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을 거니는 치매 노인, 그녀의 정체는?
따뜻한 봄 햇살이 내려앉은 1980년 4월의 어느 날. 창덕궁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재잘거리며 궁을 거닐고, 궁궐 앞으로 고층 건물이 올라가느라 주변이 공사 소음으로 요란스럽다. 오가는 이들 사이에 웬 초로의 노인 한 명이 있다. 고운 옷을 차려 입고 정신이 온전치 않은 듯 초점을 잃은 눈으로 대조전을 멍하니 서서 바라보는 그녀를 관광객들은 힐끔힐끔 쳐다본다. 쓸쓸한 분위기의 치매 노인. 혹 잃어버릴까 손에 꼭 쥔 주민등록증엔 ‘이름 이덕혜, 주소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창덕궁 낙선재’ 라는 작은 글씨가 또렷이 박혀 있다.
궁에 살고 있는 치매 노인의 정체와 그녀가 이 곳에 살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61세 고종을 원조 딸 바보로 만든 장본인
“태왕 전하 납시오!”
1912년 5월 26일, 8시가 넘는 시각, 때아닌 고종이 행차를 한다는 전갈이 왔다. 갑작스러운 왕의 행차로 덕수궁 복녕당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나라도, 왕좌도, 사랑하는 사람도 모두 잃고 궁에 갇힌 고종에게 늦둥이 딸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신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전날 태어난 늦둥이 딸을 보고 싶었을 뿐. 삼칠일을 무시하고 등장한 고종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일주일도 안돼 고종은 온 가족을 불러 모으고, 7월 13일에는 생후 50일도 안된 갓난아기를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데리고 갔다. 덕혜 바라기, 원조 딸 바보임을 자처한 고종은 회갑에 얻는 막내딸을 위해 덕수궁에 최초의 왕실 유치원인 준명당 유치원을 지어주었다. 혹여 코 앞에 위치한 유치원을 가다 행여 다칠까 싶어 가마로 이동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호칭인 ‘복녕당 아기씨’(복녕당 소생의 왕녀)에는 말 못할 아픔이 있었다. 고종황제의 막내딸로 덕수궁의 꽃으로 자란 그녀였지만 이미 왕위에서 물러난 고종과 어머니 양귀인의 신분 때문에 어디까지나 이름 없는 소녀였다. 그녀는 소학교에 입학하는 10살이 되어서야 ‘덕혜’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부여 받았다. 어린 나이지만 덕혜 옹주는 일찌감치 자신의 위치, 신분을 깨달았다. 곧 다가올 불행까지.
왜 맨날 보온병을 들고 다녀? “독살 당할까봐…”
1925년 3월 28일 경성역에는 사람들이 애처롭게 쳐다보는 동안 한 소녀가 도쿄 행 특별열차에 몸을 실었다. 밤새도록 운 탓인지 그녀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오전 10시가 되자 기차는 출발했다. 아무도 없는 일본 땅에서 혼자 생활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열 네 살 된 어린 소녀는 두렵고 막막했다. 외로운 타지 생활은 역시 쉽지 않았다.
말이 없고 소심한 그녀의 별명은 ‘조센징의 공주’, 여자 학습원 친구들 사이에서 외톨이였다. 한 일본 아이가 다가와 이렇게 물었다. “내가 너라면 독립운동을 하고 있을 텐데, 왜 하지 않니?” 그녀는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얼마 전 돌아가신 아버지, 고종이 그리웠다. 그녀는 품 속에 간직한 보온병을 꼭 쥐었다.
“왜 맨날 보온병을 들고 다니니?” 어느 날, 반 친구가 물었다. 그녀는 숨겨두었던 속마음을 얘기했다. “나도 언제 독살당할지도 모르니까.” 그녀는 아버지가 일본에 의해 독살을 당했다고 생각했고, 때문에 자신도 언제 독살 당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늘 불안 속에 살던 그녀는 서서히 피폐해져 갔다. 연이은 가족의 죽음으로 불면증, 환각, 환상 증상에 시달리던 그녀는 결국 조발성 치매증 진단을 받기에 이른다. 그녀에게는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만이 유일한 안식이었다.
난 한국인과 결혼할 수도 없나요?
한반도 전체가 조선일보 신문에 실린 한 장의 사진으로 인해 발칵 뒤집혔다. 신랑 얼굴이 삭제된 덕혜옹주의 결혼사진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한 나라의 공주가 낯선 땅에 끌려가 정략결혼을 한 것도 모자라 신랑은 애꾸눈에 키가 작고 추남이라는 괴소 문이 퍼졌다. 그러나 소문과 달리 신랑 소 다타케유키는 대마도 백작의 양자로 키가 큰 미남에 엘리트 코스를 밟은 지식인이었다.
이는 그녀가 일본으로 떠나야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아들 영친왕이 일본여자와 강제 결혼을 당하자 고종은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인 김정한과의 비밀 결혼을 추진했지만 일제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딸만은 한국인과 결혼하길 바랐던 고종의 계획이 발각된 것. 일본은 부녀를 떼어놓기로 하고, 덕혜 옹주를 일본으로 불러들였다.
덕혜 옹주는 결혼 한 이듬해 딸 정혜(일본명 마사에)를 낳고 잠시 평온한 나날이 이어지는 듯했으나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결혼 전부터 앓아오던 조발성 치매증이 재발하면서 남편은 덕혜 옹주를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설상가상으로 치료 중 딸의 실종 소식이 전해졌다.
덕혜옹주에서 이덕혜로, 38년만의 귀향
1962년 1월 26일 김포공항에 이제 막 도착한 일본 발 비행기의 문이 열리자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동그란 갈색 모자에 밤색 외투를 걸친 51세 중년 여성이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내려오자 멀리 서있던 또 다른 중년의 여인들이 그녀 앞에 다가와 손과 이마를 모아 절을 올렸다. 낯선 곳이라도 온 듯, 어색하고 불편해 보이는 얼굴은 시종일관 표정이 없었고,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자신을 키워준 유모도, 함께 자란 친구들 도 알아보지 못했다. 38년만에 고향에 돌아왔지만, 총기 있던 14살 소녀는 사라졌다.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에 쉽게 돌아 올 줄 알았지만, 이승만 정권은 그녀를 냉대했고,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걸림돌이 되었다. 어려서 그녀와 결혼 얘기가 오갔던 김정한의 형인 김을한 기자는 그녀의 딱한 사실을 알고 백방으로 뛰었다.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으로 변한 곳에서, 그녀는 어린 시절 놀던 곳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2월 8일 그녀 앞으로 새로운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에서 대한민국의 국민 이덕혜가 되었다. 그녀와 그녀의 궁인들은 황족들이 마지막을 보낸 곳으로 유명한 낙선재에서 1989년까지 살았다.
슬픈 근대사의 자화상, 대한제국의 마지막 공주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황녀라는 이유만으로 평생 정치와 역사의 희생양이 된 덕혜옹주. 불행한 삶과 쓸쓸한 고독은 모두 그녀만의 몫이었다. 굴곡진 그녀의 인생은 우리나라의 굴곡진 근대사와 꼭 닮아 있다. 비운의 시대를 살며 슬픈 자화상이 된 그녀는 침묵으로나마 일본에 대한 저항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인다.
또한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그녀가 삐뚤삐뚤한 글씨로 남긴 마지막 글귀는 그녀의 외로웠던 삶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소설, 뮤지컬 등으로 다양하게 전해졌던 ‘덕혜옹주’. 올해에는 손예진, 박해일 주연의 영화로 우리의 곁으로 찾아올 예정이다.