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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대 영화

원작의 위대함, 마이 리틀 자이언트

원작 대 영화 - 내 친구 꼬마 거인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원작 대 영화 - 내 친구 꼬마 거인 / 글-이대현 영화평론가

상상력, 판타지, 그리고 휴머니즘. 적어도 이 세 가지에서만은 장르 불문하고 스티븐 스필버그를 능가할 인물이 이 세상에 있을까. 「죠스」에서 「인디아나 존스」까지, SF 영화의 개념을 바꾼 「ET」는 또 어떻고.

그런 그가 감독을 맡았다. 디즈니 영화사와 손잡고.
「마이 리틀 자이언트」는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 충분히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 설렘에는 기대와 궁금증이 녹아 있다.

당연히 원작을 뛰어넘는 스필버그의 특기이자 천재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상상력, 판타지, 휴머니즘, 여기에 아름다운 감동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20세기 위대한 작가인 로알드 달의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원작은 동화가 아닌가. 그래서 더 궁금하다. 스필버그가 어떻게 요리했을 지. 동화도 상상력과 판타지가 무기다. 그것을 어떻게 변주하고, 어떤 방식으로 스크린에 구체적으로 펼쳤을까. 스필버그식 창의성이 얼마나 이 작품을 동화보다 더 환상적이고 아름답고 재미있고, 가슴 훈훈하게 만들었을까.

『내 친구 꼬마 거인』는 극단적 크기 차이가 있는 거인과 소녀가 짝을 이루고, 무대가 광활하고, ‘꿈’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다. 그것에 대한 시각적 표현을 스필버그는 어떻게 생각해 냈을까. 새로운 볼거리는 뭐가 있을까. 그래서 더 궁금하고 기대감도 컸던 영화. 굳이 선택하라면 스필버그보다는 로알드 달이다. 판타지 영화의 대가도 어쩔 수 없이 뛰어난 독창력과 대담한 상상력을 재치 있는 글로 아무런 공간적 제약 없이 신나게 풀어내는 작가에게는 미치지 못하는가 보다.

특수효과가 어색해서도, 화면합성이 매끄럽지 못해서도, 거인들의 연기가 너무 만화 같아서도 아니다. 글보다는 영상이 가진 상상과 추상에 대한 표현 한계를 감안하면 당연하다. 영화 「마이 리틀 자이언트」에는 스필버그식 창작과 변주가 곳곳에 들어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원작의 맛을‘확’ 더 살려준다 거나, 원작의 감동을 뛰어넘거나 깊게 하지는 않는다. 가끔은 작품을 동화보다 더 단순하고 얕게 만들기도 한다. 지나치게 아이들을 위한 영화, 디즈니 영화란 생각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로알드 달의 『내 친구 꼬마 거인』은 동화이기 때문에 읽기 쉬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발상, 구성, 진행, 주제 등도 아주 잘 짜여 있다. 단순하고, 직설적이고, 거인의 어눌하고 서툰 말이 코믹하지만 그 속에 인간에 대한, 인간사회에 대한, 인류문명에 대한, 인간의 가치관에 대한 비판이 거침없고 깊다. 고아원에 있는 소녀 소피가 스스로 ‘마법의 시간’이라 부르는 새벽 2시, 창문에 나타난 꼬마 거인(꼬마라고 해도 키가 7미터이다)에게 잡혀 거인들이 사는 곳으로 가면서 시작하는 동화는 둘이 친구가 되어 사람을 잡아먹는 큰 거인들을 잡아 가둘 때까지의 과정을 진행하면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명징하게 드러낸다.

세상 어디엔가 우리와 모습은 같지만 크기가 다른 인간, 거인 혹은 소인이 살고 있다는 상상은 인간의 환상과 모험, 호기심과 공포의 산물이다. 공포심은 거인의 야만성에 기인한다. 물론 이 역시 우리가 설정한 ‘편견’이다. 호기심은 반대로 소인들에게 있다. 그들의 존재 자체와 인간과 같지만 모든 것이 작은 그들의 삶에 있다. 인형이 그 비슷한 산물이다. 거인에게 가지는 공포를 소인에게 넘기고, 거인에게 부여한 절대 강자로서의 희열과 존재감을 대신 가진다.

때문에 인간과 거인의 만남은 모험이자 위험이고, 소인과의 만남은 환상이자 우월감이다.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서 주인공은 그 두 세계를 모두 여행하고 돌아왔고, 영국 동화작가 메리 노튼의 판타지 소설 『마루밑 바로우어즈』를 일본 지브리스튜디오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마루 밑 아리에티」에서 소년 쇼우는 엄지 손가락만한 소녀 아리에티를 만나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환상을 이미 경험했다. 『내 친구 꼬마 거인』의 주인공인 소녀 소피 역시 거인과의 만남은 공포이고, 모험이다.

인간이 만든 이야기에서는 거인이든 소인이든, 그들과의 만남이 단순한 모험이나 호기심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상상을 통해 인간세상을 비춘다. 오만과 이기심, 독선을 풍자하고 비판한다. 『걸리버 여행기』에서는 소인국 ‘릴리퍼트’의 인재 등용으로 18세기 영국을 풍자하고, 거인국에서는 이성적 능력은 있지만 결코 이성적이지 않은 추악한 인간세상을 확인한다. 그래서 때론 거인이나 소인과의 만남이 즐겁고 행복하지 않다.

「마루 밑 아리에티」의 소년 쇼우도 그렇게 돌봐주고 지켜주고 싶었던 아리에티 가족이 끝내 주전자를 타고 강 건너 인간의 눈에 띄지 않은 곳으로 떠나는 것을 보고 깨닫는다. 인간이 얼마나 사랑으로, 호기심으로 다른 생명체의 삶을 파괴했는지. 원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인간이 만들어놓은 울타리에 갇힌 수많은 생명들에게 그것이 문명이고, 안전이며, 행복이고, 보다 나은 환경이라고 말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말해준다.

『내 친구 꼬마 거인』에서 그 비판은 꼬마 거인이 소피를 데리고 온 이유에서부터 나온다. 소피가 거인을 봤기 때문에, 그것을 소문내 사람들이 자신을 잡으러 오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간 세상으로부터 멀리 숨어사는 이유 역시 동물처럼 자신을 큰 우리에 가두어 구경거리로 삼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간은 유일하게 동족끼리 서로 죽이는 이상한 동물이라고 비판한다. 거인에 대한 인간들의 편견과 잘못된 상식도 꼬집는다.

그러나 유일하게 사람을 잡아먹지 않고, 큰 귀로 세상소리를 다 듣고, 아이들에게 꿈을 꾸게 해주어 소피가 ‘선꼬거(선량한 꼬마 거인)’라고 부르는 그는 다른 거인들과 달리 인간, 특히 아이들을 사랑한다. 그래서 생명을 구하러 소피와 함께 인간세상으로 나간다. 선꼬거는 꿈의 동산에서 온갖 꿈을 채집해 병에 모아 놓았다. 그것을 가지고 밤에 몰래 아이들을 찾아가 불어넣어 꿈을 꾸도록 해준다.

그 꿈은 ‘소피의 깜찍한 계략’으로 식인거인들로부터 아이들을 구하는 데에도 쓰인다. 꿈은 『내 친구 꼬마 거인』의 생명이자 줄기이다. 아마 이 ‘꿈’이 없다면 동화는 물론 영화도 그냥 구름 같은 상상으로 끝날 뿐, 살아있는 이야기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환상과 모험, 아름다움과 향기로움도 없었을 것이다.

『내 친구 꼬마 거인』

로알드 달은 동화도 역시 글의 문학임을 보여준다.

선꼬거가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희망을 주는 꿈들을 담은 유리병에 맞춤법이 맞지 않지만 하나하나 써서 붙여 놓은 흐뭇하고 감동적인 설명들이 이 작품의 백미다. 스필버그는 이를 그대로 글로 옮기지 않고 화려하고 다양한 빛으로 시각화해 영화는 역시 영상예술임을 보여준다. 동화는 꿈이 가진 구체성과 선꼬거의 마음을 담았고, 영화는 그 꿈들의 환상과 느낌을 그렸다.

영화는 동화를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군데군데 생략했다. 선꼬거(마크 라이런스)가 왜 거인인데도 사람을 잡아먹지 않고 혼자만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하는 ‘킁킁오이’를 먹는지, 식인 거인들이 왜 저마다 좋아하는 인간이 다른 지 설명하지 않는다. 거인들이 각 나라 사람을 잡아먹는 별난 이유도, 소피(루비 반힐)와 선꼬거가 영국여왕의 침실까지 가는 과정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동화 같다.

집어넣고 바꾸기도 했다. 과거 한 소년과 선꼬거의 만남과 이별에 대한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 소피의 간절한 꿈에 대한 이야기를 넣었다. 소년과의 아픈 기억 때문에 식인 거인들이 눈치를 채자 소피를 다시 고아원으로 돌려보내는 선꼬거, 역시 그의 마음을 알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그에게 가는 소피. 유난히 관계에서의 감동을 소중히 하는 스필버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인지도 모른다.

로알드 달과 스필버그는 마지막도 서로 다른 선택을 한다. 동화는 선꼬거는 작가가 되어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책으로 쓰며 인간 세상에서 소피의 이웃으로 살아간다. 엉뚱하고 대담한 로알드 달다운 발상이다. 동화니까 그래도 된다. 그러나 영화에서 그는 소피와 애틋한 작별을 나눈 후, 식인 거인들을 외딴섬에 가두어 거인의 땅으로 돌아간다. 오히려 동화가 말하는 대로 서로의 세계를, 차이를 존중하는 스필버그의 배려이다. 나와 다른 세계의 삶과 존재방식에 대한 인정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어느 한쪽 세계는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강요나 억압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내 친구 꼬마 거인』은 본질적으로 영화로 ‘그럴 듯하게’ 만들기 쉽지 않은 작품이었다. 인물과 설정, 스토리만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한 주변의 하나하나까지 모두 상상력을 발휘해 구체화해 시각적으로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거인의 땅과 집, 꿈의 동산, 인간과 거인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의 자연스러운 표현 등을 로알드 달 만큼이나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동원해 창조한 스필버그가 없었다면 어떻게 이렇게 배우들의 연기가 살아 숨 쉬는 영화로 만날 수 있었으랴. 혹시 애니메이션으로는 몰라도.

그래서 더욱 영화 「마이 리틀 자이언트」만 봤다면, 로알드 달의 제법 두툼한 동화 『내 친구 꼬마 거인』도 꼭 읽어 보기를. 영화의 장면 장면을 떠올리며 스필버그가 얼마나 대단한 지 새삼 확인할 수 있는 동시에 로알드 달 또한 얼마나 재미있고 기발한 인간인지 확인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기회이니까.

내친김에 그의 또 다른 동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과 조금 오래(2002년) 되기는 했지만, 팀 버튼 감독의 엉뚱함과 조니 뎁의 명연기가 살아있는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까지 읽고, 본다면 금상첨화!

이대현_영화평론가. 1959년생저서 ‘15세 소년, 영화를 만나다’, ‘열일곱, 영화로 세상을 보다’ ,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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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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