키 리졸브’로 훈련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키 리졸브는 유사시에 한반도 이외의 지역에서 미군 증원 전력을 효율적으로 투입하여 한국군을 지원하고 연합하여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2002년부터 야외 기동훈련인 ‘독수리연습(Foal Eagle)’과 통합하여 실시하고 있습니다.

2016년 현재 포스트 한국전쟁의 인천은?

  • 인천상륙작전 이후, 황폐화된 인천.
  • 인천상륙작전 이후, 황폐화된 인천.

상륙작전이 일어났던 인천은 막대한 피해를 입습니다. 존스턴 별장과 제물포 구락부, 세창양행 사택 등과 같은 근대 건축물들은 물론이고 시내 역시 미군의 공중 폭격과 함포 사격으로 인해 적지 않은 피해를 입게 됩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남하한 피난민들이 들어오면서 인천의 인구는 급격하게 늘어났고, 곳곳에 판자집들이 들어섭니다.

  • 인천상륙작전 이후, 황폐화된 인천.

하지만 한국 전쟁이 끝나고 시간이 흐르면서 인천 지역은 경제 부흥의 첨병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인천이라는 항구를 통해 원료를 수입하고 상품을 수출하는 것이 쉬웠기 때문입니다. 대규모 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제조업 중심의 도시로 거듭나게 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로 알려진 시발 자동차가 조립된 곳도 바로 부평이었습니다. 동아시아의 허브 공항이 된 인천국제공항이 자리잡고 있으며, 차이나타운과 일본 조계지 같은 역사적인 장소들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송도는 국제업무도시와 함께 새로운 교육 본거지로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가 하면 연평도 해전 등 여전히 북한의 도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천상륙작전의 후예로 남아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정명섭
자료 협조
태원엔터테인먼트, 1st Look, CJ 엔터테인먼트 (메인 포스터 및 영화 스틸 컷), e뮤지엄, 문화재청,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정책방송원, 국가기록원, 국가보훈처, 장사상륙작전 기념사업회, Flickr, English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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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8-02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